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8월 5일자 대한변협신문 4면 ‘서민 위한 사다리 사법시험 존치 움직임 어디까지 왔나?’에 대한 반론입니다.

지난 1년 동안 미국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최근 우리나라에 돌아와 보니 그동안 여러 흥미로운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법시험 존치논의’도 바로 그 중 한 예에 속한다. 사실 사법시험 존치 주장은 ‘아나운서 비하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가 최근 케이블 TV의 ‘썰전’ 등으로 명예회복(?)을 하고 있는 강용석 전 국회의원이 지난 제18대 국회에서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사법시험 존치 주장은 “개천에서도 용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과 맞물려 그리고 ‘경제민주화’와 ‘복지’ 등을 강조하는 현 정부의 정책적 흐름과도 발맞춰 다시금 상당한 힘을 얻고 있는 듯싶다. 여기에는 우리의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도 한 몫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와중에서 2013년 8월 5일자 대한변협신문은 “서민 위한 사다리 ‘사법시험 존치’ 움직임 어디까지 왔나?”라는 기사(이하 ‘기사’로 약칭함)로써 이 문제에 대한 대한변협의 태도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그리 길지 않은 이 기사를 관심을 갖고 열심히 읽어보았다. 몇 가지 점에서는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주장들도 눈에 띄었다. 그동안 대한변협신문은 ‘사법시험 존치’에 대한 찬반주장을 다수 실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므로, 그동안 제시된 주장들을 지금 여기서 되풀이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몇 가지 점에서는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일정한 정책적 문제에 대한 논의가 합리적으로 진행되려면, 논의 자체가 정확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한다. 정확하지 않은 사실에 입각하고 있거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사실을 일면적으로만 소개하여 논의를 전개하면 합리적이고 타당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기사는 ‘외국의 법조인 양성 제도’를 소개하면서 독일이 법률서비스의 질적 제고를 위해 교육이 아닌 시험을 통해 법조인을 양성하고 있는 것처럼 소개한다. 그러나 독일은 철저하게 교육을 통해 법조인을 양성하는 대표적인 나라에 해당한다. 우리의 사법시험과 유사한 국가시험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국가시험은 오직 법과대학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학생들만이 칠 수 있다. 그것도 우리처럼 여러 번 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두 번 밖에 칠 수 없다. 또한 지난 2003년 ‘법조인양성개혁법’이 제정되어 시행됨으로써 제1차 국가시험 성적에 법과대학 성적을 반영하고 있다. 요컨대, 독일에서는 법과대학 졸업자가 아니면 법조인이 될 수 없고, 제1차 국가시험은 법과대학의 졸업시험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법과대학 졸업자가 아니라도 응시할 수 있도록 한, 달리 말해 법과대학 교육과는 무관한 우리의 사법시험 제도와는 분명 다른 제도이다. 기사는 이 점을 정확하게 소개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에서 일본과 미국의 법조인 양성 제도 역시 정확하게 보여주었어야 한다. 가령 일본은 예비시험을 인정함으로써 로스쿨 제도가 파행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을, 미국은 로스쿨의 정원도, 변호사시험의 합격률도 우리처럼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는다는 점을 소개했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 미국, 독일, 일본과 같은 법률선진국들이 우리의 사법시험 제도와 유사하게 법조인을 양성하고 있다는 식으로 소개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다.

기사 하단에 소개한 양재규 대한변협 부협회장의 주장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현재 법학전문대학원이 처한 정확한 사실보다는 막연한 인상에 입각해서 주장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로스쿨제도는 고액의 등록금을 부담할 수 있는 고소득층과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자라는 고학벌자를 위한 제도’라고 하는데, 물론 법학전문대학원은 고액의 등록금을 도입하고는 있지만 이와 동시에 탄탄한 장학제도를 확충하고 있다는 점 역시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또한 왜 법학전문대학원이 고액의 등록금을 도입한 것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교육부가 마련한 인가지침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인적·물적 자원을 투자해야 했고,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등록금이 인상되었다는 점 역시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법학전문대학원은 막대한 재정적 부담으로 고생을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외에도 법학전문대학원은 ‘특별전형’ 방식으로써 저소득층이 법률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이른바 ‘서민을 위한 사다리’가 사법시험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분명히 소개해 주었어야 한다.

나아가 법학전문대학원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서열화’나 ‘양극화’ 또는 ‘특성화과목 등의 폐강속출’ 등은 법학전문대학원의 제도적 문제가 아니라, 현행 변호사시험 제도의 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법학전문대학원의 총 정원을 못박아 놓고, 이것도 모자라 변호사시험 합격자 수를 일률적으로 정해놓음으로써 법학전문대학원이 원래 취지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변호사시험의 운용방식에 있는 것이지, 법학전문대학원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법학전문대학원의 실패를 운운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잘못 파악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기사는 “양질의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피땀어린 노력으로 전문지식을 습득하도록 해야”한다고 말하는데, 이렇게 강조하는 치열한 경쟁은 법학전문대학원 교육과정에서 그리고 변호사시험에서 이미 잘 발견할 수 있다. 현재 우리 법학전문대학원에서는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엄격한 상대평가를 통해 학사운영을 하고 있고, 변호사시험 역시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만 합격할 수 있는 구조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치열한 경쟁이 사법시험에만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필자는 현재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노정하고 있는 문제는 현행 변호사시험 제도를 개선함으로써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사법시험 제도가 전공에 관계없이 우수한 학생들을 고시생으로 전락시키고, 또 많은 고시낭인을 양산해 왔다는 것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닐까.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있고, 바로 그 때문에 ‘사법시험 존치’ 문제에 관해 여전히 견해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여기서 필자가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이 문제를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해결하려면 이 문제에 대한 합리적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고, 또 그러려면 사법시험과 법학전문대학원 제도에 대한 정확한 사실파악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지 않고 막연한 인상론에 기대어 법학전문대학원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합리적인 대화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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