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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에세이> 단상 혹은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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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9-04-27 11:44:47
조회수
416
단상 斷想 혹은 단편 斷編




가장 중요한 것은 사유에 있다.
―톨스토이



이제 스스로 작가라고 선언할 수 있을까? 100여 편이 넘는 소설을 발표했고 소설집만 15권을 출판했으니까. 그리고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작가회의,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자기 혐오에 빠져 있으니 자아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으니 자신이 없고 쑥스럽다. 그렇지만 강박적이고 무언가에 사로잡혀서 점점 자의식적이고 회의적으로 변모해 간다는 점을 고려하면 작가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왜 글을 쓰는가? 나는 예전에도 무수히 많은 글을 썼지만, 그건 전부 법률가의 관점에서 쓴 법률 문서였다.[지금도 나에게는 변호사 업무 또는 나는 우리나라에서 신용장법학을 개척하고 정립하였기 때문에 법학자로서 그 분야에서 논문을 쓰는 일과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일은 똑같은 비중으로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상호간에 모순되지도 않고 상극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문학적 글을 쓰려면 순수한 영혼으로부터 어떤 영감이(그러니까 어떤 번득임이) 끊임없이 흘러나와야 하므로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나 장애물을 제거한 상태인 마음의 평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내 육체와 정신 전체가 평온한 가운데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언제부터 내가 문학 작가가 되고 싶었을까? 내 인생항로에서 아주 뒤늦게 ……. 그런데 왜 하필 소설을 쓰는가? 산문 정신이 투철해서 산문을 써야만하니까. 내 영혼의 내 혈관 속에 작가의 진한 피가 흐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문학이 사람을 고귀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뭣 때문에 소설을 쓸 것인가? 문학과 예술이 사람을 고귀하게 만든다고? 작가이건 독자이건 문학에서 고귀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직도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단 말인가. 문학과 예술을 접촉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된다고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말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모두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 속에서 가장 하위에 있는 것이 문학이다.
그렇다면 왜 문학이 필요한가? 문학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의 삶과 복잡한 세상을 깊이 이해하고 인식하는 방식은 이야기가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이야기만이 우리의 삶을 가장 충실하게 총체적으로 기억한다.

나는 현재에 살고 있지 과거 속에 살고 있지 않다. 과거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히는 대신 현재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이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다. 현재는 실제로 가득 찬 시간이고 오직 그 현재 안에 나의 존재가 놓여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안간힘을 다하여 현재를 확실하게 붙잡고 싶다. 그러니 미래에 살고 있지도 않다. 미래는 뜬구름 같아서 비현실적이고 너무나 불확실하다. 미래는 언제나 잘난체하는 예언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되었다. 나의 경우 미래는 거의 언제나 내가 상상했던 것, 열렬히 기대했던 것, 예측이 가능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로 나타났다.(물론 누군가는 ‘진정한 미래는 항상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다’라고 말하긴 했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서 시대적 상황은 어김없이 모든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시대의 모든 현실, 제도, 관습, 사고방식, 사상과 감정은 그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의 삶을 규정하므로 누구도 이를 피할 수 없다.
나는 항상 신문 지면을 도배하는 우리 시대의 현실과 사회 문제를 주목하고 고민한다. 문학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역사적 상황의 한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는 한물 간 ‘평범한 것에 주목하라’는 낡은 리얼리즘을 표방하며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주로 시대의 초상화인 사회소설 또는 가끔은 우리 삶의 배경에 숨어 있는 깊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온통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4차 산업혁명의 세계에서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정의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나의 관점에서는 -우리는 장르들이 아주 넘쳐나는 또한 하이브리드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 해괴망칙한 고딕 소설과 SF 소설, 포르노 소설 같은 장르 소설에는 관심도 없고 쓸 줄도 모른다.
그러면 사회소설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사회생활과 분리해서 삶을 영위할 수 없으니까. 그걸 깨닫기 시작하면서 등장한 본격적인 근대 소설은 어떤 범주에 편입시키건 간에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인과관계의 궤적을 따른다는 점에서 모두 사회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현실을 냉정하고 정직하게 관찰하면서 사회 문제를 다루는 소설. 사회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태도가 드러나는 경향이 있는 소설로 그 범위를 한정할 수 있다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하지만). 그래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는 낭만주의와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
발자크는 소설에 적합한 주제란 ‘사회의 역사와 그에 대한 비판, 그 병적 구조에 대한 분석과 원칙들에 대한 논의’라고 말했고(그래서 엥겔스는 발자크가 사회의 복잡성을 전체적으로, 특히 계급 구조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했다는 의미에서 그를 리얼리즘 글쓰기의 최고의 모델로 여겼다), 앙드레 지드는 ‘서구 소설은 사회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실험 소설론」을 쓴 자연주의 소설의 대가인 에밀 졸라 만큼 문학 이론에 있어서 자연 과학의 객관성과 생물학적 결정론 또는 포토 리얼리즘(photo-realism)이나 극사실주의에 심취하여 거기에 경도된 것은 아니다. 자연주의는 과학 만능주의에 빠진 너무나 과격하고 극단적인 사실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루카치는 에밀 졸라에 대해 ‘사회적 발전의 참여자이자 위대한 투쟁의 주역의 지위에서 일상생활의 단순한 구경꾼이자 기록자의 지위로 이행한 작가였다’고 폄하하였다.
나는 법률소설(내가 처음 쓴 용어이지만 과연 정확한지는 나도 모르겠다)을 자주 쓰게 된다. 사회적으로 쟁점이 있는 사건은 반드시 법률적 쟁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그런 소설에 나오는 어려운 법률 용어에 저항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천학비재한 나는 그걸 풀어서 쉽게 쓰지 못한다. 쉽게 쓰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는 법조계의 실상을 속속들이 아주 잘 알고 있으므로 (사실주의 작가들이 강조했던 것은 관찰과 자료 조사였는데 나는 그런 면에서 아주 유리했으니) 그런 것들을 피할 수는 없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눈을 돌려 버릴 수가 없다. 일상 생활에서라면 불편한 진실에 해당하는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누가 물어 본다 한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시대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면 법조계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는 법조계의 애독자들을 봐주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내 자신도 봐주지 않는다.
하지만 법적 차원의 고발을 하려는 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발산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으므로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가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증언을 하려고 한다.
많은 법조인 독자들이 내 소설에 대해 고통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자신들의 치부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포착해서 그것을 일반인들에게 노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법조계를 미화하고 과장하여 고상하게 묘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어떤 독자는 굳이 그런 문제에 대해서 왜 써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국민들에게 법조계의 긍정적이고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는 것을 써야한다고 하면서. 하지만 그건 작가가 독자를 모독하고 속이는 일이다.
누군가 ‘문학과 법의 지향은 근본적으로 상호 적대적이다. 법이 현존하는 가치를 가다듬고 보호하려는 반면 문학은 세속의 가치를 부정한다. 법이 현실의 편이라면 문학은 다른 세상의 편이다.’라고 말했지 않는가.
내가 반드시 써야만 하는 것, 쓰지 말아야 하는 것,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을까. 작가에게 그런 한계는 무의미하다.

