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가까이 된 이야기다. 2000년대 초반 대학 캠퍼스에서는 남학생들끼리만 남몰래 가진 공감대가 있었다. 학내 성폭력 사건을 처리하는 데 사용된 ‘사과 대자보’라는 방식에 관한 불만과 두려움이다. 직접 관여한 적이 없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사건 신고가 들어오면 사실관계를 따진 뒤 가해자가 사과 대자보를 쓰고 당분간 학생사회를 떠나 일종의 ‘자숙 기간’을 보내는 것이 대체적인 프로세스였다고 기억한다.

불만과 두려움을 표현하는 여러 형태 중 아직도 기억나는 반응은 대략 세 가지다.

첫 번째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한 조사 과정이 지나치게 편파적이라는 항변이다. 누군가 이를 비판하며 사용한 “무죄 추정이 아닌 유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표현에 여러 사람이 고개를 주억거린 기억이 선명하다.

두 번째는 실명 대자보 등의 조치가 과도한 명예형을 내리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또렷하지는 않지만 “가해자에게도 인권이 있다”라는 정도의 논리였던 것 같다. 남학생들의 불만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주된 원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렴풋한 기억을 되짚어보면, 현재 기준으로 볼 때 형사절차로 넘어가야 마땅했던 사건도 제법 있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성범죄에 대한 낮은 인식, 학생사회 내의 온정주의 등이 아마도 원인이 됐을 것이다. 다만, 그보다는 자치 혹은 공론의 영역에서 성폭력의 문제를 소화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그렇다면 형사절차에서 지켜져야 할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인권을 수군거린 사람들은 공론의 영역에서 문제를 다루는 것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이 됐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2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성폭력이 사회적 논란으로 비화했을 때 ‘무죄 추정’이나 ‘명예’ 등 그때와 비슷한 말들이 흘러 다니는 광경을 본다. 짐짓 2차 가해는 막아야 한다는 당위까지 전제에 두지만, 공익에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법정에서 다툴 대등한 당사자로 만드는 데 집중하는 사이에 성폭력을 가능케 한 권력 구조와 인식의 문제는 공론의 장에서 증발하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을 둘러싼 반응 가운데 삼가야 할 것은 2차 가해만이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은 남학생들의 세 번째 반응은 이런 것이었다. 술자리 등에서 ‘위험한’ 발언이 나왔을 때 “너 그러다 대자보 쓴다”라고 농담하는 것이다. 직장인들의 회식 자리에서 나오는 “그거 3000만 원짜리 발언인데”라는 농담은 그 후신이다. 20년의 세월은 세상을 그리 많이 바꿔놓지 않았다.

 

 

/고동욱 연합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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