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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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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단편선> 자백과 고문 (上)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4-27 11:08:06
조회수
564
자백과 고문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 헌법 제12조 제2항

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형사피의자 또는 기타 사람에 대하여 폭행 또는 가혹한 행위를 가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 형법 제125조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 기타의 방법으로 임의로 진술한 것이 아니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하지 못한다.
─ 형사소송법 제309조




고문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저주받은 표시가 얼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증오심이나 적개심으로 표정이 일그러졌다거나 눈에 살기가 감도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고문을 가했던 사람들, 고문 담당 기술자를 혹시 무슨 귀신 악마나 도깨비처럼 연상할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고문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별 뚜렷한 구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약간 스스로 큰 체하고 가식적이고 위협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지만 이것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고 별 뚜렷한 구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느 면에서는 똑똑하고 야무지며 또 겸손한 척도 하는 사람들이다. 미소, 장난기 어린 미소조차 짓기도 하며 한숨도 쉬는, 어디서나 부딪칠 것 같은 그저 그런 경찰관들 중의 한 사람 한 사람이었다. 결혼한 딸의 생활 걱정, 그 사위가 학생운동 출신 전과자여서 걱정이 된다고 얘기하는 사람조차 있었다.
군대 나간 아들에 대한 걱정, 대학 진학을 눈앞에 둔 자제를 가진 어버이로서 당연히 부딪치는 조바심, 서민이면 누구나 안게 되는 살림살이 걱정, 박봉에 대한 불평 등 종로나 명동의 어느 길거리에서나 부딪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저 끔찍하고도 무서운 고문을 감행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하고도 이 사람들이 견딜 수 있을까. 무슨 대단한 비밀이 감춰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 동료에게 고문을 가하고도 혼란에 빠지지 않을지 모른다. 그는 이 사람들의 저 태연함, 고문을 가하면서 짓는 야릇하고도 냉담한 미소에 질려버렸다.
1985년 9월 4일 오전 9시경 그는 남영동 5층 15호실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고문을 지휘하고 감행할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1과 과장 (일명 사장) : 총경 윤재호, 1과 전무 : 경정 김수현, 1과 전무 : 경정 백남은, 그 당시 ‘이름 모를 전기고문 기술자’로 알려졌던 이근안 경감, 1과 상무 : 경위 김영두, 1과 부장 : 경장 정현규, 1과 부장 : 경장 최상남, 1과 부장 : 경장 박병선 등이다.
그들은 그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 치안본부 제5차장인 박처원 경무관의 직접 지휘를 받았고, 형식적으로는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의 수사지휘를 받았으며, 주요 공안사범의 신병처리와 신문에 대한 국정원장의 조정을 받도록 의무화한 ‘정보 및 보안업무 기획 · 조정 규정’에 의해 장세동 국정원장이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통해 강력하게 통제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예산은 대부분 국정원에서 나왔다.

비가 내리던 새벽 5시 반, 그날은 유난히 껌껌했다. 그는 잠이 덜 깬 채로 혼란에 빠져 끌려갔다. 대략 남영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긴 했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무리 꼽아 봐도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기만 하고 가슴 속만 저려올 뿐이었다.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어떤 의경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내보내 주는구나, 고마움조차 느끼며 옷을 주섬주섬 꿰어 입고 유치장을 나섰다.
수사과 사무실을 지나 복도로 나서는 순간, 스산한 어둠이 확 덮쳐 왔다. 7~8명의 정사복이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서 있었다. 아찔했다. 다리도 후들후들 거리고. 여러 번 체포 당했지만 이번 같지는 않았다.
“김근태씨죠? 같이 가봐야겠소!”
경상도 사투리의 거한이 그의 앞을 막았다. 순간, 이건 구속이라고 판단했다.
“좋소, 어딘지 가봅시다!”
보호실 쪽으로 뚫린 좁은 복도를 지나 마당으로 나서니 거기에 포니 자동차가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다. 사방은 껌껌한데 경찰 10명이 둘러쌌고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뒷좌석 가운데 올라탔다. 왼쪽에는 최상남이, 오른쪽에는 김영두가 앉았다. 최상남이 잠바를 벗어 그의 머리를 감싸고 눈이 보이지 않도록 한 채 머리를 짓눌렀다. 김영두는 키 188센티미터, 몸무게는 95킬로그램쯤 나가는 거한인데 그 체격이 그를 짓눌러 버리는 듯 했다.
5층 15호실. 건물 왼쪽 맨 끝방으로 끌려갔다. 겉으로는 주저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서니 덮어씌운 잠바를 치웠다. 사방을 둘러보니 짐작할 만했다. 이렇게 낯설고 어색할 수가 없었다. 뿌연했던 사방이 점차 빛바랜 황갈색으로 변해갔다. 생기도 없고 시들어 버리는 듯하면서 이 모두가 비현실적으로, 그냥 일정한 거리 밖에 널려져 있는 듯했다.
먼저 김수현이 들어와서 물었다.
“진술 거부를 잘 한다지, 여기서도 할 거야? 경찰과는 달라. 당신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가 아픈가?”
그가 대답했다. “피로의 누적입니다. 또 방금 구류 살고 나오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민청련 대표직을 그만두어서 어디 휴양지로 가서 몇 달 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김수현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그 몸으로 견딜 수 있겠는가. 당신 많이 깨져야겠구먼”
“제 의지가 살아있는 한 진술을 거부할 것입니다.”
