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갈등은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 즉 1965년 체제를 통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시각으로는 1965년 체제는 분명히 부족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협상을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던 전후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하에서 미국 덕분에 독립하고 침략전쟁을 막아낸 한국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국교 정상화는 잘못 끼운 첫 단추였지만 당시 한국은 처음부터 단추를 바로 끼울 여유도 없었다.

일본의 책임 문제에 대한 작금의 혼란을 보면 우리 사회에는 그런 시대적 특수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오늘의 기준으로 당시의 결정을 비난하고, 오늘의 시각으로 수정하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생각해야 한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외교 관계가 있을 수 있는지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우리의 시각으로만 외교적 사안을 재단한다면 상대방과의 협상이나 외교는 필요 없게 된다.

위안부 합의에 대한 정부의 번복, 강제징용 배상에 대한 대법원 판결, 서울중앙지법의 위안부 판결은 외교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잘못된 판단은 부메랑이 돼 국가적 손실로 돌아오게된다. 물론 정부의 정치적 판단과 사법부의 결정을 국제관계의 시각으로만 비판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 반일감정에 기댄 정략적 결정이라면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은 가볍지 않다.

정치든 법이든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영역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외교와 안보에도 그런 원칙이 있다. 더구나 정치와 법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런 원칙과 가치를 정략적 목적으로 포기한다면 그것은 이미 정치도 법도 아니다. 역사는 어차피 과거에 대한 현재의 해석이자 평가다. 정부와 사법부가 과거를 평가해 정치적·사법적 판단을 내릴 때는 그런 부분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사법자제의 원칙이 필요하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와 1965년 합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잘 합의한 부분은 그대로 인정하고, 잘못된 부분은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으로 경제를 파탄시킨 IMF 사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일본에 대한 식민지 콤플렉스를 버려도 아무 문제없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21세기는 한국이 근대화에 실패했던 19세기 말과 상황이 다르다. 디지털과 정보통신 시대에 한국은 분명히 일본보다 경쟁력이 있다. 한국의 IT산업과 문화예술 분야의 비교우위는 이미 입증됐다. 해방 후 80년이 돼 가는데 과거에 매몰돼 국수주의적 반일정책에 집착하는 것은 너무 시대착오적이다.

 

 

/이창위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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