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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중편선> 2019 즐거운 사라 (上)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0-08-03 10:22:56
조회수
832
2019 즐거운 사라
故 馬光洙 교수의 ‘즐거운 사라’ 재판 이야기


나는 매일 매일 거울을 들여다봤지
그랬더니 늙고 못 생긴 내 얼굴도
아주 근사하게 보이는 거야
젊은 꽃미남으로, 잘생긴 플레이보이로
나는 더 뚫어져라 거울을 들여다봤지
정성을 들이고 애정을담아……
― 마광수



1. 1992년 10월 29일

1992년 10월 29일 아침 일찍 누군가 마광수 교수의 아파트 문을 세게 두드렸다. 그가 잠에서 덜 깬 눈을 비비며 나가 보니 건장하게 생긴 세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집안으로 몰려들어왔다.
마 교수가 말했다.
“누구시죠?”
일행 중 누군가 말했다.
“검찰에서 나온 수사관들이요.”
“무슨 일로……”
“가보면 알겠지.”
“죄명이 뭔가요?”
“가보면 알아…… 뭘 꼬치꼬치 물어……”
“그래도 알아야 될 거 아닌가요?
영장은 가져오셨습니까?”
“영장은 무슨…… 영장 좋아하시네.”
“어떻게……?”
“잔말 말고 가시죠. 시간이 없으니까.
그렇게 뻗대봤자 좋을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긴급체포야.”
“무슨 이유로 긴급체포를 한단 말입니까?”
“가보면 안다니까. 검찰청에 가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당신이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야.”
그들은 긴급체포를 한다면서 막무가내로 마 교수를 양쪽에서 붙잡고 검은 차에 태워 검찰청으로 끌고 갔다. 그는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안이 벙벙하고 몹시 곤혹스러웠다. 그 소설 ‘즐거운 사라’ 출간 이후 일부 극렬한 보수층의 비난이 쏟아져서 어렴풋이 불안한 예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그 시절이 노태우 정권 말기로 곧 문민정부가 들어설 시기였으므로 한창 민주화와 개방화가 외쳐지고 있는 때라서, 애써 낙관적인 기대감을 가지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나서 수사관들에 이끌려 12층에 있는 김진태 검사의 검사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 소설을 출판한 ‘청하출판사’의 장석주 사장이 연행되어 끌려 들어왔다. 김 검사는 마 교수와 장 사장을 검사실 안쪽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서 음료수를 대접했다. 그 검사는 애써 여유 있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가 몹시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마 교수와 장 사장은 각각 다른 방으로 끌려가 신문을 받게 되었다. 조사를 받기 전에 한 수사관이 그들이 지니고 있던 소지품 일체와 넥타이 허리띠 등을 풀게 해서 조사가 끝날 때까지 따로 보관하겠다고 했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된 피의자 신문은 오후 늦게 대충 마무리되었고 그런 후 법원의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전격적인 긴급체포, 바로 당일 피의자신문조서 작성, 즉각적인 구속영장 발부 등 사건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늦가을 저녁 어둠이 내려앉자 주위는 캄캄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저녁 8시 경 마 교수와 장 사장은 아침에 입고 갔던 옷 그대로 입고 검찰청사 현관에서 검찰에서 미리 각본을 짜놓은 대로 각 방송사, 신문사, 잡지사에서 몰려와 기다리고 있던 약 30명쯤 되는 기자들의 사진 촬영에 협조를 하였다. 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사진을 찍거나 TV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는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연기해 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기자들이 하이에나처럼 몰려들어 그를 둘러싸고 마이크를 들이대며 자꾸 한마디 얘기해 보라고 채근했다.
“교수님! 한 말씀 해주세요.”
“그 소설의 여파를 생각해 보셨나요.”
“구속되었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그는 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물쭈물하고 있다가 간신히 입을 떼고 말했다.
“문학작품을 가지고 작가를 사법처리한다는 건 우리나라가 아직 문화적 후진국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고나서 각기 두 명의 수사관과 함께 두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하지만 그때 함께 구속되었던 장석주 시인은 ‘<즐거운 사라> 재판, 그 탈억압의 끝없는 싸움’이라는 글에서 저녁 8시경으로 기억했고, 마 교수는 에세이 ‘나와 즐거운 사라’에서 그날 아침 검찰청 현관에 도착하니 검찰에서 미리 연락을 해 놓았는지 기자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고 TV카메라를 들이댔다고, 기억하고 있다. 아침과 오후로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2. “뭐, 연세대 교수라는 사람이 그런 야한 소설을 써!?”