김수현이 무릎 꿇고 앉으라고 명령했다. 그가 거절했다. 그러나 주춤주춤 밀려서 얼떨결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비통한 심정이 되었다.
뒤이어 백남은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정말 버틸거야? 여기서도 진술 거부가 통할 줄 알고? 어림도 없어.”
이에 대해 그가 끝까지 버틸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그러자 백남은은 “좋다, 해보자. 우리는 너를 깨부술 것이다”라고 소리쳤다.
그 칠성대는 이렇게 생겼다.
세면대보다 약간 높고 남자 팔뚝 굵기의 각목 4개가 (어쩌면 5개인지도 모르겠다.) 사람 키보다 약간 큰 길이로 펼쳐진다. 앞부분은 경사져서 세면대에 착 밀착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 위에 담요가 깔려있다. 사람이 눕혀지면 담요로 싼 다음에 그 바깥을 줄로 꽁꽁 묶어 버린다. 담요로 몸을 감싸는 것은 몸에 상처가 날까봐 그러는 것이다. 상처가 남겨진다면 그것은 곤란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문 당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담요 바깥을 묶는 줄은 군대 허리띠 같은 것으로, 그것도 상처 자국이 남지 않도록 선택된 것이 분명하다. 발목, 무릎 위, 허벅지, 배, 가슴까지 다섯 군데를 묶는다. 완전히 묶어서 꼼짝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머리는 움직일 수 있다. 칠성대 위에 올려 눕혀진 그는 순식간에 완전히 결박되었다.
협박자들은 아무런 주저함 없이 물고문으로 들어갔다. 백남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따라 눈이 가려져 있는 그의 얼굴에 수건이, 노란 세수수건이 덮어 씌어지고 세상은 희뿌옇게, 누렇게 되고 말았다. 정현규와 최상남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머리 양쪽을 힘을 주어 고정시키고 그 위에 수도꼭지를 틀어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도록 했다. 육척 거구인 김영두가 그 샤워 꼭지를 잡고 사정없이 얼굴에 물을 들이댔다. 그러는 한편 주전자에도 물을 담아 동시에 붓고 또 쏟아 부었다.
숨이 탁탁 막히고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안간힘일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덮쳐왔다. 주위는 신 냄새 나는 짙은 깜깜함으로 뒤바뀌고 속은 메스꺼워지다가 완전히 뒤집히고 콧속으로는 노린내가 치솟고, 물이 쏟아지는 그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온몸을 버둥거리고 혼신의 힘으로 뒤척거리니 칠성대도 기우뚱 하였다. 몸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버리고 담요도 땀으로 물컹해졌다.
샤워기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의 감촉, 물소리는 공포가 되어 온몸에 덮쳐오고 천근만근 무게로 짓눌려 왔다.
‘그래 무슨 길이 있을 거야, 진술 거부는 포기하자. 그리고 부딪혀 보는 거다’ 하고 생각이 바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런데 이 고문자들은 아주 낮게 뭐라고 소곤거리면서 음산하게 웃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이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그 웃음이 들려오고, 그는 그 웃음을 정말 죽이고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더 갔는지, 아니 시간 따위와는 관계없이 이제 발버둥질조차 기진하여 할 수 없게 되자,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오직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쏴아! 하고 내리꽂히는 그것만이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샤워기와 주전자를 치우고, 얼굴에 덮어씌웠던 수건을 치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정말 다급하게 외쳤다. “말을 하겠습니다. 진술 거부를 하지 않겠습니다.”
백남은이 물었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
그는 기를 써서 대답했다. “묻는 말에 뭐든지 대답하겠습니다.”
“뭐, 묻는 말에 대답하겠다고? 필요 없어. 아직 멀었구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항복이야. 다시 시작해!”
이미 수건은 덮어씌워지고 샤워기는 다시 맹렬하게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답답함, 질식해 버릴 것 같은 공포, 그리고 아득하고 아득한 절망감, 그것 뿐이었다. 턱을 약간씩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낭떠러지로 다시 곤두박질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렴풋이 “항복하지, 그래도 진술 거부할 거야? 안 하지?” 하며 뭔가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수건을 치웠다. 아직은 살아 있는 것이었다.
속은 뒤집혀지고 수없이 구역질을 하게 되었다. 온몸은, 담요는 땀으로 물바다를 이루었다. 칠성대 위에서 다시 항복과 진술 거부 포기를 확인한 다음에 고문자들은 묶은 줄을 풀었다. 휘청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멍청해져서 시키는 대로 옷을 주워 입었다.
대략 7시 반경부터 이 물고문이 시작되었는데 12시 반이 이미 지나 있는 것이었다. 이 첫 번째 물고문은 5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9월 4일 오후 1시경 이후, 첫 번째 물고문이 끝난 뒤 그는 대답하고 쓰고를 반복하였다. 무엇인가 얘기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기억해 낼 수도 없고, 앞뒤가 서로 뒤바뀌어 버렸지만 고문자들은 끝없이 묻고 또 묻고 하였다. 그러더니 저녁 8시경 백남은이 다시 옷을 벗기고 눈을 가리개로 씌우라고 명령했다.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은 민첩하게 움직였고, 그는 또다시 고문대 위에 칭칭 묶여져 버렸다. 고문, 이것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무서워지고 더욱 낯설어지는 것이었다.

첫째, 폭력혁명주의자임을 자백하고
둘째,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자백하고
셋째, 각 민주화운동 부문에서 움직이는 핵심적 인물을 대라.