나에게 글쓰기는 아주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글을 쓰면서 즐기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문학을 은신처로 하여 남은 인생을 적당히 살아갈 순 없으니까. 가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다. 나를 가로막는 일종의 장벽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열등감을 느낀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러한 고통이 줄어들기를 바라지만 그건 도대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몇 년째 많은 중 · 단편 소설을 쓰다가 중간에 포기하였다. 끝까지 마무리하여야 하는데. 포기하는 건 아주 나쁜 버릇이다.

파스칼이 말했다.
인간이란 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경건함은 영원한 보상을 받을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의 삶은 그만큼 기품있고 이성적일 것이다.

내 정신은 순수하지 않고 온갖 불순물이 뒤섞여 있어서 분열되어 있다. 그러므로 내 머릿속은 모든 게 헝크러저 엉망이다. 그렇다면 글도 엉망일 것이다. 빛나는 영감도 없고 번쩍이는 상상력도 부족하다. 내가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겠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럴때면 온몸에서 힘이 쑥 빠져나가면서 구역질이 날 것처럼 입안에서 쓰디쓴 맛을 느끼게 된다. 글 한 편을 끝내면 새로운 주제와 소재, 색다른 idea를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데, 그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문학 작품은 무엇보다도 풍부한 감정이 전달되어야 하므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면 더욱 깊은 곳에 숨어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선에서 정확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로부터 저절로 흘러나와야 한다. 그게 단어 하나 하나에 또는 문장 하나 하나에 스며들어 있어야 그 글은 생명의 비밀을 지니게 된다. 독자로부터 비난을 받는 그저 그런 글이든 아니든, 오해를 받는 글이든 아니든, 좋은 글이든 나쁜 글이든 말이다.

