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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선> 그날 밤의 비밀 (下)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0-08-03 10:34:47
조회수
1071
* * *

발터PPK 권총
나는 개인적 기억에서 비롯된 그날 밤 일어났던 일을 사회적 집단 기억의 차원에서 일깨우려고 한다. 우리는 그 시대의 침묵에 담긴 목소리와 절규, 외침, 소음을 들어야 한다. 그 혁명적 사건이 흘러간 옛날의 에피소드 또는 가십거리로 전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재규 (그 당시 53세)는 박정희보다 나이가 아홉 살 아래였다. 고향이 경상북도 선산으로 같고 키도 같고 육사는 동기(2기)이고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경력도 같았다. 1954년 9월경 김재규 대령이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때 박정희 소장이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재회를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상하 관계이기는 하지만 친형제처럼 지내게 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8년간 통치한 이른바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우리 현대사에서 아주 민감한 부분이다. 지금은 문재인 정권하에서 박정희 시대의 독재 정치나 유신체제를 옹호하거나 찬양하는 사람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박정희의 큰딸이다. 그녀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가. 전적으로 박정희의 후광 때문이었다. 그녀가 재임 시절 정치를 잘 했더라면 박정희의 죄과는 어느 정도 묻히면서 그의 공적은 더욱 빛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의 역적이 되어 차가운 감옥에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박정희 시대의 전반적 평가에 관해서는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 너무나 뚜렷한 시각차를 보인다.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박정희의 가장 큰 업적인 경제정책에 관해서도 이는 장기집권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폄하한다. [유종일 엮음,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라는 부제가 붙은)「박정희의 맨 얼굴」참조]
김재규에 대한 평가 또한 엇갈린다. 10·26 사태로 유신독재체제가 종식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민주화에 기여한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김재규의 행위는 한낱 권력투쟁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맞서는 것이다. 민주화 관련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에는 살인자이자 패륜아이며 대역죄인, 은혜를 원수로 갚은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강신옥 변호사나 함세웅 신부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과 비견할 만한 거사라고 주장한다. 박정희 제거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누군가 반드시 결행해야 할 일이었고, 김재규는 사심 없이 그 일을 스스로 떠맡은 것이라는 점에서 안중근 의사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이름으로 하얼빈 역 1번 플랫폼에서 일본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오전 9시 45분경 안 의사가 손에 쥐고 있던 브라우닝 M1900 권총에서 발사됐던 총소리였다. 그 권총은 7연발형이었고 그중 3발이 이토에게 향했다. 안 의사는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1910년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그해 3월 26일 집행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집행 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르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매장지를 알리지 않았다. 단서는 없다. 왼손 약지 첫 마디를 끊어 국권 회복을 맹세했던 31세의 청년은 아직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 일본에서 개국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토의 장례는 근대 일본 최초의 국장으로 치러졌고 일본 내에 기념 공원과 신사가 세워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5분경 김재규 장군은 박정희를 확인 사살했다. 나는 김재규 장군을 언제든지 장군으로 부르고 싶다. 그는 명예와 자존심을 중시하는 참다운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대통령을 죽인 죄인이지만 유신의 공포 정치를 타파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사람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진정한 혁명가였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김재규 장군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안동일 지음,「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420~426쪽 참조)]

그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년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외환은행에 다니는 초급 은행원이었다. (나는 처음 TV에서 그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고 나중에 동아일보의 호외와 속보, 특집을 통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의 놀라움을 잊을 수가 없다. 계속 내 귀와 눈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 옛날 옛적 궁중 모반 사건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환상적인 사건의 전모, 무언가 감추고 있는 이면, 음모,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권력층 내부의 암투 등등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날 밤 우리 역사에서 혹은 현대사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극적이긴 하지만 비극적인 사건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논자에 따라 역사적 평가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단 한 자루의 권총으로 혁명을 성취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혁명적 사건 또는 혁명 그 자체였다.
나는 지금 논픽션 소설을 쓰면서 그날 밤 최후의 만찬장 모습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정확하게 재현하고자 시도한다.