김근태와 민청련이 제일 과격하고, 제일 먼저 움직여서 오늘 같은 사태를 가져왔다. 우선 학생운동과 노동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을 대라.
이 두 번째 물고문도 대략 5시간 걸렸다. 끝난 것이 5일 새벽 1시경이었다.
9월 4일, 두 번에 걸친 물고문. 그것만으로도 그의 인간적 주체성은 크게 동요되고, 일관성 있는 인격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강제되는 것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음을 처절히 느끼게 된 것이다. 발뒤꿈치와 팔꿈치의 상처는 이미 이 하루의 고문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다. 물론 이후 이 상처는 더욱 깊어 갔지만 말이다.

델시 상표의 사무용 가방을 들고 건장한 사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운동화를 꺼내 신고서 뭔가 삐딱하니 꼬나보았다. 거리 어느 구석에 있을 깡패, 전형적인 어깨 타입의 풍모였다. 눈은 불안정하고 뻐기면서 걷는 인간 백정 같았다. 몸무게는 거의 90킬로그램에 육박할 것 같고 키는 그렇게 큰 편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전설에 나오는, 뒤뜰에서 식칼을 가는 그 누구일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동안 장의사가 한가했는데 일감이 풍족하게 생겨서 살맛난다.작업을 차근차근 해 나갈 터이니 단단히 각오하라”고 협박했다.
전기고문, 그것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저녁 8시 반부터 9월 6일 새벽 1시경까지 계속 되었다. 그가 전기고문이라고 하니까 고문담당자는 이것은 전기고문이 아니라 ‘배터리고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뭐라 해도 전기고문임이 틀림없다.
최상남은 그에게 “잠을 전혀 못 자서 피곤할 것이다. 이 방의 불을 끌 수는 없고, 대신 눈에 반창고를 붙여 줄 테니까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두라”고 하면서 양쪽 눈에 엑스자로 모두 반창고를 붙였다. 전기고문 장치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완전히 발가벗겨졌다. 팬티도 남김없이 날아가 버렸다.
칠성대 위에 또다시 꽁꽁 묶여진 다음에 고문자들은 발바닥과 발등에 붕대 같은 것을 여러 겹 감았다. 새끼발가락과 그 다음 발가락 사이에 전기 접촉면을 끼우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고, 이 붕대도 전기담요처럼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그런 다음 발에, 사타구니에, 배에, 가슴에, 목에, 그리고 머리에 주전자로 물을 들이부었다. 그때 물의 선뜩함은 귀기가 살갗에 달라붙는 바로 그것이었다. 고문 기술자는 뭔가 쉴 새 없이 떠들고 겁주고 협박했다. 이제 전기가 통하면 회음부가 터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 때문에 팬티를 벗겼다고 했다. 우선 물고문부터 시작했다. 다만 그 강도는 물고문만 할 때보다 못했지만 공포나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은 더욱 깊어만 갔다.
어느 정도 물고문이 진행되어 몸에 땀이 나게 되면 그때부터 전기고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그러다가 점점 길고 강하게, 강력하게 전류의 세기를 높였다. 그리고 중간에 다시 약해지고, 가끔씩은 발등에 전기를 순간적으로 대기도 했다.
이제는 희미한 자국으로 남아있지만, 그래서 발등의 살가죽이 꺼멓게 타 버리게 되었다. 김수현과 백남은은 지켜보면서, 고문 기술자가 직접 전기고문을, 김영두가 물고문의 집행을 하도록 지시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한마디로 불고문이었다. 외상을 남기지 않으면서 치명적으로 내상을 입히고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수반하는 고문이다. 물고문과 불고문의 조화라고나 할까. 그 상승효과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물고문이 밑바닥에 닿지 않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질식해 가는 것이라면 전기고문, 즉 불고문은 단근질해서 뜨거워진 불 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러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튀기는 그런 것이다.
전기고문, 그것은 핏줄을 뒤틀어 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를 끊어버리는 것 같았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리는 공포가 몰려왔다.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끝까지 쑤셔 댈 때마다 어두운 비명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몸의 각 부분은 해체되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오직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비명뿐이었다. 몸 전체가 시퍼렇게 핏줄이 솟고 헉헉 꺼이꺼이 목은 쉬어 가는데 이것은 멱이 따진 돼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게 하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빨로 혀를 꽉 물으면 혀를 빼라고 강하고도 긴 전류를 흘려보내고, 끙끙대면서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 상태로 돌입케 하는 것이었다.
미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온통 휘감고 그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그의 눈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환상이 공포와 광란의 소용돌이로 닥쳐왔다. 이것은 슬픔이라든지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잔인한 파괴, 그 자체였다.
담요는 땀에 흥건하게 젖는데 물을 쏟아 부었던 몸의 각 부분은 금방 말라 버리고, 특히 머리털은 곧 말라서 물고문을 수시로 해야 됐다. 이 고문 기술자가 그의 가슴에 올라타고 쿵쿵 굴리는데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했다.
고문대 위에 묶여 고문을 받을 때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고문자들의 요구 명령은 귀에 왕스피커를들이대는 것처럼 아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머릿속에 아주 깊이 새겨졌다. 영원히 낫지 않는 상처를 입히면서 새겨지는 것이다. 소름끼치는 공포와 고통을 수반하면서 각인되는 이 고문자들의 요구에는 엄청난 심리적 에너지가 충전된 채 기억되는 것이다.