나는(지독한 회의주의자는 아니지만) 작가로서 낙관주의나 헛된 희망에 속지 않기 위해서 항상 의심을 하면서 세상이나 사람을 탐색하고자 한다.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누구도 존경하지 않으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다. ‘리얼리티’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매우 변덕스럽고 의지할 바가 못 되는 것 같아보입니다. 때로는 먼지 날리는 길에서, 때로는 거리에 떨어진 신문 조각에서, 때로는 태양 아래 수선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요.
작가의 임무는 리얼리티를 찾아내고 수집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나는 강력한 호기심으로 자기 자신을, 사람들을, 낯선 사람들을, 현상, 사건, 이 세상을, 그 모두를 이면에서 속속들이 알아보고 싶다. 그래서 그 무엇도 당연하게 여기고 싶지 않다. 나는 작가로서 인간의 깊은 내면에 속해 있는 무의식적인 감정과 동기에 깊숙이 파고들어야 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다. 모든 사람에게 감정은 내재해 있다. 왜 아니겠는가. 그래서 언제나 감성이 이성에 앞선다. 감동적인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날 것 같은 생생한 감정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소설에는 감정이 풍부한 생각은 물론이고 생각이 풍부한 감정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써내려갈 때면 무심결에 자신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끼면서 은근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나는 글을 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언어를 조탁하여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모순적인 요소들을 정교하게 다듬는 일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해야만 한다. 그것은 나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동기로 가득하다.
나는 소설이 단순하게 쉬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의 삶이 쉽지 않은데, 우리의 현실이 녹록치 않은데 어떻게 문학이 쉬울 수 있겠는가. 엘리엇은 ‘우리 시대의 시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엄청나게 복잡하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하물며 소설에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짜임새와 분위기가 너무 긍정적이거나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를 쓰지 않고 그냥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특히 지나치게 센티멘탈하게 되면 글이 물렁해지면서 망치게 된다.
하지만 때로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허둥대면서 앞뒤 순서를 분간하지 못 하거나 그래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야기에는 시작과 중간, 끝이 있는데 말이다. 물론 여기에서 끝이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이야기의 완수(fulfillment)를 의미한다.
그건 이야기가 마냥 흘러가도록 놔두지 않고 뭔가 화려하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강력한 작중 인물을 창조하려고 하면, 어떤 눈을 뗄 수 없는 장면이나 기발한 대화 몇 토막, 플롯의 놀라운 전환을 시도하면 그렇게 된다. 이야기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디테일을 너무 많이 추가하면서, 그 반대로 속도를 높이기 위해 이것저것 잘라내면서 그렇게 되기도 한다.
글의 군살을 빼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애써 쓴 걸 다시 지우다니. 이걸 잘라버리면 그 장면은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 아닐까. 이걸 뺀다고 더 좋아진다는 보장이 있는가. 고작해야 이야기를 더욱 초라하게 전락시키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그런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나도 모르는 새 이야기의 뼈대에 금이 가고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글쓰기 과정에서 다시는 스스로를 함정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매번 결심하지만 말이다.
나는 한 번도 마감시간에 쫓긴 적이 없는데도 그렇다. 누가 내게 원고를 청탁한 일이 있었던가.

그러나 무명작가인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아서,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아서 목에 힘을 주면서 신경을 쓸 일이 없으므로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가.

시도 마찬가지이지만 더욱 긴 산문에서는 단어의 배치는 물론이고 문장, 문단을 어떻게 만들어 배치하느냐가 중요하다. 의미 없는 단어는 없다. 하지만 불필요한 단어는 지워야 한다. 자기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가지고 자기만의 특정한 스타일로 자기만의 뛰어난 문장을 만드는 일, 그게 작가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이지만 작가에게는 그것이 다른 모든 것보다 제일 중요하다.
문학에는 언어 자체가 필수불가결하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애독자들이 언어에 깃들어 있는 독특함을, 산문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려면 자신만의 문장과 스타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게 작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작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것은 작가 되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그렇다. 자기만의 문장이 살아있어야만 독자들은 작중 인물이 누구인지 확실히 기억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인물의 동기를 알 수 있을 것이고, 특별한 장면을 생생하게 구성하거나 여러 장면의 미묘한 차이를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그가 소설 속에서 아무리 사소한 역할을 맡은 경우에도 작중 인물 모두에게 입체성과 부피감을 부여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나와는 별개의 주체인 타자로 탄생해서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자아의 주체성이 뚜렷하고 인간의 본성에 충실하며 윤리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치욕스러운 범죄자로 밑바닥까지 타락한 경우에도 인간으로 남는다.