물론 문학 (여기서 문학은 소설을 말한다)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날 밤 최후의 만찬장이라는 무대에서 연출된 그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면서 그 자초지종이 수사 과정이나 재판 과정에서의 김재규, 김계원의 진술, 그 밖에 가담자들의 진술, 두 젊은 여인들의 진술, 현장검증 등에 의해서 아주 정확하게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의존했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으니, 벌써 40여 년이 흘렀으니 우리 모두 역사의 방관자가 되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어찌하여 우리는 지금 그 영구불변의 날인 10·26 혁명을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순전히 개인적으로 인간의 정서라는 관점에서 그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박정희와 김재규를 냉정하게 평가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인간적으로 실패한 초라한 패배자에 불과하다.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를 위한,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의 체제였다. 그 체제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핵심 기관인 중정의 부장 (평소 친동생처럼 여겼던) 김재규는 분노에 차서 직접 총을 쏘았다. 확인 사살을 위해서 두 번째로 총을 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심복 중의 심복으로) 정권의 제2인자였던 과대망상증 환자 차지철로부터는 철저한 배신을 당하였다. 우리는 그날 밤 차지철의 행동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는 박정희를 등에 업고 온갖 권모술수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경호실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 혼자 살기 바빠서 총에 맞은 대통령을 내팽개치고 화장실로 도망가 숨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그 순간 지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까무라쳐가는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는 혼란과 고통, 온갖 후회와 망상 속에서 생각한다. 이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는 거야. 경호실장이란 놈 보라고. 제가 먼저 살겠다고 나를 버려두고 화장실로 도망갔지 않은가. 저 자식을! 경호실장이 총도 휴대하지 않고! 도망가는 꼴이라니! 버러지보다 못하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던 거야. 뒤늦은 후회는 소용없어. 이미 늦었거든.
재규야! 내 사랑하는 아우야! 넌 나를 두려워하고! 그러나 날 너무 사랑했어! 넌 나의 절망과 고독, 불안을 알고 있었던거지. 그러니까 날 쏠 수 있었던 거야! 날 구원해주기 위해서. 철저하게 타락했던 인간을 구원해주려고. 혁명 법정에서 나의 치부가 낱낱이 공개되었다면 나의 명예는 어떻게 되었을까. 너 말고 누가 감히 나에게! 하지만 이건 역설이라고.
그러나 확인 사살이 필요할거야. 내가 만약 살아난다면 무서운 복수를 할거니까. 나는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절대로 그냥 물러나지 않을 거야. 긴급조치가 아니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두 잡아 들일 거야. 그러므로 나는 살아나면 안되겠지.
운명이었어. 운명이 우리를 만나게 했고, 운명이 우리를 이렇게 한 거지. 어쩌면 너와 나 사이를 운명이라든가 숙명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거야. 이미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신비한 차원인 거지.
재규가 ‘나는 쏠 수 없어요. 각하께서 직접 쏘시오’ 하며 권총을 건냈더라면 나는 내 가슴을 직접 쏠 수 있었을까.
나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말하진 않겠다. 내가 널 피로 만들어낸 자식보다 더 아꼈거늘. 그런거야…… 그래서 총을 들었겠지. 널 지킬 건…… 믿을 수 있는 건…… 총밖에 없는 거지.
나는 저희들끼리 원한에 사무쳐 싸우는 줄 알았다. 둘 사이가 좋을리 없으니까. 그걸 왜 모르겠어. 내가 바보가 아닌데. 그러나 재규의 핏발이 선 눈빛에서 날 정조준 했음을 알았다. 너는 살기등등했다. 내가 바로 목표물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그 상황에서 나는 수치심을 느꼈고 그 상황 자체에 대해서 분노를 억누를 수 없다. 물론 분노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재규야! 넌 이제 어떻게 할거야. 혁명을 할거야. 넌, 네 머리로는 안돼. 혁명이 그렇게 쉬운게 아니야. 목에 밧줄을 거는 것보다는 스스로 총으로 해결해야 할거야. 총이야! 총이라고!
