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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선> 교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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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9-09-16 15:43:45
조회수
360
교사범




첫사랑의 매력은 첫사랑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 B. 디즈레일리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마리아갈랑 리프팅 크림으로 화장을 했다. 덕분에 그녀의 살결은 상큼한 향기를 머금은 듯 뽀얗고 매끄러웠다. 리프팅 크림의 산뜻한 자극으로 살결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그녀는 아침을 느낄 수 없었다. 남자는 가볍게 코를 골면서 여전히 잠에 빠져있다.
계절의 여왕인 5월의 둘째 주 주말.
봄날 아침의 신선하고 상쾌한 공기와 풍경들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녀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걷는 기분이었다. 강릉 해변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고 사막색 모래가 깔려 있었다. 썰물은 빠져나가고 다시 커다란 파도가 천천히 너울거리며 밀려오고 있었다. 파도는 따뜻한 모래 위에서 부드럽게 부서졌다.
순결을 상실한 밤.
밤새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약간의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맑았고 감각은 들떠 있었다.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이상형을 만났다. 그를 보자마자 속으로 ‘이 남자다!’라고 외쳤다. 그건 남자 쪽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로에게 동시에 “O.K.!”를 외쳤다. 두 달 전 첫 번째 데이트부터 환상적이었다.
그녀는 2009년 3월 중순부터 8개월 동안 남자를 만났는데 늦가을 낙엽이 지던 그때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매 주말마다 또는 2주마다 만나 데이트를 했었다. 유방이 붓고 압통이 생기고 현기증이 일어나고 월경을 건너뛰었다. 입덧이 일어난 것이다. 병원에 가서 소변 검사를 통해 임신 여부를 확인했다.
그들은 서초동 먹자 골목에 있는 호텔 커피숍 구석진 자리에서 만났다. 그가 말했다. “아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라…… 결혼한 후에 아이는 다시 천천히 가지자.”
그녀가 화를 내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말도 안되는 건 아냐. 상황이 그렇다니까.”
“내가 순결을 상실한 대가인 거 몰라! 그리고 어쨌거나 생명은 소중한 거야!”
그가 그녀를 설득하려는 듯 천천히 말했다. “나는 전문의 과정을 더 밟아야 되고…… 아직 2년이나 더 남아 있잖아. 지금 얼마나…… 하루에 잠은 네 시간도 못 잘걸.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당하고 있는 거지. 전문의가 되고 자리를 잡고 나서…… 아직 늦지 않았어.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애를 낳으면…… 내가 알아서…….”
그가 짜증을 냈다. “아빠가 될 준비가 안 되었다니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순리 아니겠어. 체면이 있는데 결혼식은 호텔에서 그럴듯하게 올려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말이야, 집에는 어떻게 이야기하란 말이야?”
겨울이 깊어졌다. 그날은 진눈깨비가 가볍게 휘날렸다. 모처럼 교대역 사거리 근처 한정식 식당에서 만나 점심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친 후 한참을 걷다가 뒷골목에 있는 작은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았지만 눈을 응시하면서 쳐다보지는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커피는 식어버렸다.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말했다. “아이를 지우는 것이 좋겠어. 더 늦기 전에. 임신 주 수가 얼마 되지 않는 태아의 경우에는 수술이 아니라 기구를 이용해서 흡입을 하기 때문에 산모의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까.”
그녀가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 넌 의사니까!”
그가 말했다. “간단하다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수술이 아니라 그냥 시술이라고 하는 거야. 국소마취제를 자궁경부에 주사하고 나서 자궁의 내용물을 얇은 관으로 흡입해서 제거하지. 그리고 자궁 내 모든 조각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해 자궁벽을 부드럽게 긁어내는 거지. 그거뿐이야. 너무 간단하다니까.”
“그래도…… 무서워……. 그러면 안 될 거 같애.”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날 못 믿겠어? 그걸 알라구. 자기 몸은 스스로 잘 관리해야 되는 거야.”
그녀가 물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결혼도 하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해로할 수 있는 거야?”
“그렇다니까. 그걸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만약 하지 않는다면 우리 앞날에 크나큰 난관이 될 거야.”
그가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이다. 그가 밀어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그녀는 태연해 보였지만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출산이나 결혼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러니까 아이를 낳게 해주면 안 되겠어?”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불안하게 자세를 바꾸었다.
그가 역정을 내며 말했다. “출산 여부는 알아서 하라고! 그러면 더 이상 결혼을 진행하지 않을 거니까!”
그녀가 말했다. “뭐라고 했어?”
그가 말했다. “아이를 낳든지 말든지…… 아이에 대한 친권을 행사할 의사는 없으니까. 필요하다면 낙태를 할 병원을 알아봐 줄게…… 그걸로 끝이야.”
그날, 그녀는 그의 의사가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뱃속에 든 생명체는 아무런 보장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이 알아본 병원에서 낙태 시술을 받았다.
그녀는 후회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그 모든 아픔과 고통을 스스로 감당하기로 몇 번이고 다짐했었지만. 나는 어쩌면 그렇게 눈이 멀었던가? 아니면 어리석었던가?
그녀로서는 현실의 벽은 너무 두터워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눈멂과 어리석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귀중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가 이 일을 잊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아니면 몸에 지닌 지문처럼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은 채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작성일:2019-09-16 15:43:45 14.32.9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