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숙 씨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지난달이었다. 2살 때 주차장에서 발견돼 미국으로 입양된 그는 기막힌 우연으로 DNA를 공유한 먼 친척을 만나 친부모의 단서를 발견했다. 유전자검사를 거쳐 생부를 찾아냈고, 자신을 낳아 준 엄마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소송을 냈다는 그의 사연에는 기사를 쓰기에 충분한 요소가 넘쳤다.

선고날이 가까워져서야 이뤄진 강미숙 씨와의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됐다. 충실히 이수한 한국의 정규교육 덕택에 말보다는 글로 하는 영어가 익숙한 내게, 카카오톡 인터뷰라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전전긍긍했다. 하다못해 “왜 엄마를 찾으려고 하느냐”는 간단한 질문을 하면서도 혹시나 나의 짧은 영어 탓에 충분한 뉘앙스를 전달하지 못하고 그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강미숙 씨는 “정말 괜찮다”고 했다. 스스로 엄마가 되니 자신의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며 “나는 괜찮으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는 그의 태도는 어떤 불가해한 경지로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기사에 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나는 기사에 담긴 이야기가 단지 ‘한 편의 감동 스토리’로 남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강미숙 씨는 이후 친부와 접견했지만, 엄마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얻지 못했다. 현실의 강 씨는 여전히 엄마를 찾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강 씨를 돕는 사회단체에서는 이번 소송을 ‘뿌리를 찾을 기본권’의 싸움으로 규정했다. 그 싸움의 반대편에는 한국 사회의 가족제도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은 가장 중요한 구성 단위임에도, 구성원의 생존이나 이익의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 책임’의 영역에서는 역할을 요구받지 않는다. 이런 구조 속에서 수십 년 이어진 가족 공동체의 안온함을 깨고 뜻밖의 ‘책임’이 침입해 들어왔을 때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가족 공동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어떤 댓글들처럼 가족들을 비난만 하고 말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하는 부분이다.

강 씨를 도운 이들은 ‘개인정보보호법의 성역’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주소 등 개인정보를 알려줄 수 없기에, 입양인들이 뿌리를 찾을 길 자체가 막혀 버린다는 것이다. 다만 나는 여전히 개인정보란 최대한 ‘성역’에 가깝게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입양인의 권리와 개인정보의 보호 사이에서 어느 지점에 선을 긋느냐는 앞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고민하고 토론해야 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특정 사건의 ‘취재기’를 이곳에 적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동욱 연합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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