권력은 광기에 불과해.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권력자를 부패시키는 거야. 권력의 오만함이란. 권력은 거품에 불과한 거지. 언젠가는 반드시 꺼지게 되어 있으니까. 나는 그 공포를 잊으려고…… 나는 모든 사람을 깔보고 증오하고 경멸하였던 거야. 인간 혐오증에 빠진 거지. 그렇지만 인간 혐오자들은 정직해. 그렇기 때문에 인간 혐오자들인 거야.
나는 지금 죽을 때가 아니야. 마무리가 안 되었거든. 장차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없는데…… 그러나 이까짓 거 권력 같은 거 진즉 던져버렸더라면. 이런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내 나이가 지금 몇 살이지? 죽을 때가 된건가? 이제야 생각나는군. 총을 맞은 순간 얼마나 아팠을까! 우리 인간은 반드시 알아야 돼. 인간은 불완전한 거야. 사악하고 나약하고. 그러니 결국 총이 끝장을 내는 거지.
젊은 여자의 몸에서 향수가 나는군. 이름이 뭐였더라. 그녀가 날 지금 안고 있는 거야.
그는 막강한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지만 고독하고 잔인하고 저속했다. 점점 위선과 자기기만에 빠져들면서 그토록 예민했던 감각이 둔해졌지만 권력에 대해서만은 여전히 비상한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아무리 여자들을 바꿔가면서 농락해도 여자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그 순간 삶과 죽음, 인간의 흥망성쇠, 삶의 기쁨과 슬픔, 침묵과 고독,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증오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이 가슴과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김재규의 부하들은 모두 김재규를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존경하였기 때문에 그의 지시에 따라, 그러니까 대통령을 시해하는 그 엄청난 사건에서 그를 배반하지 않고, 밀고자가 되지도 않고 일사불란하게 헌신하며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저 세계에서 틀림없이 다시 만났을 것이고 지금도 친형제들처럼 오순도순 화목하게 잘 지내리라.)
그는 고독한 혁명가였고 과대망상자였으며 모순투성이 인간이었다. 끝없는 갈망, 질투심, 불쾌감, 분노, 악감정, 수치심, 향수, 연민, 야망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복잡한 인간적 감정들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위대한 장군은 불굴의 의지와 용기에 의해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던 유신독재체제를 붕괴시킨 혁명을 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승리한 것이다.
김재규는 발터 콤팩트 권총을 손아귀에 쥐었을 때 손잡이가 짧고 얇아 안정감을 느꼈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차가운 금속성 촉감이 감미로웠다.
깊어가는 가을.
밤의 정적을 깨는 총소리.
일순간의 짧은 정적.
하지만 장군도 한없이 연약한 인간이기에 어찌 그 엄청난 사건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 순간 주저하면서 고뇌하지 않았겠는가. 다시 한번 자신의 결심을 확고하게 다잡았으리라. 여기서 멈추면 혁명의 기회는 멀리 달아나고 만사휴의이니까.
마침내 오늘이야. 얼마나 기다렸던가. 내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걱정되지만 그들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유신체제는 오직 박 대통령을 위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비교해보자. 이 대통령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지만, 박 대통령의 성격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모른다. 유신 이후 7년이 경과 되었다. 영구 집권이 보장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 체제는 20년인지 25년인지 유지될 것이다. 박정희와 자유 민주주의 회복은 어쩔 수 없이 숙명적인 관계다. 자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는 한쪽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민과 정부 사이에 반드시 큰 공방전이 벌어지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고 부상 당할 것이 틀림없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자유 민주주의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더 큰 불행을 막고 또 그 불행으로 끝나면 좋겠는데…….
혁명이란 기존 질서를 뒤엎고 신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무혈혁명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무혈혁명으로는 혁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는 부득이하게 최소한의 희생이 불가피한 것이다.
내 나이는 실제로 55세이다. 그러니 한 10년이나 20년 끊어 바치더라도 상관없는 일 아니겠는가. 자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 한 몸을 던져야 한다.
장군은 인간적 의리와 민족의 운명 사이에서 갈등 하면서 수없이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고뇌를 하였다. 목숨을 걸고 극히 추상적인 민족의 이름으로 하는 혁명. 그에게는 그 어떤 구체적인 형체를 알 수 없는 사적인 복수의 욕망은 없었다.