그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성에 대해 극히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서, 프리섹스를 추구하는 자유로운 여대생 사라가 갑자기 등장해서 온갖 섹스를 즐기며 쾌락을 추구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실제 소설을 읽어보면 그 음란함은 당시 PC통신에서 돌아다니던 평범한 야설 수준과 거의 비슷하다.
그 당시 항간의 인식인즉, “뭐, 명문 사립대인 연세대 교수가 그런 야한 소설을 썼다고!? 세상이 말세야!? 세상이 망했구나!! 저런 작자가 다있어!!” 수준이었다.
그 당시 유력 보수일간지 등의 지면을 통하여 마광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지식인들이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서울대학교 손봉호 교수는 “마광수 때문에 에이즈가 유행한다, 마광수는 교수가 아니라 마광수 씨로 불러야 한다” 등 극히 위험한 발언을 쏟아냈고, 서강대 이태동 교수는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여대생과 그를 가르치는 교수 사이에서 문란하고 변태적인 성관계가 성실한 노력의 상징인 학점의 흥정 대상이 된다는 것은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마광수 교수와 여제자 사이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가 이문열은 중앙일보에 그의 작품을 ‘구역질을 동반한다, 보잘 것 없다’며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마광수가 구속되자 10여개의 종교단체와 합세하여 구속시킨 검찰의 조치를 적극적으로 환영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즐거운 사라’는 그다지 야한 소설도 아니며, 당시 출판계를 봐도 그보다 훨씬 야한 일본 에로소설도 아무 문제없이 버젓이 출판되던 시기였다.
마광수 교수 자신은, ‘즐거운 사라’만 그렇게 혹독한 처분을 받은 것은 일단 교수가 쓴 것이기 때문이고 주인공 ‘사라’가 방탕한 생활 끝에 불행해지거나 정신차리는 교훈적이거나 도덕적 결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 ‘여성자신’이라는 잡지에 연재될 때는 그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사실 그 당시에도 이미 이보다 훨씬 야한 소설들은 즐비했지만 작품 그 자체의 외설성보다는 연세대 교수가 이런 야한 소설을 발표한 것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 이 소설의 음란성은 당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렇게 야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발생한지 1년 후, 문화일보 (1993년 11월 25일자)는 이 사건의 미심쩍은 배경과 과도한 법 집행에 대해서 검찰 관계자들의 말을 빌리는 식으로 하여 현승종 국무총리의 지시에 의해 갑자기 진행된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현승종은 6공화국 말 대통령 선거기간 중 구성된 이른바 중립내각을 맡은 사람인데 고려대학교 법대 교수 출신으로 전형적인 유교 윤리 신봉자였다.
(만약 그 보도가 사실이라면, 대통령 선거기간 중 여야 간 극심한 대립으로 말미암아 중립내각 총리가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을 터인데 일개 소설의 음란성 여부를 가지고 그렇게 한가하게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것도 교수가 단지 괘씸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 소설은 발간되자마자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게 되는데, 검찰은 김진태 검사를 내세워 ‘시종일관 성도착적이고 퇴폐적인 성행위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주인공 여대생의 괴팍스런 애정 행각을 바람직한 것으로 묘사해 보편적인 성 관념을 철저히 거부했다’는 혐의로 급기야 작가와 출판사 대표를 구속 기소했다.

이로 말미암아 마광수 교수는 당시 연세대학교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가 1998년 사면 복권되면서 교수직에 복직하였으나 그 기간동안 마광수 본인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고 복직 후에도 다른 교수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았다.
이 사건은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현세 화백의 ‘천국의 신화’와 함께 예술과 외설의 경계가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정답없는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즐거운 사라’ 사건이 일어나자 검찰과 사법부의 구속 집행을 지지 또는 동조하는 글을 발표한 지식인은 손봉호 · 구중서 · 이태동 등 대여섯 명에 불과했고 (물론 그중에는 우리나라의 보수 문학을 대표한다는 소설가 이문열이 끼어 있었다. 공판 진행 중에 검사는 그가 마 교수를 비난한 글의 한 대목을 일종의 증거로 낭독하기도 했다), 고은 · 문덕수 · 김주영 · 하재봉 · 조세희 · 김수경 등 217명의 문인이 항의서에 서명을 했고, 그리고 최일남 · 임헌영 · 박범신 · 김병익 · 문형렬 · 신승철 등 40여 명의 작가, 비평가들이 이 사건을 현대판 마녀사냥으로 규정하며 작가를 구속하고 문학작품을 법으로 재판하는 행위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그중에서 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종혁 교수가 쓴 ‘마광수 교수의 도전과 수난’이라는 글은 이 사건의 문화사적 배경과 원인을 잘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한 부분을 여기 인용한다.
마광수 교수의 커뮤니케이션 행위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지녀온 교육의 신화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다. 신화의 거부 ―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모든 지탄과 비난과 억압의 이유였다. 그러나 신화의 거부, 신화의 파괴는 언제나 새로운 의미의 장을 연다. 그것은 새로운 현실 구축의 가능성을, 새로운 출발점을 시사한다.

또한 작가 장정일은 ‘즐거운 사라’의 내용을 언급하며 검찰의 기소를 비난했는데 그가 쓴 ‘마광수 교수 구속은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는 글의 한 부분을 여기 인용한다.
‘즐거운 사라’의 여주인공은 한국의 사회통념상 금지된 사제 간의 애정행각을 통해 권위주의를 공격하고, 남성 중심의 성문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레즈비언을 시험하기도 한다. 또한 그룹섹스를 통해 순결과 성해방 이데올로기에 동시에 눌린 성적 이중구조를 풍자한다. 그 즐거운 혼란은 답답한 일상을 초월한 어느 높이에서 한 없이 낙관적이고 생의 긍정적인 유토피아를 열어 보인다. 이 점, 경건과 금욕으로 강제된 한국문학사에서 회귀하고 소중한 예에 속한다.