9월 4일 오전 남영동에 강제로 끌려 온 이래 그는 단 한숨의 잠도 한 끼니의 식사도 하지 못했다. 별로 자고 싶지도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9월 6일, 점심 식사를 주는 것이었다. 다 먹지는 못했지만 하여간 고마운 첫 식사였다. 그는 이것으로써 저 지옥 같은 고문의 폭풍우가 혹시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봤다.
저녁 7시쯤 되었을 것이다. 김수현과 백남은은 얼굴에 웃음기를 띠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앞의 고정된 철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김수현이, 왼쪽 옆에 백남은이 앉았다.
이것은 무슨 대화와 논쟁자리 같았다.
그들이 길게 요구한 사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80년 이후 민주화운동이 과격해지고 급진적이 되었다. 특히 학생운동이 그렇다. 이른바 Revolution (혁명)의 R을 지시하고 조정하는 사람이 명백히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얘기를 해달라. 아직 자신들이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요구에 응한다면 정부는 어떤 고위층이든지 그가 지정한 사람을 오게 해서 명백히 약속을 하고 지키도록 주선을 하겠다. 그를 내보내 줄 수도 있다. 만약 내보내 준다면 우리들에게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
그가 대답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 사회에는 심각한 갈등이 있고 대결 의식조차 희미하게 있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것은 정치군부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고 정권교체가 국민 의사에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고비에 다다랐다. 이 고비를 올바른 방향으로 극복해서 국민 내부에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고, 이것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경제문제, 민생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백남은은 “보답이 겨우 그뿐인가?”라며 소리를 높였고 김수현은 “지금 우리와 논쟁을 하려는 것이냐, 설득하려는 것이냐. 필요 없어. 이 새끼,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는 거야” 하면서 버럭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직후 돌아온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전기고문 그것이었다. 전기고문 기술자가 들어오고 고문대가 들어오고 이 날은 윤재호를 제외한 모든 고문자들이 총출동되었다. 노기등등한 이들의 눈빛에는 푸른빛마저 감도는 듯 했다.
이 날의 고문은 포악하고 격렬했다. 이 고문 담당 기술자는 망나니였다. 숨통을 막아버리고 목줄띠를 끊어버리는 인간 백정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냈다. 요기 어린 파르스름한 달빛이 감도는 황야에서 작두칼을 휘둘러 대는, 미쳐 버린 인간백정이었다. 김수현과 백남은, 김영두 등은 이러한 망나니를 찬양하고 거들어 주고 축하하는 귀신들린 자들이었다. 격렬한 전기고문을 길게, 아주 길게 가하여 온몸이 고문대 위에서 오그라들어 버리는 것 같았고, 핏줄은 물론 모든 살이 마침내 다 타 버려 누리끼리한 살가죽과 뼈만 남아 버린 것 같았다. 쉬지 않고, 조금도 쉬지 않고 이틑날 새벽 1시경까지 계속 했다. 고통을 못이겨 소리소리 질러댔기에, 목 안에서 피냄새가 역하게 올라오고, 콧속에서는 단내가 계속 피어올랐다. 물고문으로 인해 속이 빈 위는 계속 헛구역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원통해서 이렇게 개죽음 당할 수는 없다.
이 고문자들이 시종 뇌까리는, ‘심장마비라는 의사의 진단서를 붙이면 자신들은 완전히 발뺌할 수 있다. 어디 외상이 남아 있는가’라는 협박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다가올 수가 없었다.
이날 고문 담당 기술자가 고문 도중에 지쳐서 잠시 쉴 때가 있었는데, 그때 본인의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야, 이렇게 작은 것도 X라고 달고 다니냐. 너희 민주화운동 하는 놈들은 다 그러냐”라는 성적인 모욕도 했다. 그 당시 약간 열등감이 자극되기도 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그때 ‘그게 무슨 문제냐, X이 없더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 고통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너한테 그 이상의 모욕과 폭언을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고문이 끝난 것은 이튿날 밤 1시였다. 고문자들이 지쳐서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9월 8일 일요일 오전 10시경, 지옥에서 온 나찰같은 얼굴을 한 윤재호가 방에 들어섰다. 잠시 후 김수현, 백남은, 김영두, 고문 기술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 그리고 또 한 사람 허만조 등이 방을 꽉 메웠다. 윤재호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소리를 질러 댔다.
“너 이 새끼, 배후를 안 대? 콧구멍에 고춧가루를 쳐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버리고 죽여 버리겠다. 안 댈 거지? 그거 (고문대) 들여와. 이 새끼, 내가 직접 고문할게.”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당황한 듯 하면서 모두 서 있었고 김수현, 백남은, 고문 기술자들이 굽신거리며 “저희들이 하겠으니 나가십시오”라고 애원 겸 정중하게 말했다. 그 사이 정현규와 최상남이 고문대를 들고 들어왔다. 이렇게 고문은 또 시작되었다. 주제는 아니 메뉴라고 할까. 배후, 정치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불순한 모종의 배후, 이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나이 40인데 누가 배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당신들이 말하듯이 민주화운동에서 책임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고 오늘의 이 결과를 가져오게 한 역할을 해냈는데, 내가 누구에게 조정을 당하겠습니까?”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그늘진 곳에 숨어 있는 배후, 공개운동선상에 나와 있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요구했다.
그는 이점에 대해서 “이미 당신들은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사무실, 집 전화를 도청했고 나를 미행해 오지 않았느냐, 그러고도 이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며 항의했다.