왜 그리 결단을 내릴 수가 없단 말인가. 죽음을 각오하고 있으면서. 민족 앞에 개인적 의리가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아니야. 어찌 인간적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그건 배은망덕이야. 천륜을 어겼다고 할 것 아닌가. 내가 배신자 소리를 들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는 옹졸하고 비열한 인간이다. 그의 정신은 지금 점점 썩어가고 있다. 그 무식한 돼지 같은 놈이 그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하찮은 이유 때문에 총을 쏠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는 그 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어떻게 살인을 하고 나서 나만 살겠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철회하면 그만이다. 자살은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그건 아주 비겁한 일이 될 것이다. 나의 대의명분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것이 명예를 지키는 일이다. 나는 명예와 자존심을 생명보다 중히 여기는 참다운 군인이다. 유신체제의 핵심 권력자가 유신을 부정하면 이것은 역설이고 자기 모순이 아닌가.
단말마의 비명 소리!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나는 무난하게 내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심의 가책! 스탈린 체제와 유사한 독재 체제! 경찰국가! 민족의 이름으로 거행할 수 있는 복수! 사리 분별을 너무 많이 생각하면 구국의 결심은 약해지고 결국 나는 겁쟁이가 될 것이다.
사나이 대장부가 눈물을 흘려선 안되는 거야. 침착해야지! 감정이 폭발해서는 일을 그르치게 될거라고! 운명에 맡겨야 되는 거지! 망령에 압도당해선 안되는 거야! 그가 작금의 비극적 상황에 대해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국민이 원하는 합리적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그때는 총을 거둬야 할 것이다. 광기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아야 한다. 내가 분노할 용기와 능력이 있는 것인가!?

* * *

인물들

박정희 (대한민국 제 5 · 6 · 7 · 8 · 9대 대통령)
1917년 경북 구미 출생. 일제 침략 시기 대구사범학교 졸업.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군 장교가 되어 항일독립군 토벌에 가담했다. 그는 두 번의 창씨개명을 통해 스스로 일본인임을 선언하고 실천했다. 첫 번째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이고, 두 번째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완전히 일본식 이름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군인 박정희는 재빨리 한국군인으로 변신했다. 그런데 박정희와 그 형 (박상희,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장인) 등은 남로당 당원이었고 1948년 제주 4·3 항쟁 때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은 군대 내 남로당원들의 선동에 따라 제주 출동 명령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남로당 조직이 드러나고 박정희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로당 동료들의 명단을 제공하고 석방되어 군에 복귀하고 6·25 전쟁 직후 장군으로 진급했다. ‘친구를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복음 15:13)라는 성경 말씀이 있는데 말이다.
1961년 5·16 쿠데타를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군정을 실시하면서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다. 1963년 제3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 1967년 재선된 후 1969년 한밤중에 불법 날치기를 통해 3선 개헌을 하였고, 1972년 종신 대통령을 꿈꾸면서 유신독재 헌법 선포 등을 통해 17년간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했다. 1979년 10월 26일 최후의 만찬장에서 김재규가 쏜 총에 비명횡사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1926년 경북 구미 출생. 육군대학 부총장, 3군단장, 제9대 국회의원, 제13대 건설부 장관 등을 역임했고, 1976년 12월부터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근무했다. 1979년 10·26 혁명을 일으켰고 1980년 5월 24일 교수형을 당했다.
[1980년 5월 20일 화창한 늦은 봄날 아침인데 벌써 후텁지근한 공기가 초여름을 방불케 했다. 그날은 10·26 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었다. 재판장 이영섭 대법원장은 오전 10시 8분, 개정 선언을 했다. “사건 번호 80도 306호 김재규 피고인 등 7명에 대한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 증거은닉, 살인 사건에 대해 판결을 선고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이영섭 대법원장, 주심 유태흥 대법원 판사)는 10·26 사건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 원심 형량대로 확정했다.