다음은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가 쓴 ‘성 혁명과 마광수 교수 구속’의 한 부분이다.
마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가 문학이 아니라 음란물이라는 검찰의 견해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마 교수의 문학세계는 총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가 모 월간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해 온 정치칼럼들은 마 교수가 사이비가 아닌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라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성의 자유민주주의는 논란의 여지가 크지만 적어도 체계성과 철학적 기반을 갖고 있다. 그의 성애론은 그의 확고한 신념이지 결코 인기추구나 돈벌이의 수단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간행물윤리위원회 심의실장으로 있던 박종렬이 쓴 ‘마광수 신드롬을 척결하자’라는 글의 한 부분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마광수 신드롬은 우리들 스스로의 위기관리 능력에 의해서 척결해야 한다. 5,000년 간 우리 선인들이 쌓아온 미풍양속과 문화를 수호하는 것은 우리 세대의 의무이며 차세대를 책임질 우리의 청소년에게 물려주어야 할 우리의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3.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 조사실

마 교수가 조사실에 들어가니까 창문이 보이지 않았다. 온통 회색벽으로 둘러싸인 완전히 밀폐된 방이었다. 방 안 한 쪽에는 욕조가 있는 화장실이 있었고 아무 장식이 없는 큰 침대가 하나 있었으며, 검사와 수사관이 사용하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그 앞에 피의자용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섬뜩한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곧이어 김 검사가 들어왔다. 그 검사는 마 교수와 같은 또래의 남자였다. (실제 마 교수는 1951년 출생이고, 김 검사는 1952년 출생이다.)
그런데도 마 교수가 보기에 검사의 얼굴에서는 ‘ 70년대식 허무 ’가 풍겨 나오지 않고 있었다. 검사스럽게 너무나 의기양양하고 자족적인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검사가 질문을 하고 그가 대답을 하면 수사관이 타이프로 받아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였다. 신문이 시작되자마자 검사의 얼굴 표정이 점점 경직되면서 바뀌었다. 어딘지 모르게 살기가 감돌고 몹시 위압적이었다.
그 사건은, 범죄행위라는 게 소설을 쓴 것이고, 죄목이라는 게 소설이 음란하다는 것인 만큼 아주 기이한 신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증거조사도 있을 수 없고 뚜렷한 가해자나 피해자도 없었다. 롤랑 바르트가 말했듯이 그야말로 ‘내가 보면 예술, 남이 보면 외설’인 게 에로티시즘 예술에 대한 판단기준일 수 밖에 없는데, 검사가 자꾸 마 교수를 파렴치한 현행범처럼 몰아가니 정말 답답하고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자연 문학적 논쟁을 벌일 수 밖에 없었는데, 검사의 문학관은 구태의연한 권선징악적 교훈주의에 머물러 있어 처음에는 도대체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치 벽에다 대고 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외설이나 음란이라는 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인데도, 검사가 음란하다고 보면 곧바로 죄가 되는 것이었다. 중세기의 그 혹독한 마녀재판이 연상되었다. 그는 그래도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서 한껏 긴장한 체 설명을 해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같은 말을 두세 번 말하는 것조차 너무나 피곤했지만 말이다.

마 교수는 해야할 말은 해야겠다 싶어 신문 도중 검사에게 불쑥 물었다.
교수 : “현행범도 아닌데 이렇게 불시에 연행을 해도 되는 겁니까?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저는 지금 대학에서 다섯 강좌나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입니다.”

검사 : “사안이 그만큼 중대하기 때문이오. 당신의 소설이 미풍양속을 해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구속 수사를 하기로 방침을 정한 거요.”

교수 : “아니 가능성이 어떻게 죄가 됩니까? 제가 뭘 알겠습니까만은…… 범죄라는게 실제 현실화되서 피해가 발생해야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사건에서 누가 피해자인가요? 그 피해자는 어떤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검사는 그의 당연한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굳어진 얼굴로 신문을 계속해나갔다.
검사 : “왜? 이 소설의 주인공 같은 방탕한 여자를 그렸소?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 겁니까. 낮 뜨거워서 그걸 어떻게 소설이라고 읽을 수 있겠소.”

그는 하는 수 없이 그 나름대로 답변을 해나갈 수 밖에 없었다.
교수 : “저는 방탕한 여성을 그린 게 아니라 성에 자유로운 여성을 그린 것입니다. 설사 이 소설의 주인공이 방탕한 여성이라고 해도, 그런 여성은 이 시대의 한 개인으로 적지 않게 실존하고 있는 인물들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통해 한 젊은 여성이 봉건적 성윤리에 반항하면서, 성에 대한 학습 욕구를 실천해 보려고 애쓰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검사 : “지금 학습 욕구라고 했습니까? 그게 학습 자료가 된다는 건가요?”

교수 : “그렇지요. 여성해방운동의 여파로 요즘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성에 대한 학습 욕구가 더 커져가고 있고, 또 혼전순결 등 조선시대의 유교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면을 많이 보여주고 있지요.
이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행동으로까지 옮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내면적으로는 프리섹스에 공감하고 있는 여성들이 상당히 많은 게 사실 아닙니까?”

검사 : “도대체 유구무언이라고 해야겠소. 누가 프리섹스에 공감한 단 말입니까? 문학이란게 독자에게 도덕적 감화를 줘야 하는 것 아니오? 이런 소설을 딸에게 읽힐 수 있겠소?”

