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검찰의 정치적 ‘중립’ 또는 법관의 ‘중립’이란 말이 인구에 자주 회자된다.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재판해야 한다. 여기서 ‘중립’에 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법률가들은 학창 시절부터 판사, 검사, 변호사(원고 측 또는 피고 측)의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또 서로 다른 입장에서 역지사지하는 연습을 한다. 재판에서 어느 한쪽으로 편향될 위험이 있으면 기피사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중립’에 서려면 먼저 양측의 입장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면 원고 측의 관심사와 이해관계, 피고 측이 원하는 바와 이익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중립’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양측의 이익과 관심이 모두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사건 이면에 다른 이해관계가 있을 수도 있고, 당사자가 승소뿐만 아니라 소송의 신속한 종료를 선호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체면을 지키는 것을 오히려 더 앞세우기도 한다. 나아가 자신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이익이 법에 의해 인정받기를 염원할 수도 있고, 무조건 최종심까지 가서 ‘해볼 때까지 다 해봤다’는 감정적 만족감 또는 위안을 얻으려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치열하고 긴 소송 뒤에 ‘유감이라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소송까지는…’이라고 애석해하는 당사자도 없지 않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적 뿌리까지 이해해야 우리는 비로소 그 당사자의 ‘관심사와 이해관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양측의 입장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중립’적이라고 내린 판결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한쪽에 편향되기 쉽다. 중립의 전제, 즉 역지사지는 이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1961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하퍼 리는 ‘앵무새 죽이기’에서 인종차별이 엄혹하던 시절 역지사지의 어려움을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비유한다. “타인의 피부를 뒤집어쓰고 돌아다녀 보지 않고서는 결코 그 타인을 그의 입장에서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실무가들에게 이해관계인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아무리 ‘사안과 관련된 범위 내에서만’이라고 하더라도 매우 짧다. 무의식적 사회화의 산물이라는 사회학적 개념 ‘아비투스’도 중립의 발목을 잡는다. 안대로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상도 중립을 표방한다. 하지만 안대만 두른다고 중립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는데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끝까지 평균대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중립에 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중립을 표방하면서 ‘나의 주관을 조금 양보’하는 것에 만족하거나 중립을 ‘가장 또는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봉경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