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 ‘질주와 멈춤’의 본질을 생각게 한다. 탐욕의 바벨탑을 쌓기에 분주했던 우리에게 “왜 그리 사니?”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인류를 죽음으로 내몰 것이라며 국제 분쟁의 최정점이었던 핵문제조차 ‘코로나’라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바이러스 공포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목숨을 앗아가겠다고 공격하는 적이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그 적이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우리를 공격해 올지 알 수 없는 세상, 그게 바로 코로나바이러스 세상이다. 웃는 모습으로 다가와 사랑으로 포옹하는 이의 따스함이 죽음의 발원이 될 수 있는 공포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완곡하게 표현해서 ‘사회적 거리두기’이지 본질은 사랑의 단절이고, 신뢰의 배척이며, 위선의 까발림이다. “나 살고 너 있다” “홀로세상”의 공표다. 그게 우리가 쌓아온 진실인 척 했던 허구의 본질이다.

코로나, 왕관이라는 의미이다. 현미경 속 바이러스 모습이 마치 왕관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모두가 쓰고 싶어 하는 부와 권력의 상징, 왕관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매함을 일깨우는 코로나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음악 기호 중에 페르마타(Fermata)가 있다. 실제 음표나 쉼표보다 길게 연주하라는 기호이다. 이태리어로 ‘쉼, 늘임, 정지’라는 의미를 가진 페르마타는 음표나 쉼표 위에 표시되어 실제 길이보다 길게 연주하라는 명령어로 사용되는데, 세로줄 위에 붙으면 곡의 진행을 일시 정지시켰다가 긴 호흡 후 다시 진행하는 기호로 사용되기도 한다. 같은 기호가 길게 늘임과 일시 정지라는 두 의미로, 어찌 보면 연주자에게 무한 자유가 주어지는 영역이기도 한다.

그런데 코로나에도 페르마타라는 음악적 의미가 있다. 문학으로 치면 일종의 반전(反轉)의 의미를 갖는다고나 할까? 이는 악곡 끝부분에서 연주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카덴차를 의미하기도 한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호흡으로 협연을 이어가던 독주자에게 즉흥 연주 또는 화려한 기교를 마음껏 뽐낼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여 음악적 판타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연주기법이 카덴차, 코로나이다.

코로나19는 의학적 해결이라는 단순한 감염병을 뛰어넘어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뿐만 아니라 교육, 여가, 가정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 전체를 재정립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 전환점에서 우리 법률가들은 무슨 역할을 수행해야 할까? 여전히 법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치고받고 싸우며 비역사성에 매몰되어 살지는 않을까 심히 두렵다.

 
 
 
/오시영 변호사

전 숭실대학교 법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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