교수 : “딸이라면 대체 몇 살 난 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서른 살 먹은 딸도 있을 수도 있고 다섯 살 먹은 딸도 있을 수 있어요.
저는 법 집행이 합리적 이성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비합리적인 질문을 하시니 몹시 실망하게 되는군요.
설사 미성년의 딸을 가리켜 말씀하신 거라고 해도 딸에게 어떤 책을 읽어라 말아라 강요할 수는 없어요. 읽으래도 안 읽을 수가 있고 읽지 말래도 읽을 수가 있으니까요. 또 비슷한 나이의 딸들이라 하더라도 독서 수준이나 독서 취향이 각각 다를 수 밖에 없지요.
청소년을 핑계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럼 성인 문학은 존재할 수 없게 되니까요.
그런 논리대로라면 청소년이 보면 안 되니까 어른들이 섹스를 해서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왜 딸 걱정만 하고 아들 걱정은 안 하시는 겁니까? 이 책의 주인공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시비가 한결 줄어들었을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더니 검사가 갑자기 벌컥 화를 냈다.
검사 : “그럼 당신이 쓴 책이 음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말이오? 그게 교수라는 사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란 말이오?”

교수 :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독자들 중엔 ‘너무 야하다’는 사람도 있었고 ‘너무 싱겁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법이란 명백한 기준과 형평성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소설을 음란하다고 보시는 건 자유입니다만, 검사님도 역시 다양한 독자 중의 한 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소설이란 원래 허구적 상상의 산물인데 어떻게 상상을 단죄할 수 있습니까?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 설사 현실 속의 인물이라고 해도 잡혀갈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음란하든 안 하든 합의적으로 섹스를 하고 있으니까요.
소설 속에서 완전 범죄의 살인 묘사를 해도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는데, 자유로운 성행위를 했다고 해서 작가를 처벌한다는 건 저로선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죄라는 게 살인이나 절도같이 명백한 가해 행위가 있어야 하고 또 피해자도 있어야 하는데, 단지 일부 독자에게 외설적인 느낌을 준다고 해서 작가를 처벌한다는 것은 더더욱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검사는 가끔 말문이 막히면 더욱더 감정적으로 나왔다.
검사 : “난 당신 책을 보고 음란한 느낌 정도가 아니라 혐오감이 느껴집디다. 문제는 말이에요…… 교수 신분이 문제인거요. 그것도 명문 사립대 교수란 말입니다. 점잖은 교수께서 그런 야한 소설을 쓰다니…… 학생들 보기가 부끄럽지 않소?”

교수 : “교수 신분과 소설가는 그 위치가 다르지요. 저는 소설가 입장에서 소설을 쓴것에 불과합니다.”

검사 : “교수라면 말이지요. …… 스승으로써 학생들을 선도해야지 않겠습니까?”

교수 : “스승과 소설은 별개이지요. 그리고 대학생들은 엄연한 성인이니까 어린애가 아니란 말입니다.”

검사 : “교수가 연구와 교육에 전념해야지 그런 야한 소설이나 계속 쓰니까…… 한 두 번도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비난하는 거 아닙니까?”

교수 : “전 연구에도 소홀히 한 적이 없습니다.”

검사 : “제가 조사해보니까 연구실적이 별로라는 거죠. 그냥 소설이나 시집이니, 에세이집이니, 잡다한 것만 끄적거렸단 말입니다.”

교수 : “저는 문학 전공 교수가 실제 시나 소설을 쓰는 것은 훌륭한 연구실적이라고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저처럼 많이 쓴 교수가 있을 까요.”

검사 : “전혀 별개의 문제에요. 그런 야하디 야한 천박한 것들을 쓰면 안돼죠. 어느 교수님이 지적했던데 여학생들과 성을 매개로 학점 등을 흥정한 일은 없었습니까?”

교수 : “그건 제 인격을 심하게 모독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근거도 없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까요? 명예훼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검찰은 그런 인간은 처벌하지 않습니까?”

검사 : “그러니까 의심받을 일을 하면 안되는 거죠. 너무 심해요. 너무…… 욕지기가 나올 만큼 혐오스럽단 말입니다.”

교수 : “혐오감을 준다고 처벌할 수 있습니까? 혐오스러운 것을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문학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입니다.
현대소설은 리얼리즘이라고 해서 특히 인간과 사회의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향이 많지요.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나 사회의 밑바닥을 해부하다 보니 그로테스크한 묘사가 많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거죠.
아름다운 것만 골라서 그린다면 사회나 인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어요. 인간에게는 미와 추, 악과 선이 공존하고 있기때문이죠.
그러므로 혐오스러운 것을 보여줬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 위선이지요. 소설의 목적은 금지된 것을 파헤치는 것이고,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꿈꾸기입니다.”

검사 : “수업시간에도 음담패설, 욕설, 본인의 성적 경험담이 날아 다녀서,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은 듣기가 민망했다고 하던데.
그런데 소설에까지 표현은 왜 그렇게 천박하게 했소? 문학이란 품위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오? 그 소설이 그렇게 천박한 언어로 섹스를 정면에서 노골적으로 취급하면 대중적으로 히트를 친다고 생각한 거요. 베스트셀러를 노리고. 또는 주류 문학계에서 논쟁의 중심에 서려고…… 의도한 거 아닌가?”