고문 기술자는 “이 새끼 항복했다더니 아직 입이 살아 움직이는구먼. 진짜 맛을 보여주겠어. 남민전 이재문이 어떻게 죽은지 알아? 전노련 이태복 얘기를 들었을 거다. 이재문은 여기서 당해서 이미 속이 부서져 감옥에서 병사한 거야. 너도 각오해!” 라고 협박했다. 이 날은 남영동에서 받았던 고문 중에서 최악의 고통스런 고문이었다.
진부하고 희극적인 추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의 월북 여부에 대한 추궁, 행적에 대한 추궁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짓거리이다. 하지만 고문자들에게는 반드시 빼놓지 않는 과정이며, 고문을 가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꺼리가 된다.
결국 그는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문자들은 좋아서 히히덕거리기조차 했다. 고문 기술자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백남은이 추궁했다. 어디서 어떻게 월북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했다. 백남은, 김수현 등은 폭소를 터뜨리면서 “그것은 여기서 취급했어, 우리가 잘 알아서 하고”라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궁을 멈추었다.
다음은 그의 형들 셋이 월북을 했고,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을 만났다는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었고, 이것도 결국 인정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했더니,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요구하면서 증거를 요구했다. 돈을 받았느냐고 해서 1백만 원을 받았다고 했다. 74년도에 쌍문동 집 근처에서 한 번 만났고, 84년도에 역곡에서 한 번 만났다고 했다. 고문자들은 참으로 좋아했다. 좋아서 미쳐 날뛰기 일보 직전인 것 같았다. 김수현은 합리적 근거를 대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백남은이 이렇게 말했다. “평양이 부산이지?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반복해서 백남은이 얘기할 때 비로소 알아들었다. 백남은은 이어서 “그런 일 없지?”라고 확인을 했고 “그런 일 없는 것은 우리가 알아”라고 말했다. 이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날 지경으로 고마워지는 것이었다. 이 틈에 용기를 내어서 “정말 그런 일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고마움과 안도에 떨리는 목소리로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반복하여 확인했다. 고문 기술자가 나섰다. “그러면 왜 만났다고 했는가, 고문에 못이겨서 그랬다고 했는가”라고 추궁하며 다시 강하게 전기고문을 시작하면서 “아냐, 간첩을 만났지?”라고 요구했다. 부정했지만 결국은 또 인정하게 됐다. 도대체 몇 번을 이렇게 왔다갔다 하도록 고문하고 강요했는지 모른다. 거기다 또 말이 왔다갔다 한다고 고문했다. 아, 이처럼 눈물나는 희극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8일 오후 1시 반경, 일단 오전 고문은 끝났다. 저녁 7시경에 또 전기고문이 시작되었으며 밤 12시까지 계속되었다.
고통을 못이겨 악을 써 대고 고문 기술자는 맞고함을 치고 김수현 등은 킥킥거리며 몸부림치는 그를, 묶인 채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고문을 계속했다. 역시 배후의 문제였다. 그늘에 가려진 사람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무척 곤경에 빠져버렸다. 둘러댈 이름도 없는 것이었다. 배후란 것은 없다고 해 봐야 아무 소용 없는 헛 일이었다. 결국 재야 운동권과 종교 운동권의 인사가 모두 배후라고 불면서 인정해달라고 애걸복걸했지만 고문자들은 막무가내였다. 그것은 물고 들어가는 일일 뿐이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다가 이들은 재야인사로 초점을 옮겼다. 그중에서도 나이 많은 사람들 이름을 계속 대라고 요구했다. 줄줄이 대고 거절 당하고, 또 대고, 이렇게 반복하기를 십여 차례 하다가 함세웅 신부와 권호경 목사, 두 사람으로 좁혀지게 되었다. 이것은 그와 고문자들의 협력과 타협, 그리고 조작 위에 세워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함 신부는 완전한 배후로서 결정되었다.
이날 고문이 마무리될 즈음 해서, 이범영씨가 다시 거론되고 “민한당사, 미문화원 사건 조종을 했지”라고 강박하여 “각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범영씨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이날부터 복습이 시작되었다. 지난 4, 5, 6일 있었던 이을호, 문용식의 N.D.R과 C.D.R, P.D.R에 대해 완전학습의 총정리가 고문대에 눕혀진 채 요구되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잘 해내서 칭찬을 받고 고문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8일에 있었던 물고문, 그것은 4, 5, 6일에 자행한 것보다 지독했다. 그것은 세수수건 대신 코와 입 위에 거즈를 덮고 물을 쏟아 부었다. 세수수건을 덮고 고문할 때에도 호흡이 완전차단, 그것인 것이다. 공기가 끼어들 여지를 배제해 버린다. 그래서 그런지 이날 물고문의 중간에 한 번 입을 벌려서 고춧가루를 쳐넣었다. 곧 뱉어버리긴 했지만 입 속이 얼얼하고, 고문대 위 담요에 고여 있는 땀과 물 속에 떨어진 고춧가루 때문에, 등 전체가 따갑기도 했다. 무슨 화학약품이라고 겁주면서 거즈 위에 한 움큼을 집어다 놓고 물로 녹여서 입, 귀, 콧속으로 녹아들도록 했다. 이것을 세 번 했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간 찝질한 것으로 보아서 소금이 아니었던가 싶다.
목이 완전히 붓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연거푸 비명을 질러 댔기 때문에 목이 쉬게 된 것이다. 팔꿈치와 발뒤꿈치는 이미 헤어져 상처가 어느 정도 깊어지기도 했다. 고문자들은 팔과 발뒤꿈치 상처에 많은 신경을 쓰고 약을 사다가 먹이고 바르고 열심히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발뒤꿈치 상처가 특히 오래간다고 얘기했다. 외용 살포제로 니라민산이라는 하얀 가루약, 수많은 항생제 복용, 옥시풀과 머큐로크롬 등으로 치료했다. 한편 목 아픈 데에도 무슨 약인가를 주어서 먹고 가라앉혔으나 쉰 목은 잘 낫지 않았다.