여자의 복잡한 내면 ― 여자의 갑작스러운 두려움, 여자의 비합리적인 변덕, 여자의 본능적인 걱정, 여자의 충동적인 대담함, 여자의 안달과 (거의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미세한 감촉에도 반응하는) 여자의 향기로운 감수성까지 모두 갖춘 여자.
내 소설 속 작중 인물 중에서 어느 여자가 이와 같았을까. 마음 한 구석에 짚이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정말 사랑했다. 그녀가 팜므 파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녀는 밝고 건강했기 때문에 히스테리아 환자는 아니다. 그녀의 눈은 가끔 빛났지만 사악할 만큼 뇌쇄적이지는 않다. 그녀는 사치스럽고 변덕이 심했지만 옷차림새와 행동은 섹시하지 않다. 그녀는 관습과 심리적인 속박에서 해방된 자주적인 여성이었고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현명하다. 소설은 그녀의 그런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데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그녀가 나이가 들면서 살이 찌고 몸집이 불어나고 얼굴이 쭈글쭈글해지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아무리 멋진 작품이라고 해도 대부분의 초고는 정말 형편 없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작가는 그 초고를 잘 다듬어서 보석을 만들어내야 한다. 먼저 문장에서 쓸데 없는 접속사와 부사, 화려한 수식어부터 처내고 주어와 동사만 남겨야 한다. 그리고 문장, 문단을 다시 잘라내야 한다. 눈물을 머금고 핵심만 남기고 자르고 잘라내야 한다. 그렇게 할 비상한 용기가 필요하다.
열 번쯤 백 번쯤 고치고 또 고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至誠이면 感天이다.

어떤 작가가 자기 작품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이 선택한 단어와 단어의 배치, 문장과 문단이 하나하나 빠짐없이 정말 환상적이라고 생각하며 죽는 날까지 자기 작품을 옹호할 수 있을까. 그런 작가도 있을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런 자신감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언제나 자신감이 심하게 부족했다.
나에게는 지금 글쓰기는 생존이 달린 문제는 아니다. 내가 매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읽는 일이다. 읽어야할 책들이 책장에 너무 많이 쌓여 있다. 평생 읽는다 해도 거의 전부 읽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이 1820년대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2백만 권이 넘는 책들이 한 번도 열람 신청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독서에 중독되어 있다. 매일 눈이 짓무르도록 100쪽에서 150쪽을 훑어보는 것처럼 읽는다. 그렇지만 늙은 독자는 슬프다. 이제는 책 읽기에서 젊은 시절에 느꼈던 환희와 황홀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그 내용을 까마득히 잊어버린다.
그래도 매일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엄숙한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을 너무 많이 읽다보면 그 부산물로서 불현 듯 나도 글을 써봐야겠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글을 써야한다는 절박한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불면하는 밤을 보냈고 새벽이 되어 도시가 다시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독서란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면 나는 비록 무분별할 정도로 가리지 않고 이런 저런 책을 읽지만 책에서 무엇을 눈여겨보며 밑줄을 그을까.(나는 그 책을, 그 페이지를 읽었다는 증거로 연필로 열심히 밑줄을 그은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를 흥미롭게 하고 자극하는 것을 찾는다.
어떤 비밀이나 수수께끼.

무명 작가에게 대형 출판사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은 상업주의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유행에 너무 민감하고 시장에 끌려다닌다. 그래서 잘 팔리는 유명 작가와 자기 작가에게만 눈길을 준다.
존 가드너는 말했다. ‘편집자들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려는 유혹에 맞서 필사적으로 싸워야한다. 그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 적어도 얼마 동안은 – 무능하고 제정신이 아니다. 직업상 그들은 너무 많이 읽기 때문에 글이라면 넌더리를 낸 나머지 재능을 알아볼 수 없게 된다. 그 재능이 눈앞에서 춤을 추더라도 말이다.’

…… 정말 괜찮은 책이라는 입소문이 돌게 되면 어떤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 수 있다. 영국의 맨 부커상이 그런 경우이다.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통해 작품의 질을 뉴스거리로 만들고 대중들이 귀를 쫑긋 세우도록 만들자는 것이 맨 부커상의 제정 의도였다. 관력 작품에 관한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 게다가 우리의 장기였던 ‘문학’마저 내 책상 위에 원고가 도착하면 형편없는 저질이길 바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형편 없는 원고는 아무 고민 없이 내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수준급 원고와 맞닥뜨리면 “과연 얼마나 팔릴까?”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솔직한 대답이 “800권 정도”일 수 밖에 없는 편집 회의 장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러면 우리는 근사한 원고를 되돌려 보내는 고통을 감수하거나 적자가 날 게 뻔한 작품을 출간하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다이애나 애실 Diana Athill)