교수 : “천박하다고 해서 죄가 된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발상입니다. 제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천박하게 표현했어요. 이유 없이 그렇게 썼겠어요? 문학의 품위주의, 양반주의, 훈민주의, 이런 것들에 대한 반발이지요.
한국의 지식인들은 가벼움을 경박함이나 천박함으로 그릇 인식하는 경우가 많고, 설사 경박하다고 해도 그것이 의도된 경박성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드뭅니다.
소설 문장에 사용되는 단어가 일상어 또는 비속어일 경우에 흔히들 그런 인상을 받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는 예전부터 한문을 숭상하고 우리말을 폄하해서 보는 습관이 지식층에 형성돼 있기 때문에, 이를테면 ‘핥았다’ ‘빨았다’ 등 순 우리말을 구사한 표현은 쉽사리 조악하고 천박한 표현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특히 성희 묘사의 경우 대체로 빙 둘러 변죽만 울리고 한자어를 많이 쓰는 문장이 더 품위 있는 문장으로 간주되고, 직설적인 구어체 문장은 상스럽고 천박한 문장으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야한 내용의 소설을 쓴다고 해도 어법이나 전체적 틀은 경건주의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결말 부분에 가서 권선징악을 하며 양다리를 걸치는 게 정석으로 되어있지요.
저는 그런 것에 대한 반발로 이 소설의 여주인공을 부각시키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소설 어디에 이 소설의 여주인공 같은 여자가 있나요. 성에 조금 자유롭다 싶으면 다 자살하거나 반성하거나 그러지요.
그리고 대중적 성공을 바란 적은 없습니다. 이 고루한 사회와 비타협적으로 대결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오히려 실험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검사 : “잘도 둘러대는데, 그럼 대관절 당신의 문학관은 뭐요? 그렇게까지 위악적일 필요가 있었는지 설명해 보세요. 그 소설을 끝내고 나서 무기력과 자기기만 상태에서 혼란스러웠던 거 아닌가. 정말? 그리고 출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보지 않았나요?”

교수 : “저는 문학이 상상적 대리 배설인 동시에 관습적 통념과 억압적 윤리에 대한 도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창조적 반항이 문학의 본질이라고 보는 거지요.
현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가 정말 옳은 것인지 질문하는 것이 바로 작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길들여져 있는 가치관과 윤리관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면서,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 정말 진리인지 아닌지, 또 왜 그것을 믿어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캐들어가는 것이 바로 작가의 사회적 책임이지요.
기성 윤리와 가치관을 추종하면서 스스로 점잖은 도덕 선생을 가장하는 것은 작가로서 가장 자질이 나쁜 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문학은 무식한 백성들을 가르쳐 길들이는 도덕 교과서가 돼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 문학만이 판치는 사회에서는 독창적 상상력과 표현의 자율성이 질식되고 말아요. 문학의 참된 목적은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이요, 창조적 일탈인 것입니다.”

검사 : “지금,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이라고 했소? 그럼 당신은 우리나라의 윤리관념과 정치체제를 부정하는 거요?”

교수 : “저는 주로 수구적 봉건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책의 여주인공은 오히려 운동권 학생들의 경직된 사고를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까?”

검사 : “참, 그것도 그렇소. 학생들의 운동 덕분에 대통령 직선제가 관철되고 이만큼 민주화됐는데, 왜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운동권 학생들을 비판하고 있는 거요? 시대 정신에 역행한단 말입니다.”

그는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예전엔 운동권 학생들을 때려잡던 검찰이, 이제 와서는 소설 속 여주인공이 운동권 학생들의 윤리적 경직성을 비판하는 말 몇 마디 한 걸 가지고 트집을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교수 : “운동권 학생들이나 진보적 지식인들 중 상당수가 봉건윤리적 사고방식의 측면에서는 다른 기득권 수구주의자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기 때문에 비판하고 있는 거지요.”

검사 : “보수와 진보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나요? 보수와 진보는 서로 조금씩 섞여 있는게 아닐까요. 그쪽 시각에서 보면 검사는 수구꼴통으로 보이겠지요.”

교수 : “제가 지금 대명천지에 이렇게 수사를 받고 있는걸 보면…… 기가 막히지요. 한가하게 보수와 진보를 논할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건 확실하게 인권 유린입니다. 지금까지 음란물 제조죄로 인신이 구속된 예가 있었습니까?”

검사 : “죄가 된다 안 된다 여부, 구속 여부는 검사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검사는 법률 전문가 아닙니까.”

교수 : “검사가 오직 자신의 잣대로 법을 농단해서는 안 될겁니다. 조자룡이 헌 칼 쓰듯 법을 휘둘러서는 안돼죠. 그렇지 않습니까. 검사들은 부디 자중해야 합니다.”

검사 : “검사가 피의자로부터 법률 강의를 들을 필요는 없어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어쨌든 이 소설에는 오럴섹스, 카섹스, 여자가 땅콩을 가지고 하는 자위행위, 마조히스틱한 섹스나 레즈비언 섹스 등 변태적인 장면이 나오고 있소. 이건 분명 성적 수치심을 극도로 자극하는 행위묘사에 해당되는데, 그래도 할 말이 있소?”