9월 10일 밤 7시경부터 10시경까지 고문을 당했는데, 처음 당하는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전기봉고문인데, 양쪽 발등에 무슨 장치를 하고 진동을 일으켜 고통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 고문을 직접 지휘한 것은 김영두이고 그 뒤에서 김수현이 조정했다. 박병선, 최상남, 정현규, 경상북도 출신의 또 한 사람의 경찰관이 고문을 했다. 9월 8일을 고비로 백남은은 고문지휘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맡고 김수현이 더욱 주동적 임무를 분명하게 맡아 갔다. 9월 8일 밤고문에서, 나중에 가서는 김수현이 직접 고문 장치를 들고 전기고문을 했다.
전기봉고문은 이렇다. 대단히 빠른 진동 때문에 발등에는 심한 통증이 온다. 상처가 깊이 생기고 깊이 파이는 것 같은 느낌조차 온다. 피가 흐르는 기분도 든다. 그래도 이 전기봉고문은 받을 만하다고나 할까, 상쾌하다고나 할까, 아니 양념 고문이었다고 할까. 원체 심한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이날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조차 했다. 더구나 물고문도 이날은 하지 않았다.
또 발뒤꿈치의 상처가 깊어지지 않도록 반창고를 붙여 주고 발 밑에 수건을 접어 넣어주기도 했다.
고문자들은 9일부터 식사를 제대로 주었던 것 같다. 그 전에는 밥을 언제 주었는지, 준 적이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다.
10일 저녁식사는 주지 않았다. 9일 아침부터 쭉 주던 것을 안 주니 이상할 수밖에 없다. 고문을 가할 경우에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그날 알게 되었다. 가혹한 고문을 가하기 때문에 (속을 뒤집는 것은 전기고문이 아니라 물고문인데)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문시에는 거의 틀림없이 속이 뒤집혀 토할 것이고, 토하는 경우 고문자들을 난처하게 만들 것이며 고문의 진행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밥을 주지 않는 것이다. 혹시 토할 때 기도가 막힌다든지, 그로 인한 불상사를 생각해서 안 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밥을 안 주면 고문이 임박한 것임이 아주 분명했다. 그동안 여러차례 반복된 고문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9월 13일 이후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데, 밥을 안주는 것과 고문을 가하는 것을 연관시켜 매우 잘 사용했다. 즉 고문자들이 뭔가 불만이 있으면 밥을 안 주고, 그러면 그는 고문이 박두했음을,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파랗게 질리곤 했다. 이때 고문자들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그는 덜덜 떨면서 시키는 대로 했다. 고문, 그것은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정리된 것 같았다.
지금까지 강제해 온 것의 암기 확인, 복습, 다음에는 그가 60년대 중, 후반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어느 정도로 관여해 왔는지에 대한 확인 그리고 군대 제대하고부터 복학하였을 때의 동료 친구관계를 집중해서 캐물었다.
9월 10일의 고문은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고, 끝난 뒤에는 김수현으로부터 위로도 받았습니다. 고통이 심하고 고생이 되는 줄 잘 안다면서 부하 고문자들이 고문대에서 내려오도록 채근했다. 눈물이 핑 돌고 콧등이 시큰해졌다. 조금만 더 역성을 들어 주었으면 그 김수현의 가슴에 기대어 엉엉 울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버렸을 것이다. 분노하고 저주해야 할 그 고문자들을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첫날 혹은 둘째 날에는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이 박탈되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의 열쇠를 갖고 있던 그 고문자들에게 모든 힘을 다하여 아양을 떨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 고문자들의 현장 지휘자인 김수현에게 10일 동안의 위로를 받은 것, 그것은 당시 그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따뜻한 라면을 대접받고 밤 12시가 못 되어 잠도 재워주고, 이제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9월 13일 밤 10시, 김수현, 백남운, 고문 기술자 김영두 등이 왈칵 몰려 들어왔다. 차가운 분노를 내뱉으면서 김수현은 그를 고문대에 올려 묶으라고 지시했다. 11, 12, 13일 오후까지는 순풍의 돛단배처럼 평화를 향하여 순조롭게 나아갔다.
협박과 공갈은 끊임없이 들었지만 몸서리쳐지는 고문이 사라져가던 나날들이었다. 13일 저녁식사가 15호실 방문턱을 넘어 그의 앞의 책상 위에 놓여졌다. 숟가락을 들고 두 번인가 먹었다. 그때 복도에 있는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자 정현규가 받고 오더니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면서 밥그릇을 들고 나가버렸다.
이 암담함이라니, 이것은 고문을 가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그야말로 혼비백산하여 혼란에 빠졌다. 오그라든 채로 몇 시간이 지났다. 저녁식사 시간이 5시 반경이었으리라고 가늠되는데, 밤 9시가 넘도록 고문할 기척은 없었다.
아, 이것은 저들의 심리전술이었고, 그들의 말대로, 그가 해이하게 되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일 뿐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0시에 고문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김수현은 그를 고문대 위에 묶어놓고는 말했다.
“오늘이 금요일이고 13일이다. 무슨 날인지 알겠느냐? 악마의 날이다. 서양에서는 오늘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한다. 너에게도 최후의 만찬의 날이다. 각오하라!”