그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원장을 포함한 14명의 대법원 판사가 참여하였는데 그중 6명의 대법원 판사들이 반대 의견을 냈다. 소수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는 민문기, 양병호, 임향준, 김윤행, 정태원, 서윤홍 등이다. 그들은 그 야만의 시대에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불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그 혁명적 사건은 민간법정에서 3심을 거쳐서 신중하게 재판이 진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사재판에 의해 마치 군사작전처럼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10·26 사건이 발생한 지 29일이 되는 1979년 12월 4일 육군본부 대법정에서 보통군법회의 제1차 공판이 열렸고, 2주일 후인 12월 18일 제9차 공판을 끝으로 결심되어 20일 판결 선고가 있었다. 그리고 1980년 1월 22일 시작된 고등군법회의의 항소심 공판은 1980년 1월 23일, 24일 등 세 차례밖에 열리지 않았고, 1월 28일 물론 항소기각 판결이 선고되었다.
1980년 5월 24일 새벽 3시 남한산성의 육군교도소를 출발한 호송 차량은 4시 서대문 영천의 서울구치소에 도착하여 지하실 독방으로 김재규를 이감했다. 김재규의 수형 번호는 101번이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아침 7시 정각, 김재규는 사형 집행실로 향했다.
장군은 164센티미터 남짓한 작은 체구였으나 너무나 당당했다. 간경화로 얼굴색은 흑인처럼 새카맸다. 수사 과정에서 전기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피부가 벌겠고, 너무 맞아서 오른쪽 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집행관이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여전히 묵주를 손에 들고 굵은 단주를 굴리며 말했다.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갑니다. 나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 김재규의 흑빛 얼굴에 자루를 씌우고 밧줄을 두른 후 교수대의 손잡이를 작동시킨 집행관이 누구였는지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그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그 역시 죽을 때까지 악몽을 꾸면서 그 장면을 어찌 잊을 수가 있었겠는가.
집행 당시에도 두 손은 수갑과 포승에 묶여 있었는데 복숭아씨로 만든 염주를 꼭 쥐고 끝까지 놓지 않았다.
당시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5·18 광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살상 진압하고 있을 때였다. 신군부는 5월 27일 전남도청을 점령함으로써 무수한 희생자를 남긴 채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이 혼란기에 신군부는 김재규를 신속하게 처형하여 그가 정치범으로 감형될 기회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국민들의 법감정에 의한 마지막 심판의 기회를 박탈해버린 것이다.]

10·26을 두고 김재규 자신은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계엄사 군사재판에서 ‘민주회복 혁명’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군사법정은 그를 혁명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란목적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김재규는 “다수의 희생을 막기 위해 국민이 갈구하는 민주회복 혁명을 했다.”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포로가 된 장군의 심정”이라고 군사법정을 비판했다.
10·26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다시 따져보아야 할 중대한 법적 문제는 김재규를 민간법정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세운 것이다. 또 과도하게 신속한 사형집행도 상례를 현저하게 벗어난 것으로 정치범에게 흔히 적용되는 감형이나 사면의 기회를 박탈해버렸다는 점이다. (김재홍 지음,「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56~57쪽 참조)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쏜 10월 26일 당일 서울은 계엄령 상태가 아니었다. 부산, 마산만 계엄령 발동 상태였으며 전국적으로 평시 상태였다. 계엄령이 전국에 발동된 것은 10·26이 일어난 다음날이다. 따라서 평시에 발생한 10·26 사건의 연루자들은 헌법상 민간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를 계엄사 군사법정에 세운 것은 소급 적용으로 위헌이었다. (이는 소수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들의 견해였다.) 10·26 사건 연루자들 중 군사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로 현역 대령인 박흥주 한 사람뿐이었다.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1934년생. 1961년 제1공수특전단 중대장(대위)의 신분으로 5·16 쿠데타에 가담,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차장,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의원 등을 역임했고, 1974년부터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있다가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와 함께 죽었다.
그는 실질적으로 정권의 2인자였으며 김형욱의 살해 공작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그 당시 중정 김재규 부장을 제치고 월권을 해서 일부 중정 요원들을 동원하여 그 공작을 직접 지휘했고 공작에 성공하자 더욱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자기도취적이었고 과시적이었고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이었다. 대통령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나 항상 거친 목소리로 무례하게 말을 했다. 우리에게 남겨진 몇 장의 사진들에서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빗고 입을 굳게 다문 거만한 표정을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다. 그의 거친 성격이나 말투, 몸짓을 박정희는 좋아했다. 그래서 박정희는 그를 애지중지했다. 그리고 몇 초간의 간격으로 함께 죽은 것이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
1923년 경북 영주 출생. 육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 주중 대사 등을 역임했고, 1978년 12월 22일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근무했다.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있을 당시 김계원이 총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처음 만났다.