교수 : “오럴섹스나 자위행위, 그리고 카섹스까지도 변태라고 하는 건 납득하기 곤란합니다만, 어쨌든 성희 묘사가 변태스럽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된다는 건 납득이 안 갑니다.
변태성욕 역시 인간 심리의 다양한 양상 중 하나인데, 그걸 리얼하게 묘사했다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습니까?
범죄소설에서 갖가지 변태 심리를 다루는 것이 당연하듯이, 성애소설에서 변태 심리를 다루는 것 역시 하나도 이상할 게 없어요. 정상적인 성이나 생식적인 성만 소재가 될 수 있다면 인간의 내면 세계를 보다 깊게 파헤칠 수 없으니까요.
사디즘이나 마조히즘 등의 변태 심리는 이제 단지 성애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학이나 사회학에서까지도 폭넓게 응용되고 있습니다.
사드나 마조흐의 소설은 이미 문학사의 고전이 되었고,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같은 책도 마조히즘 심리를 정치사회학적 측면에서 다룬 명저로 취급받고 있지요.
일부 독자의 성관념에 어긋나는 성행위를 그렸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음란 퇴폐물로 규정해 단죄한다는 것은, 남성 상위 체위 이외의 방법으로 성교하는 사람들은 단죄했던 중세기의 논리와 다를 바 없어요.
변태 성욕은 이제 영화나 문학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고, 일반 독자들 역시 그런 종류의 묘사에 세련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대다수의 독자들은 오히려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나 성애를 바라고 있지요. 상상적 일탈을 통해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맛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카타르시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검사 : “다시 말하면 당신은 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오직 감각적일 뿐이지. 좀 더 진지하게 숭고한 성의 본질에 다가갈 순 없었나. 생물학적 성이 아닌…… 성을 통해서 인간이 무엇인지 규명할 수 있었는데. 성은 원초적인 것이니까.”

교수 : “소설에서 철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면 그건 이미 소설이 아닌 것으로 되버려요. 그러려면 차라리 도덕 교과서를 쓰는 게 나아요. 저는 그런 걸 타파하고 싶은 겁니다.”

검사 : “왜? 그녀가 한바탕 섹스에 몰입하다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았는지…… 그게 인간의 속성을 고려하면 당연하지 않은가요? 그 후 한 인간으로 성장해서 혹은 도덕적으로 성숙해서 나타나지 않았는지 궁금하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회가 빠졌단 말이지. 또는 속물적인 모습을 지우고 영적인 모습으로 재생시키던가.
그렇게 되었더라면 구속 기소는 불가능할 건데.”

교수 : “무라카미 류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에서 실컷 섹스를 즐기다가 ‘그러고 보니까 허무하더라’로 결말을 맺으면서 양다리를 걸치고 교훈주의로 도망갔습니다.
그런 소설을 성장소설이니 교육소설이니 하는데 정말 웃기는 거에요. 저는 그따위 식으로는 쓸 수 없어요. 그런 건 성경처럼 설교집이지 진정한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독일에서도 일본에서도 한때 소설에서 설교는 하나의 큰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건 과거의 일이죠. 지금은 포스트 모던이란 말입니다.”

검사 : “사라에게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신의 삶과 꿈, 어떠한 희망도 없어. 그러니까 강력하건 아니건 간에 스토리텔링이 없어요. 오직 무모한 섹스만 소설 전편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넘처나고 있지.
이건 건전한 소설이 아니라 더러운 포르노그래픽인거지. 극도로 비도덕적인…… 그것도 아주 역겨운 ……”

교수 : “검사님은 그 소설을 제대로 읽은게 아니에요. 무언가 오해하고 있단 말입니다. 독자가 오해하는 건 독자의 자유이지만 이 경우는 다르지요. 범죄가 성립되는지 여부가 쟁점이니까요.
자유분방한 성관념을 가진 여성을 그리는 소설을 쓸 때마다 제가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소수를 무시한다는 사실입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주장하는 성 철학도 소수 의견에 속하는 것이고, 소설 속에 그리는 인물들도 다 소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소수라고 해서 그들을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검사 : “제가 향이 좋은 맛있는 커피를 대접하지요. 그리고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조서에 올리지 않겠소. 우리끼리 하는 솔직한 사적이야기니까 말이요.
나는 수사에 착수하면서 지금까지 나온 책들을 거의 전부 꼼꼼하게 읽었어요. 그러니까 진정한 독자라고 할 수 있지. 지금부터 독자가 작가와 작품을 매개로 대화하는 거죠.”

교수 : “무슨 말씀인가요? 매우 궁금하군요.”

검사 : “왜, 상상 속 인물의 성행위에 대해서만 그렇게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요? 작가 자신의 내면 무의식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 자신을 들여다 보면 그게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죠.”

교수 : “그게 프로이트식 정신분석 아니겠습니까. 그건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 영역이죠. 그러면 독자가 이해하기 곤란해서 난해하게 됩니다. 왜 그렇게 소설이 난해해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건 사소설이라고 해서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작가의 일기장 같은 것이 될 수도 있죠.”

검사 : “당신의 소설은 고정된 스타일이라고 할까, 패턴이라고 할까, 그런 게 있는데 한결같이 섹스에 관한 것만…… 그래서 너무 피상적이고 깊이가 없어요. 나는 행간에 숨은 의미를 찾기 위해서 눈을 부릅뜨고 읽어보았지만 실망했지. 진정한 의미는 없었으니까.”

교수 : “내 소설에 진정한 의미는 숨어있지 않지요. 헛수고 한 거에요. 인생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겁니다. 정말 아무 의미가 없어요.”

검사 : “마 교수께서는 스스로 성 도착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가요. 직접 집필한 시집이나 소설 등을 잘 살펴보면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는데요.”