(팔리지도 않을)책을 내는 일은 항상 두렵다. 원고를 마무리했다고 그걸로 끝날 일이 아니다. 아무리 시간과 비용, 노력이 많이 들더라도 그걸 세상에 기어이 내놓아야만 한다는 단단한 확신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복잡한 과정이란 작가를 지치게 만든다.
작가는 훌륭한 편집자가 필요하다. 독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편집자는 독자의 대변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특히 나에게는) 그런 편집자가 없으니 자기 작품을 지켜내기 위해서 스스로 편집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출판된 책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결국 작가에게 있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나는 죽는 날까지 계속 더 많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러면 당연히 누가 사보지도 않을 책을 이 세상에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으니 인터넷에 올려놓아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장편소설「사하라」는 언젠가는 정말 대단한 소설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랜 세월을 견디면서 문학 세미나에서 주제로 등장해서 발표되고 대학에서 연구 논문이 쏟아져 나올 수 있을까.(그러기는커녕 제 갈길을 잃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왜 하필 소설의 제목이 ‘사하라’인가. 아프리카 북쪽의 광대한 사막을 가리키는 지역 명칭에서 따온 것인가. Sahara는 원래 아랍어이고 사막 또는 불모지, 황무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가끔 사막의 색인 다갈색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Sahara는 여러 가지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많은 암시를 품고 있다 할 수 있다. 사막은 신들의 땅이고 순교자의 대지이기 때문이다.
(사막의 침묵과 고독. 오! 저 사막이 나의 안주지였더라면! 모래의 사막-거부된 생명, 거기에는 꿈틀거리는 바람과 더위밖에 없다. 죽음처럼 쓸쓸하고 그리고 달의 죽은 빛에 비치어 눈앞에 전개되어 있는 사막……. 바다같이 길 없는 무한한 사막의 황폐. 기름진 땅보다는 사막에서 신앙은 더 쉽고 깊게 뿌리를 내린다. 사막에는 인간의 사고나 욕망을 끌어당길 자연이나 인공의 사물들이 없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관조를 방해할 것이 전혀 없다. 사막에서 사는 사람들은 신을 두려워한다. 사막은 언제나 텅 빈 것 같고 침묵 뿐이다. 나는 고독을 배웠다. 이렇게 귀한 물, 포르테티엔에는 벌써 10년째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사하라 사막의 모래가 오아시스를 보호하고 있다. 소녀의 마음은 침묵이 보호하고 있다. 사하라는 밤이면 완전히 빛이 사라진 거대한 죽음의 땅이 된다. 그들 육신의 밑바닥 창자 속까지 자리잡고 있는 것은 모래언덕 위를 끊임없이 흘러가는 거대한 침묵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신비였다. 사막의 소녀 랄라의 몸에는 사하라 사막의 뜨거운 태양과 짙푸른 하늘이 새겨져 있다. 그 속에서 깨닫는 사막의 숭고함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자각. 사막의 석가모니를 생각해보자. 그는 여러 해 동안 그곳에서 하늘로 눈을 들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신들조차도 그 지혜와 그 돌의 운명을 두려워했었다.)
주제가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해서 초점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있다. 그러니까(일관되게 flash-back기법으로) 많은 작은 이야기들이 여러 갈래로 뻗어가면서 서사는 토막토막 나뉘어 있어서 온통 뒤엉켜 있다. 그러므로 주제와 이야기 그리고 구성이 다양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인간 삶의 본질적인 심층을 꿰뚫어 보는 내가 항상 추구했던 사회소설인 동시에 철학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소설에는 충분한 깊이와 함께 논리적 일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소설의 모티브와 테마는 다 소진되어서 끝난 것이 아니다. 그 행간에 숨어있는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래서 은연중 또는 공공연히 다른 소설로 에세이로 이어져 반복된다. 작중 인물들은 항상 내 마음속에 살아 있으므로 그들이 그 후 나름대로 어떻게 변모하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매우 궁금한 것이다.
그렇지만, 존 가드너에 의하면,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일단 작품을 끝내고 나면 그것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정지를 모두 확인하고 나면 그들은 그렇게나 많은 시간을 바쳤던 노동의 결과물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하여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에게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단 말인가. 사하라의 주인공 ‘김규현’은 사막의 남쪽에서 죽었지만 그는 끊임없이 부활하면서 내 의식 속에 살아있다. 그는 불사조이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인간의 삶은 강물같아서 끊이지 않고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그 소설은 독자가 읽기에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와 독자간에는 이야기가 친근감이 있어야만 살아있는 관계가 수립될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 독자들에게는 처음보는 너무나 낯선 뜬금없는 소설이 아니겠는가. 너무 복잡해서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독자들이 원하는 것과 달리 당의정을 바른 달콤한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소설을 별로 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 소설을 오독하거나 오해하는 것이 그다지 놀랍지 않다.
독자들이 텍스트가 안고 있는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작가도 모르고 지나쳤던 부분을 독자들이 발견하고 반응할 수 있을까. 해석자들이 제각기 제멋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독자들은 자신만의 관점이 있으므로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거나 오해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나는 짜증스럽다. 독자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으니까.(예술가는 너무 민감해서 누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지나치게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그 책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떠한 징후도 아직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비난이나 경멸의 기미조차 없다. 그건 엄연히 살아있는 작가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내가 이 세상의(고질적인) 무관심에 대해 불평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이 내게 그걸 쓰라고 부탁하지도 않았고, 도대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들은 지푸라기 만큼도 신경쓰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대중소설과 정통 순수 문학소설은 그 한계가 정말 모호할 뿐만 아니라 변별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대중소설은 하급문화이고 순수문학 소설은 고급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동전의 양면과 같은데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지한 문학소설은 지금 거의 소멸하였거나 소멸 중에 있다. 그 대신 웹소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니. 그걸 소설 또는 문학으로 인정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다짐한다. 나는 어떻든 존 가드너가 말한 ‘진지한 소설’을 써야 된다고. 다른 문학 작품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고도의 진지성’이 충만한 소설을 써야 된다고. 내용이 빈약한 ‘너무 사소한 것’은 고백을 위한 고백을 줄줄이 늘어 놓는 일본의 전통 소설 양식인 ‘사소설’을 흉내내는 작가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그래서 내 소설이 사회적 또는 철학적 관점에서 더욱 심오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문학 평론가는 스스로 도저히 작품을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문학을 떠날 수는 없어서 문학 작품에 기생해서 평론가가 되었다. 그들은 너무 주관적이어서 편향성이 강하다. 그래서 뚜렷한 기준도 없이 ‘이 소설’은 반드시 읽어야 할 훌륭한 작품이라고, 또는 전혀 읽을 가치가 없는 쓰레기라고 평한다.