고문 기술자는 8일 이후 그의 사건에 이렇게 깊이 개입해 오지는 않았는데 13일, 이 날은 팔을 걷고 나섰다.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다. 새벽 2시 반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계속하여 가했다. 마음은 물론 몸도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게 됐다. 고문 기술자는 기승을 부리며 고문을 하고 김수현은 퍼렇게 핏대를 세우고 끊임없이 모욕했다.
고문 기술자가 피로하여 주춤하니 김수현이 직접 나서서 장치를 들고 고문을 꽤 오랫동안 했다. 이렇게 김수현이 전기고문을 하는 동안 고문대 옆의 욕조에서, 고문대 위에서 샤워를 하고 몸을 닦는 기척이 들렸다.
“당신 머리가 컴퓨터일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중지에 못 당한다. 여러 사람이 의논해서 대처하는 데는 못 이겨. 당신이 왜 이렇게 고초를 당하고 미움을 받는지 알아? 묻는 말에만 대답하기 때문이야. 그것도 아주 부분적으로 그러니 고문 당할 수밖에 없어.”
그러자 김수현은 “당신은 무슨 당신이야! 개새끼지, 나쁜 개새끼야”라고 잔인한 고문을 쉴 새 없이 가했다. 그의 기력이 워낙 탈진해서인지 한번에 오래 고문을 가하지 않고 자주 쉬면서 했다. 워낙 꽁꽁 묶여 있어서인지, 고문을 안해도 고문대에 눕혀 그 자체가 고통이었고, 팔다리가 금방 저리고 시큰거렸다. 그가 손발에 피가 통하지 않아 “저려서 못 견디겠으니, 풀어 달라”는 뜻의 말을 하자, 고문 기술자는 “그래, 걱정 말아!”하면서 전기고문을 왕창 세게 하기도 했다.
남영동 고문에서 그는 한 번도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13일, 이날은 이미 기력이 다해선지 전기고문, 물고문을 가해도 발버둥 치지 못했다. 그때마다 고문은 중지되고 찬물을 머리에 붓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쳐댔다. 점차 아슴푸레해지는 의식 속에서 이제 자신이 정신을 잃겠구나라는 순간이 되면 고문은 중지되었다. 고문 기술자들은 아는 일이었다.
13일 동안의 고문 이후, 남영동에서는 물론 구치소에서 생활해 나가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몸이 나빠졌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밥을 먹고 소화해 낼 수 없었으며, 보행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두통이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다다른 것은 물론이다. 어떤 한계점, 분수령이었다. 일단 13일 동안의 고문은 이틑날 새벽 2시 반에 끝났다. 그러자 김수현은 남아서 박명선과 또 한 사람을 데리고 14일 새벽 3시경부터 3시반 경까지 고문을 해댔다.
김수현은 약간은 면구스러웠던지 이렇게 말했다.
“너한테는 하나도 손해가 아니고, 그냥 그런 단체가 있었다는 것을 듣고 알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9월 13일에 가장 중요하게 강제해 온 주제는 민청련의 재정이었다. 남은 시간에 다시 배후의 문제가 등장하였고, 마무리 즈음에서는 9월 4일 이래의 총복습이 이루어졌다.
밤 10시에 김수현과 백남은은 (민청련 조직의) 재정문제에 대해 크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우리 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제 ○○○에 관해서는 모두 다 밝혀졌고 얘기도 잘 하고 있다. 재정문제도 그렇다고 보고했고 회의석상에서도 그렇게 말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냐, 상부로부터 호통을 당하고 개망신을 당했다. 각오하라!”
회원들의 월 회비 160~180만원과 지도위원 40여 명의 월 2만원 이상씩의 60~80만원이 민청련 재정의 골격이며, 이는 이미 얘기한 것이라 이외의 것이 필요했다. 종교계 인사, 재야 인사, 언론계, 법조계 인사 등 모두를 포함시켰다. 범위를 아주 넓혀 버리면서도 돈의 액수는 되도록 작게 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몇 명에게는 부담을 지웠다. 고문자들은 좋아하면서 “여기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어. 진작 얘기했으면 고문도 받지 않았을 텐데”라고 했다.
13일, 이날은 김수현의 말대로 그에게 최후의 만찬이었다. 그 고문의 강도는 8일의 경우보다 못하지 않았나 싶지만, 이 13일 이후 그는 결정적으로 균형 상태를 잃어버렸다. 이튿날인 14일부터 남영동을 떠나는 26일 점심때까지 그는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국물과 두어 숟가락 정도의 밥을 그것도 오래오래 씹어서 겨우 먹을 수 있었다. 요기는 주로 햄버거빵을 우유에 녹여서 채웠고, 즉석라면에 물을 부어서 그 국물과 약간의 라면발로 허기를 메웠다. 김수현은 이러한 그를 보고 “단식투쟁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참 어이가 없었다. 그가 자신들을 그런 의사가 약간이라도 통할 수 있는 사람들로 생각하리라고 믿었던 것일까. 목은 붓고 쉬어서 말을 제대로 못하고, 머리는 깨져 나갈 것 같고,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기 직전 같았다. 말하면 쓰고, 베끼고, 손도장 찍고, 또 찍고 하면서 26일까지 갔다.

14일부터 19일까지는 평균 4시간 정도 재워 주었다. 그 이후는 거의 잠을 못 잤다. 4일부터 9일까지처럼 앉아서 약간씩 졸았던 것이 전부였다. 식사를 주지 않아 고문이 박두했음을 경고하는 심리적 조문, 조건반사에 기초한 압박은 끊이지 않았다.