교수 : “그럴지도 모르죠. 아닐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 도착자가 범죄자는 아니지요. 극히 보수적인 시각에서 보면 조금 이상하게 보일 뿐이지요.
봉건 윤리로 생각이 똘똘 뭉쳐 있는 자들, 성을 불결하게 보는 자들, 그리고 변태성욕을 불결하게 보는 자들, 그리고 변태성욕을 범죄시 하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밤이 되면 진짜 섹스광이란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상상적 섹스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엄격하고, 실제적 섹스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너그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상 속의 섹스, 특히 이른바 변태성욕 같은 것을 묘사한 문학 작품이 법으로 처벌되는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중 한국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음성적인 매춘의 천국입니다. 검사들도 매춘을 자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걸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이 기이한 이중성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것이 촌스러운 문화수준 때문에 빚어지는 현상입니다.”

검사 : “왜 그렇게 병적일 만큼 에로티시즘에 몰두하는지 의문이 들지요. 스스로 섹스에 대해서 열등의식이 있는 건 아닌지? 혹은 성적으로 약점이 있었던 건 아닌지? 그걸 보상받으려고 그런 소설을……. 죄송하지만 혹시 성 불구자는 아닌가요? 그런 의심까지 든다니까. 그 소설 속 교수는 작가의 분신이 아닌가요?”

교수 : “인생의 행복은 오로지 성적 만족에 의해 결정된다고 봅니다. 명예, 돈, 권력 등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성의 자유로운 포식을 위한 준비단계에 지나치지 않습니다.
정신적 행복감이란 허위의식에 가득 찬 은폐일 뿐입니다. 구체적인 행복감은 육체적 쾌락에서만 옵니다.
저는 결혼할 때까지 많은 여자들과 길게 짧게 연애를 하였습니다. 10여 명쯤 되지요. 그런데 모든 여인들과 육체관계를 가지면서도 임신시켜 본 적이 없습니다. 무조건 오럴섹스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어질 때 아무런 부담감 없이 헤어질 수 있었습니다. 또 결혼하고서도 3년 동안 악착같이 피임을 했습니다.
그래서 3년 살고, 1년 별거하고, 그리고 나서 이혼할 때 홀가분하게 이별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3년 동안은 피임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가 있을 때 이혼하면 아이한테 평생 죄를 짓는 게 됩니다.
이혼은 결혼 후 3년 이내에 가장 많이 발생합니다.”

검사 : “사랑의 열정이 지나간 다음에는 죽음과 같은 불안만 남는거 아니겠어요. 왜? 소설이 그렇게 천덕꾸러기가 되어야만 하는 건지 의심이 든단 말입니다.
당신은 주제의식도 탁월하고 문체도 훌륭하니까 자신만의 목소리로 새로운 주제를 끄집어내 변주하면서 얼마든지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데…… 재능을 다른 데 쓰는 걸 보니까 안타깝단 말입니다.
그랬으면 최고의 작가로 등극하였을 터인데 말입니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지만 말이요.”

교수 : “커피는 정말 맛있습니다. 아주 오래간만이거든요.
여기에다 담배를 한 대 피웠으면 금상첨화일텐데.
그런데…… 검사님의 문학관은 저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더 이상 제 문학관을 여기에서 피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검사 : “자살이 낭만적인 행위라고 생각지는 않소.
어떠한 고난이나 운명이 닥쳐도 굳굳하게 살아가기 바라겠소.
이까짓 사건에 구속도, 기소도 가당키나 한 거요.
일개 검사의 파워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나도 내심 무력감을 느낄 수 밖에 없소. 검찰은 상명하복 관계이니까.”

교수 : “검사가 느끼는 고뇌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검사는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하지요.
법은 언제나 권력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법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게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검사 : “판사도 마찬가지일거요. 결코 무죄를 선고치는 못한단 말입니다. 그럴만한 용기가 없으니까. 그들은 지독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어요.”

