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협신문은 합리적인 논쟁과 토론을 환영하고, 지향합니다. 본보 제505호 15면에 게재된 양삼승 변호사님의 글(영장담당판사의 공개편지와 이를 두둔하는 글)에 대하여 검찰 출신 중견 교수님과 검찰 출신 원로 변호사님이 반박의 글을 기고하여 주셨습니다. 편집위원회에서는 두 반박의 성격이 달라 모두 게재하기로 하였습니다. 당연히 위 글에 대한 재반박 또는 다른 관점의 글을 기고하여 주시면 게재해 드리겠습니다. 또한 이들 원고는 변협신문의 편집방향과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주】

대한변협신문에 게재된 양 변호사님의 글(우리나라가 아직 사법 선진국이 아니라는 결정적 징표)을 읽고 느낀 바는 우선, 용어나 표현 형식이 논란의 여지가 많은 글이라는 점입니다.

글의 내용이 옳은지 여부는 차치하고 용어가 너무 자극적이고 문체가 고압적이어서 ‘호소력을 높이려는 차원’이라기보다 반발심을 유도하여 논쟁을 벌여보자는 의도 같아 보입니다.

인격적으로 미숙한 특정 검사 한 사람의 일탈된 행동을 일반화하여 ‘후진적인 법조 문화의 고질적인 병폐’라 치부하는가 하면 ‘정치 권력과 유착된 검찰, 법치를 망치는 검찰, 국격을 떨어뜨리는 것’에까지 비약한 것은 어안이 벙벙할 따름입니다.

검찰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이나 편견이 없는 한 그와 같은 논리의 비약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겠지만, 검사는 결코 판사와 같지 않다’는 표현은 판사 출신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봅니다.

검·판사의 업무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데 굳이 ‘결코 같지 않다’라고 한 것은 어떤 저의가 있어 보입니다. 더구나 위 말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검사는 결코 판사와 같지 않고 같아서도 아니 된다’라고 해야 온전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근대 사법이 소추권과 재판권을 분리한 역사적 배경에서 볼 수 있듯이 검·판사는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양삼승 필자는 검사들의 머릿속까지 간파하고 있는 듯 ‘검사의 머릿속에는 자기나 나나… 나중에 두고 보자 등은 극복해야 할 망상들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가히 막말 수준이라 눈을 의심하게 합니다.

‘판사는 판단하는 사람’ ‘검사는 판단 받는 사람’이라는 계층적 용어를 사용하면서 양자를 ‘축구심판과 선수’에 비유한 것은 동의할 수 없는 판사 우월적 발상입니다. 축구시합과는 달리 검사와 판사는 합력(合力) 하여 형사사법의 정의를 실현하는 순치(脣齒) 적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축구 얘기가 나왔으니 부연합니다만, 축구에서도 심판의 오심이나 부당한 진행에 대하여 선수가 현장에서 어필하지 않습니까. 검사도 정식 불복절차에 앞서 판사에게 질문 형식으로 항의할 사안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위 사례가 마치 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엄청난 불법행위인 양 매도하면서, 전화 한 검사가 보이스피싱 범죄자나 되는 듯이 판사실 전화기에 첨단 녹음장치를 설치하자는 등의 제안을 하셨으니….

재조 시절, ‘장차 대법관이 될 재목’이라고 평가되시던 분이 무슨 곡절로 이토록 편협한 위인이 되셨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동안 주요 일간지 등에 검찰을 폄훼하는 글을 수차 게재하신 것을 보고 도무지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판사는 판단하는 사람’ ‘검사는 판단 받는 사람’ 이란 용어는 실정법 어디에도 없는 말입니다. 우리 국민 가운데 검사를 ‘판단 받는 사람’ 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결코 짧지 않은 법조 생활을 한 저로서도 부모, 스승 외에 저를 판단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또 필자께서는 우리 법률이 최종 판단자를 판사로 규정하였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논지이나 ‘진정한 최종 판단자는 국민’ 이라고 봄이 헌법 제1조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재야 법조는 생존자체가 관심사항이지 ‘판단하는 사람’ ‘판단 받는 사람 등’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점을 헤아려야 할 것 입니다.

다음으로, 칼럼의 내용에 대하여 두 가지만 언급할까 합니다.

1. 필자께서는 검사가 영장을 기각한 판사에게 항의 전화를 한 행위를 사법 선진국이 되지 못하는 병폐라고 지적하면서 그와 같은 행위를 공개한 판사는 용기 만점인 것으로 극찬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습니다.

그 검사가 판사에게 전화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저 역시 두 사람 사이의 전화 내용을 들은 바 없고 물어본 적도 없어 검사가 왜 전화를 했는지 알지는 못 합니다. 다만, 일반론으로 법원의 과도한 불구속 재판이 법치를 흔들고 있다는 측면을 상기하게 됩니다. 언제부터인가 당연히 구치소에 있어야 할 피의자가 버젓이 대로를 활보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피의자의 인권’ ‘공판 중심주의’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피해자의 인권은 저만치 물러서 있게 됩니다. 이런 사례가 잦을 때 혈기 있는 검사들은 가끔 자제력을 잃는 수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2. 또 필자께서는 최근 반세기의 우리 법조는 ‘너무나 강력한 검찰과 위축된 사법부’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저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수의 정치 검사가 개인적으로 출세한 경우는 있었으나 검찰 조직은 부단히 권력에 저항해 왔고 그 결과 검찰권이 점진적으로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최근까지 대검찰청 중앙 수사부는 권력의 핵심, 현직 대통령의 아들, 부도덕한 재벌들을 응징해 왔으나 작년에 권력과 재벌에 의하여 해체됐습니다. 또 검사장 자리가 줄어들었으며 청주, 전주 등 지방검찰청의 특수부와 전국 검찰의 조사부가 폐지된 것 등은 검찰권의 약화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에 반하여 법원은 폐지된 부서가 없고 오히려 부·과가 확대 개편되었으며 업무영역에서도 과거에는 민사 위주였으나 근자에는 형사, 행정까지 영향력이 확대되었습니다. 즉, 구속영장 기각 확대로 형사사건에 대한 법원의 역할 증대, 행정기관의 권한 남용을 견제한다는 측면에서 행정처분 효력정지 인용률 제고 등으로 사법권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추세에 있습니다.

끝으로, 그동안 위 글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를 받은 분들께서는 곧 회복되시기를 바라며 아울러 앞으로는 재조 내부의 문제를 재야로 끌고 와서 불편한 관계를 야기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지금 우리 재야 법조가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너무나 어려워 그와 같은 이슈는 짜증만 가중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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