소설에서 특히 팩트를 기반으로 하는 논픽션 소설에서 주석이 필요할까? 어떤 독자들은 주석이 필요 없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내용이 확실한지 여부가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했으므로 꼭 궁금한 독자는 인터넷을 통해서 스스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논픽션 소설에서는 점점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 그것의 진부를 확인할 수 있는 출처를, 더 나아가 원본 자료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게 중요해지고 있다. 작가는 뭔가를 조작, 편집했다는 혐의를 벗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술 논문처럼 상세하게 각주와 괄호, 참고문헌 목록, 부록 등을 덧붙이면 될 것인가. 더욱이 장편소설「광화문 광장」에서처럼 소설의 본문에다 상세한 주석을 덧붙이면서 메타 서사로 쓰면, 신선한 시도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소설에서 각주 또는 본문 안에 괄호를 하고 출처를 밝히는 것은 일반 독자의 책읽기에 심각한 방해가 된다. 읽기의 흐름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책의 마지막에 주석 파트를 두는 것이다. 이 또한 진지한 독자에게는 각주를 보는 것 이상으로 귀찮은 일이 될 수 있기는 하다. 그래도 미주의 경우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각주에 들어가는 내용보다 더욱 상세히 담을 수 있으므로 그게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제일 편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논픽션 소설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는 아직 생소한 것 같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1960년대부터 트루먼 커포티, 톰 울프, 노먼 매일러 등 논픽션 작가들이 출현하였고, 그들의 작품이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러티브 저널리즘 또는 문학적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저널리즘과 맞물리면서 큰 흐름을 타고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논픽션 소설은 역사적 사실 또는 팩트를 기반으로 하면서 소설의 형식을 빌려 관련 인물들을 장면과 무대에 올려놓고 그들이 행동하게 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갈등을 겪게 되며 이윽고 클라이막스에 도달하여 종착역에 이르게 된다.
논픽션 소설이라는 장르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 받는, ‘일가족 살인사건과 수사과정을 다른 진실한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In Cold Blood’를 쓴 커포티는 ‘픽션 소설의 기술을 차용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꼼꼼하게 사실적인 서사 형태’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소설은 팩트와 픽션 또는 픽션과 진실 사이에 놓인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화자의 시각과 관점이 은연 중에 또는 노골적으로 노출된다. 작가는 사실들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관점에서 여과된 사실이고 선택된 사실이다. 그리고 가끔(그래서는 절대로 안되지만) 독자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수정, 왜곡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면서 작가들은 조금더 높은 진실에 다가갈 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조작은 불가피하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작가에게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항상 그게 분출하는데, 아무리 논픽션이라고 하더라도 변용되고 각색되고 편집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가가 논픽션 소설을 쓸 때 작가의 목적이 실제 일어난 사건의 완전한 재현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세세한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더욱이 완전한 재현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가 발언하는 것은 항상 그가 많이 알고 있는 것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친다.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언어란 원래 생략적인 것이고 침묵이 금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이런 논픽션 소설에 해당하는, 논픽션 소설에서 역사적 사실과 소설적 형식을 결합하기 위해서 메타픽션(metafiction)적 방법을 모색하면서-그런데 메타픽션이란 그 개념이 정립된 것이 아니여서 여전히 애매하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것은 연극이 한창 진행 중인 무대위로 극작가가 뛰어 올라와 배우들의 행위를 잠시 중단시키면서까지 이 연극 대본은 자신이 썼음을 외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장편소설「광화문 광장」을 발표하고, 또한 두 편의 중편소설, 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와 관련한 구속 기소와 기나긴 재판 과정, 그 이후 마 교수의 험난한 인생역정에 관한 ‘2019 즐거운 사라’와 유신체제라는 엄혹한 시대에 일어난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내가 존경하는 강신옥 변호사님의 사상 초유의 변론과 관련한 구속 사건에 관한 ‘차라리 피고인이 되고 싶다’를 써서 발표하였다.
우리들이 그들 사건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시대의 에피소드 또는 가십거리로 전락하여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그걸 쓰게 되었다.
나는 내가 입수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모든 자료(주로 공식적인 문서이거나 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당사자들이 쓴 글들)를 모았으나 그러나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취재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겪은 과거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파악하지 못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시간의 풍화 작용에 의해 그들의 기억이 어떻게 변모해 갔는지, 그 사건이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관해 스스로 어떻게 해석을 하고 재해석을 하는지, 짧은 순간 그들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분노와 후회, 슬픔, 안타까움, 용서, 체념 등 숨겨진 감정의 흔적을 살펴보았어야 했다.
(나는 오랫동안 문헌에 의존해서 많은 논문과 법학 전문 책들을 썼으므로 문헌학적 연구방법이 익숙하기는 하다)
문제는 그나마 팩트를 아주 정확히 기술하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작가의 객관적 시각과 관점을 제시하였는지 여부이다. 나는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을 파괴하면서 까지 나의 방식대로 진실을 말해야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혔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발 물러나서 그 사건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그건 중립적 태도와는 다른 것이다)
내 관점이 천편일률적이어서 뻔했는지, 어떤 편향에 사로잡혀 외눈박이 였는지, 선악의 대결로 몰고 가면서 납작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관점에 서지 않으려고, 그래서 냉정하게 객관적인 관점에 서려고 노력했지만 불가피하게 주관적이었고 선택적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 그 소설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 되었다.