이밖에도 범죄 모의 장소 (즉 출판계약을 한 곳), 간행물윤리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한 이유에 대한 추궁 등, 기타 질문이 있었다.
신문이 끝나고 나서 수사관이 타이핑한 것을 보여주며 확인한다는 뜻으로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그것은 사실상 강요에 가까웠다. 국문과 교수인 그가 자세히 살펴보니 대충 요약해서 기록했기 때문에 문맥이 안 맞는 데다가 문법에 틀리는 문장이 수두룩했다.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이고 일일이 다시 써주거나 고쳐 주는 것이 불가능 할 것 같아 그냥 손도장을 찍어 주고 말았다.
마 교수가 아무리 답변을 잘한다고 해도 검사든 판사든 ‘나는 음란하게 봤다’고 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사실 검찰의 신문이나 법원의 재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증거가 충분치 못하면 무죄가 되는데, 이런 식의 문학 관련 재판은 정말 황당한 원님 재판식 법 집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장석주를 조사한 사람은 김진태 검사 밑에 있는 수사계장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장석주에게 반말을 했다. 장석주가 다리 한 쪽을 다른 쪽의 다리 위에 얹은 채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인상을 쓰며 매우 거친 말투로 소리쳤다. “똑바로 앉아!”
그러고나서 그는 장석주에게 백지를 내밀며 인적사항들은 간단하게 적어내라고 명령했다. 생년월일, 본적지, 현주소, 가족관계, 학력, 경력 따위를 의례적으로 묻고 그것들을 앞에 놓인 타자기로 피의자신문조서에 찍어나갔다.
그는 주로 장석주에게 신문해야할 사항을 간단하게 메모한 쪽지에 의거하여 물었다. 그러나 그 신문 사항들은 매우 간단했다. 그 물음과 물음 사이에 그는 수사와는 상관없는 그 의도가 분명치 않은 모호한 횡설수설에 가까운 말을 했고, 또 잡담에나 해당될 이야기를 아주 길고 지루하게 늘어놓았다.
이를테면 자신이 읽은 ‘즐거운 사라’에 관한 독후감에 대하여 (그러나 그는 ‘즐거운 사라’의 내용 전체를 읽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는 그 소설을 끝까지 읽었다고 주장하였지만 그의 말 도중에 소설의 세부사항들에 대한 무지를 너무 빈번하게 드러내곤 했다. 아마도 그는 검사가 기소를 위해 ‘즐거운 사라’에서 음란하다고 인정되는 부분들을 발췌한 내용들만 읽었음에 틀림없다.
수사계장이 말했다.
“나도 술집에 가끔 가거든. 술집에 가면 그보다 훨씬 더한 짓거리도 한다고. 우리도 남자니까.
‘즐거운 사라’를 마누라에게 읽게 했지. 충격을 받았더라고. 그랬으니 마누라가 아주 추잡한 책이라고 규정을 하더군. 내가 뭘 알겠어. 그래서 마누라 말을 믿기로 한거야. 그건 추잡한 책이야.”
그런데 장석주가 조사를 받고 있던 조사실로 김진태 검사가 불쑥 들어왔다. 그는 수사계장에게 조서를 받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물었다.
그리고 장석주에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한테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즐거운 사라’가 문학이고 소설이요?”
그의 얼굴에는 약간 야비한 느낌을 주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는 장석주가 출판했던 그 소설이 백해무익한 것이며 그 소설의 성적 표현들이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그 위반과 일탈에 대한 사법적인 제재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장석주가 그의 물음에 단순하고 명료하게 대답했다.
“네, 소설이고 문학이지요”
그 검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랑삼아 말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은 문학이 뭔지나 알고 있소. 내가 독서를 엄청나게 많이 한 사람이라고. 문학에 대해서도 전문가 못지 않게 많은 지식을 갖고 있다니까.”
장석주는 안경을 끼고 강한 경상도 억양의 말투를 가진 그 검사에게 아주 분명한 어조로 문학의 본질에 대해 말을 했다.
“‘즐거운 사라’가 왜 문학일 수밖에 없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가의 사회적 책임은 당대의 지배적 도덕체계를 강화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에나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사람들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당대의 지배적이고 유용한 가치체계에 종속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것을 의심하고 그것의 본질을 직시하고 성찰하도록 이끌지요.
문학적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당대적 현실에 대해 일탈적이며 가치 전복적으로 움직이며…… 끊임없이 금지된 영역에 대한 탐색과 도전을 멈추지 않습니다. 문학적 상상력은 항상 경계와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의지를 반영합니다.”
장석주가 분명한 어조로 말을 해나가는 동안, ‘즐거운 사라’의 정가가 5,800원 이라는 사실을 거듭 들먹이며, 그를 ‘음란한 소설’이나 발행해서 책을 팔아먹으려는 파렴치한 출판업자로 몰아가면서 큰소리로 한바탕 훈계나 해주려고 말을 꺼냈던 그 검사의 얼굴색은 붉어졌고 일그러져버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일개 파렴치한 출판업자의 입에서 나온 정곡을 찌르는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그 검사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를 버럭 내뱉었다. 그리고나서 문을 쾅하고 소리나게 닫고는 나가버렸다.
“나는 당신같은 친구하고 문학에 대해 토론이나 하자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냐”
그 순간 장석주는 그가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검사는 장석주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같은 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등단해서 활동한지 열세 해째나 되는 잘 나가는 문학평론가이며, 세 권의 문학평론집을 출간한 현역 비평가라는 사실을 몰랐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학전문가 앞에서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그가 무모하게 문학의 본질에 대해 토론해보자는 식의 만용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검사의 신문이 끝난 후에도 마 교수는 오랫동안 조사실에 갇혀 있었다. 수사관 하나가 남아서 그를 감시했다. 답답한 환경에서 담배를 못 피우니 미칠 지경이었다. 낌새로 봐서는 구속영장이 발부될 게 분명한데 앞으로도 계속 담배를 못 피울 생각을 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저녁때가 되자 수사관이 다 식은 국밥 한 그릇을 갖다 주었다.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반도 못 먹고 숟가락을 놓자 수사관들이 들어와 그를 양쪽에서 붙잡고 검사실로 데리고 갔다. 청하출판사의 장석주 사장도 끌려 들어와 있었다.
검사가 마 교수를 보고 말했다.
“구속영장이 발부됐소. 할 말 있소?”
그는 몹시 지쳐 있었지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이번 사건처럼 이른바 외설을 이유로 작가를 구속한 일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현실에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빠른 시간 내에 웃음거리로 회자될 날이 올 것입니다.”
검사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 선생을 연행한 것이나 구속하는 것이나 나 혼자 결정해서 한 일은 아니오. 이 사건은 국가적 사안이오.”
일개 소설의 음란성 여부가 국가적 사안이라는 말이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들리면서, 한편으로는 그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작성일:2020-08-03 10:22:56 211.104.150.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