10·26 가담자로 무기징역 감형, 1982년 5월 형 집행정지로 석방, 1988년 특별사면 복권, 2016년 사망.
김계원은 박정희가 총을 맞고 왼쪽으로 스르르 쓰러지는 것까지 보고 마루로 뛰어나갔다. 김계원은 1심 공판정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는데 각하가 옆으로 피하는 줄 알았다”, “‘각하 앞에서 무슨 짓이야’라고 소리치고 바로 왼쪽에 있던 김재규를 밀었다” 고 진술했다.
그러나 신재순은, “김계원 씨가 김재규를 말리는 행동을 본 일은 없고 일어서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김 실장은 아마 전깃불이 나가 제가 볼 수 없을 때 일어나 마루로 나간 것 같습니다.” 라고 진술했다.
그는 1980년 살인 및 내란 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88년 사면 복권됐다. 2017년 말경 그의 유족들은 ‘김계원 전 실장이 민간임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위법적인 군 수사기관의 수사와 군사법원의 재판을 받고 수사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 행위를 당했다’며 서울고등법원에 재심 청구를 하였다.

전두환 (그 당시 보안사령관)
최후의 만찬장 살인 사건 발생 8일 전인 10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이틀 후에는 다시 마산과 창원지역에까지 위수령을 내렸다. 박 대통령 재임 중 네 번째 계엄령이었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였지만 믿을 수 없는 무수한 사건들이 일어난 아주 긴 다른 하루였다.
그 시각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연희동 집을 나와 용산구 서빙고동에 있는 보안사령부 수사 분실로 며칠째 비상근무 중인 (윽박지르고 몽둥이로 때리고 정강이를 걷어차고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고문을 자행하는) 수사 요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피아트 132형 승용차를 타고 이동 중에 있었다. 앞자리에는 전속부관 손삼수 중위가, 뒷자리에는 전두환 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는 불과 48일 후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휘어잡았다. 자신에게 거저 굴러 들어온 기회를 솔개처럼 날쌔게 잡아챈 것이다.
그런데 서빙고 분실과 중정의 남산 분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은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이 자행하는 악랄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은 3대 분실이었으니 김재규 장군과 가담자들 역시 1979년 겨울 동안 서빙고 분실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김재규는 이미 옛날에 보안사령관을 역임했는데 옛날 부하들에게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그 당시, 1979년 10월 말경 서빙고 분실에서는 남민전 (남조선민족민주전선) 사건의 군부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다른 민간인 관련자들은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서 수사 중이었다. 그때 남민전 사건 관계자들인 이재문, 신향식, 최석진 등 이런 사람들은 무지막지하게 고문을 당했다.
그랬으니 1980년대 대표적 고문 사건인 김근태 전 의원에 대한 수사 당시 수사관들이 남영동 분실에서 김근태를 조사하면서 이재문을 들먹인다. “이재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고문당해서 속이 다 부서져 죽었다. 너도 한번 당해 볼테냐 ……”
실제 이재문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고문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죽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 부장)의 저주
1979년 10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정적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다음 즉시 가택연금 중에 있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고 당 총재직에서도 직무정지 가처분을 받은 상태로 손발이 묶여 있었고, 박정희의 눈엣가시였던 김형욱은 그 얼마 전에 죽었고, 체제에 대한 저항 세력은 긴급조치를 발동해서 감옥에 가두면 되고, 길거리에서 데모나 하는 철딱서니 없는 학생들은 군을 동원해서 뭉개버리거나 그래도 안되면 발포 명령을 내리면 되고, 무엇보다도 든든한 것은 충실한 경호실장이 항상 곁에 붙어있지 않은가. 그리고 정신적 또는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 술과 여자가 대기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철옹성 같은 유신체제는 박정희의 종신 집권을 담보할 것처럼 보였다.