‘이젠 너무 늦었다’라는 말은 예술과 삶에서 가장 비극적인 말이다.

누군가는 말했다.
작가가 되는 사람들의 자아 의식은 물처럼 일정한 모양이 없고 정의하기 힘든 경향이 있다고 했다. 여러 가지 성격을 넘나든다는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늙은 선원의 노래(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라는 시로 유명한 사무엘 콜리지는 위대한 예술가의 마음은 양성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기 성을 생각하면 치명적이라는 겁니다. 온전한 여성이나 온전한 남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여성적 남성이거나 남성적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무수히 많은 작가들 중에 누가 과연 과소평가되었을까?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너무 경시당하고 간과된 작가, 더 많이 읽힐 자격이 있는 작가들이 있을까.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혹은 해체주의 시대인 지금에는 결국 모든 소설가가 과소평가되거나 충분히 읽히지 않는다고 본다. 소설은 이야기를 쓰기 때문에 문학 작품 가운데서 가장 지배적인 장르인데도 그렇다. 현실이 소설을 앞지른다.
(잠재적) 독자들은 영화나 TV 드라마, 연극, 게임, 웹툰 등 재미있는 오락거리에 푹 빠져있다. 그러므로 어느 작가가 과소평가 받았다고 말하기보다 진지한 서사적 글쓰기 자체가 현저하게 과소평가되고 있다.
아주 옛날에는 작가라는 말만 들어도 그 작가는 이미 유명인사였다. 작가는 옛날에는 유명인사였지만 보통 그들의 작품과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금 과대평가된 작가가 있을까?
물론 그들의 허접한 작품과는 별개로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된 작가들이 있다. 문제는 자신이 과대평가된 사실을 모르는 채 또는 자신이 쓴 작품이 형편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 그걸 애써 외면한 채 거들먹거리며 대단한 작가인 것처럼, 원로인 것처럼 행세하는 몇몇 작가가 엄연히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자서전 혹은 회고록을 쓰고 독자가 그것을 읽는 행위는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작가는 자기 자신을 소재로 한껏 과장과 미화를 해서 부풀린 이야기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발표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독자는 그 이야기에서 인생과 사회에 관한 어설픈 지식이나 가짜 교훈을 얻고 그것을 나름대로 반성의 계기로 삼으려고 할 수 있다.
자서전을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기만한다. 그것을 집필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슨 비밀을 고백하거나 변명을 하거나 교훈을 전하는 것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코난 도일이 지적했다.
영국인의 자서전치고 정직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문학 형태 중에서 그것은 이 나라의 천재에게 거의 채택된 적이 없었다.
조지 오웰이 말했다.
자서전 작가는 자신의 죄악과 범죄, 사기 행각, 약물 남용, 배신, 방탕, 골반 안장 경련, 음부 경련에 이어 심지어 강간, 살인, 약탈까지 털어놓으면서도 인생의 75퍼센트를 구성하는 굴욕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하이네는 그 유명한 루소의「참회록」을 읽고 나서, 루소는 ‘부분적으로는 특정한 의도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허영심 때문에’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스스로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지 회의적이었다. 자기 기만은 스스로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 그것을 용감하게 적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글을 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결과가 스스로에 대한 가차 없는 사실일 확률만큼이나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말일 확률도 높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문제가 되어 한창 재판 중에 있다.(물론 틀림없이 대필작가가 집필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직접 쓴 게 아니고 대필작가가 후하게 돈을 받고 쓴 회고록이나 자선전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고록은 유명 인사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나 누추한 삶일지라도 자기만의 인생이 있으니까 그걸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나는 지금까지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과장과 미화, 왜곡과 조작, 엉뚱한 거짓말 없이 솔직하게 쓸 자신이 없다면 그걸 쓸 수는 없다. 그건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기망이 아니겠는가. 또한 독자에 대한 사기 행위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정직하게 쓰기로 한다면(증오와 저주, 시련, 좌절감, 극도의 분노가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데) 왜 내가 스스로 낯뜨거운 과거를 까발일 필요가 있겠는가.