저녁식사 시간인 5시 반부터 대략 10시까지는 초죽음이 된 상태로 지내게 되고, 밤 10시가 지나면 이 고문자들은 그를 위로하면서 라면을 끓여주었다. 고문 없이 하루가 지난 것을 고마워하면서, 주는 라면에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그는 남영동에서 살았다. 미묘한 감정의 혼란 상태로 들어가게 됐던 것이다.
당시 김수현은 정말 표독하게 굴었다. 고문도 잔인하게 할 뿐 아니라 직접 자신이 도구를 들고 고문을 했고, 끊임없는 모욕과 학대를 가했다. 가톨릭 신자이며 최기식 신부를 조사했다는 이 사람은 초기에는 소극적이었으며 무척 난감해 했다. 그러다가 8일 이후, 특히 13일 이후부터 그를 악마같이 학대했다.
김수현이 말했다.
“나는 안보와 관련된 사건을 주로 맡아오고 있어서 고문은 불가피한 것이다. 이런 사건들에서는 고문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필수적이다. 고문을 가한 것 때문에 자신에게 상처로 남은 것은 없다. 오히려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해 찜찜한 것으로 남은 사건들이 자꾸 떠오른다. 고문을 가하는 것은 상대에게 일찌감치 체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백의 결단을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국가변란과 폭력적 행위를 한 것은 정치 군부지만 생활을 위해서 자신들은 결국 그 힘에 굴복한 것이다. 그러나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다. 광주사태를 민중항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잘 모르겠다. 그것이 아닌 근거도, 또 그렇다고 할 논리도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
9월 4일부터 8일까지 백남은은 지독하게 고문을 가하도록 지시를 내렸는데 그 역할이 김수현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김수현은 자신의 역할을 악독하게 전환시켜 나갔다. 나중에는 김수현이 무서울 뿐만 아니라 징그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비위가 역해지는 그런 사람으로 느껴졌다. 고문을 자주 가하면서 그를 고문대 위에 올려 묶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고문 받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9월 20일 저녁 8시경에서 10시 반경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다. 김수현, 김영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과 또 한 사람이 고문에 가담했다. 직접 전기고문 도구를 든 것은 김수현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아, 내가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그동안 고문대 위에서의 죽음은 죽은 것이 아니었구나. 내 나이 마흔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구나.’
고문대 위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으니 그냥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멍하니 내버려 두었다. 바깥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그는 정치적 사정이, 정치 군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그의 생명 말살을 절대로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남영동은 20일에 N.D.R을 민청련 지도이념으로, 반국가단체 결성으로 완결지었던 것이다. 20일 이후는 이에 대한 서류정리, 진술서, 진술조서 작성 때문에 26일 새벽 3시 20분 용산경찰서 유치장에 이르러 눈을 붙일 때까지 고문 받은 20일은 물론 거의 25일까지 내내 한잠도 못 잤다.
하지만 25일 새벽 5시 30분에 그는 지금까지 내용 중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김수현으로부터 10여 차례 한 20분간 집중 폭행을 당했다. 참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끔찍스런 고문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되었다. 팔꿈치로 가슴을 가격 당했는데, 다른 경우 같았으면 크게 항의했을 그런 것이지만, 백 번을 그렇게 해도 그는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김수현은 “이 새끼, 벌써부터 법정 투쟁을 준비하는 거야? 이런 새끼는 가만둘 수 없어” 하면서 당시 본인이 입던 겨울 모직 잠바를 벗긴 다음 에어컨에 기대어 세운 채 가슴을 가격했다.
남영동에서 그가 당하는 고문을 보면서 그 고문을 거들었던 한 두 사람의 그 눈물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떠나라. 정말로 큰일 나겠다”며 그 사람들은 울먹였다.
26일 오후 3시경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기에 앞서 그는 김수현과 백남은을 찾았다. 잠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마주 앉아 얘기를 했다. 별 의미 있는 얘기는 없었으나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다. 그가 악수를 청했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울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당신에게 처참한 고문을 당하고 간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간다. 이러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원통하다. 더구나 너무 끔찍하게 당해서 분노하기조차 두려운 것이 한스럽다. 떠나는 지금도 대놓고 욕 한 마디 할 수 없고, 그런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말이다. 이 저주받을 인간들이, 악마 같은 자들이 내 생사 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군림했으며 그에 아양조차 떨어야 했던 이 끔찍한 지옥이 All Mighty처럼 덮쳐 왔던 것을…….’
그런데 이제 이 남영동을 떠나기 위해 일어서는데 그 자리에서 구두를 신은 김수현은 그만한 키이거나 오히려 작게 보였다. 이처럼 쪼그라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때렸다. 그는 늠름함에서 김수현에지지 않으려고 했다. 김영두 등과도 악수를 했다. 그 고문 기술자도 찾았으나 없다고만 했다.
포니차를 타기 직전에 백남은이 계단으로 나왔다. 그는 이 사람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똑바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떠나는 이 마당에서만은 당당하고자 했다.
기묘하게 열리는 남영동 대문, 열려라 참깨와 같이 느껴지는 대문을 나서서 구치감으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는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온몸에 받았다. ‘아, 이 낯익은 거리에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이구나, 이 햇빛 속으로.’ 이것은 축복이었다. 희생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죽음으로부터의 돌아옴이었다.
작성일:2021-04-27 11:08:06 211.104.150.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