김형욱은 1979년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만 해도 아직 54세의 괄괄한 장년이었다.
그는 중정 요원들에 의해 여자를 미끼로 유인된 다음 1979년 10월 7일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2층 카지노 ‘르 그랑 세르클’에서 점심도 굶은 채 꼬박 8시간을 블랙잭에 매달렸다. 그 후 술에 너무 취해있는 김형욱이 묵고 있던 리츠 호텔에서 파리 15구에 있는 일본 마담 소유의 한 아파트로 옮겨졌고 이 아파트에서 마취된 뒤 다음날 외교행낭 편으로 대한항공기에 실려 서울로 압송됐다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승객이 다 내린 뒤 얼마 지나서 얼굴에 검은 자루가 씌워진 사람이 따로 내렸다.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이 양쪽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기 바로 옆에 대기 중이던 검은 세단에 그 사람을 구겨 넣고 사라졌다. 그런 후 청와대 지하실에서 박정희가 그의 이마를 직접 쏴서 죽였다고 한다. (오작교 작전설)
또 다른 버전은 중정 요원들이 호텔에서 김형욱을 데리고 나와 차에 태웠고 그 다음 인계를 받은 킬러들이 차 안에서 목뼈를 부러뜨렸을 때 이미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고, 파리 교외에 널려있는 많은 양계장들 중에서 알제리계 프랑스 노인이 경비를 서고 있는 양계장으로 가서 닭 사료 기계인 해머밀에 전기를 넣어 돌게 한 다음 머리부터 거꾸로 집어넣어서 갈아버렸다는 것이다.
또 다른 버전은 그가 차에 태워진 후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가운데 자동차에 실은 채로 그대로 폐차장의 대형 압착기에 밀어 넣어 자동차와 함께 뭉개버렸다는 것이다.
설은 분분하지만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진 게 없다. 살해의 과정에 관해서 제각기 증언들이 있고 (물론 간접적인 증언들이다) 타당한 측면도 있기 때문에 어느 설을 선뜻 손들어주기에는 망설여진다.
다만 김형욱이 10월 7일 밤에 죽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박정희는 20일 후인 10월 26일 밤에 죽었다. 그렇다면 지하에 있던 김형욱이 얼마나 억울했으면 저주를 퍼부었고 그 저주가 통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억울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심복 중 심복으로 그의 지시에 따라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 욕은 바가지로 썼고 거기다 비명횡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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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나는 논픽션 소설인 ‘그날 밤의 비밀’을 순전히 참고자료에 의지해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1979년 10월 26일은 음력 9월 6일로 어여쁜 초승달이 청명한 하늘에 황금색 나막신을 깎아놓은 듯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쾌청한 날씨였다. 그 역사적인 날에 어울리게 그날 맹렬하게 비가 내렸다면 어땠을까. 비가 마치 관 뚜껑에 못질하듯이 그렇게 맹렬하게 곧바로 내려 퍼부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하늘은 순수하고 청명했으니.
가장 중요한 자료는, 1차 원천자료라고 할 수 있는 공판조서에 기재된 재판과정, 또 재판기록 메모를 중심으로 정리한 안동일 지음, (170일간의 재판 기록으로 밝힌 10·26의 진실)이라는 부제가 붙은「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김영사, 2017년 6월 12일 발행)와 정치부 기자들이 발로 뛰면서 직접 취재하여 생생하게 쓴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진술 全녹음) 부제가 붙은 김재홍 저,「운명의 술 시바스 (상권)」,「대통령의 밤과 여자 (하권)」(동아일보사 1994년 5월 1일 발행), (동아일보 연재 인기 비화, 정치장교와 폭탄주) 부제가 붙은「군 ➊」, (핵 개발 극비작전) 부제가 붙은 「군 ➋」(동아일보사 1994년 7월 20일 발행), 정병진 저, (한국일보 정치비사 발굴 시리즈, 실록 청와대)라는 부제가 붙은「궁정동 총소리」(한국일보 1992년 12월 1일 발행), 김경재 지음, 김형욱 회고록 5「혁명과 우상」을 주로 참고하였다.
