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진술을 하라는 재판장 말에 어느 형사법정의 피고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목까지 올라오는 울음을 꾹 참다가 정말 죄송하다고, 앞으로는 절대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했다. 다른 법정의 피고인은 오히려 평온한 표정이었다. 다소 기계적인 말투로 이번 사건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면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반성이란 무엇일까. 피고인들이 잇따라 반성문을 내고 법원이 감경사유로 반영해주는 것에 관해 시민들은 비판한다. 일리가 없지 않다. 피고인은 이미 일을 저질렀고, 그가 서 있는 곳은 자신의 방이 아니라 국가의 심판을 받는 공개법정이다. 피고인의 미래를 좌우하는 이해관계의 장이기도 하다. 판사가 피고인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진정한 반성인지를 알고 형을 깎아주느냐고 시민들은 지적한다. 판사들에게 물어보면 반성문을 ‘딱’ 보면 안다고 하기도 하고 반성문 외에 법정에서의 태도, 혐의 인정 여부 등 각종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진지한 반성인지를 판단한다고 한다. 그들은 항상 종합적으로 고려한다고 말한다. 형을 정할 때 반성하는 사람과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구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한다.

반성은 상대적이다. 각자의 윤리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조그마한 흠결에 목숨까지 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두가 당신이 잘못됐다고 지목하는데도 끝까지 참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반성하지 않는 사람의 시대인가 싶을 때도 있다. 다들 자기 말만 맞다고 주장한다. 나와 다른 의견을 마주하면 내 의견을 다시 한번 검토해보는 게 아니라 내 의견은 절대 틀리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남의 의견만 공격한다. 자기가 하지 않은 것도 자기가 했다고 홍보해야 대단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요즘 세상에 내 의견의 오류를 인정하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싶다. 자기성찰 없는 곳엔 대화의 진전도 없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법정에서, 속죄도 욕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살면서 법에 죄라고 정해져있는 죄는 저지른 바가 없고 내 윤리의식이 만든 죄라는 죄도 별로 저지른 바는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무엇인가 죄를 저질러 도망을 치는 꿈을 반복적으로 꾼다. 꿈 속의 나는 언제나 두려움에 떤다. 일종의 부채의식의 발현이라는 해석을 해봤다. 긍정적으로는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기자질의 동력으로 작동하면서도 부정적으로는 부정의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속죄를 이용하는 게 아닌가 한다. “봐, 이렇게 반성하고 있어”라면서 더 나아가는 것은 없다. 거짓말은 못하지만 진실은 말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자꾸만 침잠하는 나에게 어떤 이는 “생산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양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혜리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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