하지만 김재홍 지음「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책으로보는세상 2012년 1월 4일 발행), 조갑제 실록「박정희의 마지막 하루」(월간조선사 2005년 2월 18일 발행), 유종일 엮음「박정희의 맨얼굴」(참언론 시사IN북 2011년 10월 19일 발행), 문영심 지음 김재규 평전「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참언론 시사IN북 2013년 10월 25일 발행), 김충식 지음「남산의 부장들」, 허문명 지음「김지하와 그의 시대」등등은 2차 자료에 불과하여 자료로서 중요성은 조금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궁정동 총소리」는 내가 알기로는 최초의 책이었다. 엄혹한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이런 책을 감히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6공화국이 들어선 후 노태우 정권에서 정권이 물렁해진 다음 처음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는 가장 최근에 나온 것으로 저자는 국선 변호인으로 그 재판에 시종일관 참여하였으므로 확실한 재판 기록에 근거하여 공정한 법적 관점에서 저술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신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운명의 술 시바스」과「대통령의 밤과 여자」는 그 자극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녹음된 비공개 진술을 풀어쓴 것이므로 가장 충실한 원천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는 저자가 박정희의 비열한 인간적 면모를 폭로하면서 그를 격렬하게 성토했고, (박정희를 초인 또는 영웅으로 추모한)「박정희의 마지막 하루」는 극히 보수적인 저자의 편향된 시각으로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천인공노할 비행은 일체 숨겼다. 하지만 ‘박정희 신봉자’라는 말까지 듣던 저자는, ‘김재규는 박정희의 시의적절한 죽음에 기여했다. 만약 김재규의 결행이 늦었다면 박정희는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저승에서 박정희가 김재규를 만났다면 ‘고맙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김재규 평전「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비교적 공정하지만 당연히 평가의 방향이 김재규 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저자는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엉성하고, 우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치밀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나온 평전들은 대상 인물에 대해 일방적으로 칭찬 일색이거나 호의적으로 기술한다. 과장과 미화. 대개는 철저한 자료 조사 없이 그렇게 한다. (특히 유족이나 후손들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고 대필 작가들이 쓴 평전들이 그렇다.) 그렇다면 그런 게 어떻게 평전이라 할 수 있겠는가. 평전이라면 충실한 팩트를 기반으로 해서 가감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참고자료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썽 많은 회고록에 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코난 도일은, ‘영국인의 자서전치고 정직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문학 형태 중에서 그것은 이 나라의 진정한 천재에게 거의 채택된 적이 없었다.’ 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전두환은 여전히 살아 있다. 2019년 3월 현재 88세이다.「전두환 회고록」3권을 2017년 4월 발간했다. 회고록에는 ‘5·18 광주 사태의 발단에서 종결까지 과정에 직접 관여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헬기 사격과 무차별적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군이 개입했다.’ 등 69곳에 5·18을 왜곡하고 비하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회고록은 5·18을 왜곡한 표현을 삭제하지 않고서는 출판 및 배포를 금지하라는 법원의 결정에 따라 5·18 부분이 포함된 회고록 1권의 배포 · 판매가 중단된 상태다. (나는 운좋게도 법원의 결정이 나오기 전에 서점에서 이 회고록 전부를 사서 보관 중이다.)
이와는 별도로 회고록에서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고 그래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2019년 3월 11일은 전두환에게는 아주 긴 하루였다. 1997년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내란목적살인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후 22년 만에 형사법정에 섰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는 김재규 장군과 똑같이 내란목적살인죄를 범했는데도 어떻게 해서 사형을 선고받지 않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단 말인가. 그리고 불과 2년 후 사면을 받고 석방되었단 말인가.)
어쨌거나 전두환은 사자명예훼손죄로 기소된 지 10개월 만에 처음 법정에 나온 것이다. 그는 재판 내내 눈을 감고 졸았다. 1차 재판이 끝나고 법정을 나왔을 때 빗속에 운집한 500여 명의 광주 시민들 중 일부는 그를 향해 ‘살인마 전두환’, ‘내 남편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
작성일:2020-08-03 10:34:47 14.32.9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