작품과 작가를 완전하게 분리시킬 수 있을까.
그들(아마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또는 ‘독자 수용 이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우리는 작가에게 관심이 없었어요. 절대 작가를 보지 않지요. 작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우리가 말하고 다니던 것처럼 텍스트만 고려했어요. 하지만 작가들을 만나 보면 그들의 성품이 작품에 드러난 감성과 비슷해서 흥미로웠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작가와 텍스트는 서로 분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둘의 관계는 정말 중요하다. 작가의 실존적 정체성과 작품은 교차하기 때문에 작가의 삶을 알고 나면 작품을 읽고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확실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저자의 죽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작가보다는 텍스트가 우선이다. 그래서 움베르트 에코는 작가는 소설을 끝낸 뒤에는 죽어야 된다고 항상 말했다. 작가가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출판업자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음 책을 내야 하니까.
다시,「사하라」로 돌아가 보면, 그 소설은 태어날 때 탯줄이 잘린 순간부터 작가와는 단절된 체로 홀로 이 거친 세상에 내 던져졌으니. 하지만 해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텍스트에는 주제와 의미가 과잉이라고 할 만큼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있으니. 독자들은(그 소설이 복잡하고 모호하고 명료하지 않고 의미가 투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거기에 있는 것’을 찾아서 텍스트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과연 사막에 실제 갔다 왔었는지, 몇 번이나 갔다 왔었는지, 거기서 무얼 보았고 무얼 느끼고 생각했는지 등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르한 파묵은 말했다.
독자들은 늘 실험적인 기법에서 약간 어색함을 느낍니다. 그런 반응을 정말 많이 봤어요. 개가 말을 한다고? 이게 뭐야? 난 이 소설이 이해가 안가. 저는 그러한 이의를, 어쩌면 장난을 섞어서, 이의를 과장하면서 가지고 놀아야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밀도 높게 짜인 소설의 경우 처음 읽을 때는 전체 의미의 25퍼센트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든 단어를 대충 넘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주의력과 기억력은 제한적입니다. 또, 어떤 책을 다 읽으면 그 책에 대해 특정한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 다음 두 번째로 읽어 보면, 또는 다른 사람이 지적해 주면 다른 것들도, 다른 이야기들도 있음을 깨닫지요.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말했다. 독자여, 지나친 감상에 빠지거나 카타르시스의 즐거움을 쫓지 말고 더욱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 분위기를 즐기기보다는 이야기를 판단하라

에코는 말했다.
‘타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타인이 필요하니까요. 타인의 시선이, 타인의 인정이 필요합니다. 심지어는 고문하는 사람도 고문당하는 사람의 존경이나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학적인 행위를 즐길 수 없지요. 타인의 인정을 바라는 이 심오한 욕구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존중받고 싶은 부분에 있어서 타인도 존중하도록 끌립니다. 이것이 모든 윤리학의 본질적인 핵심입니다.

진정한 작가는 진정한 독자를 위해서 쓴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을까. 작가가 힘들게 썼으니 독자도 힘들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을까. 독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만큼 따분하고 느린 도입부를 감내할 수 있을까. 독자들이 작품을 읽고 또 읽지만 심연과도 같은 그 밑바닥까지 닿는 일이 가능할까. 작가는 비평가도 아닌 일반 독자에게 ‘문학의 문법’에 대한 이해력, 다시말하면 문학의 구조와 의미를 파악하는데 필요한 이해력을 요구할 수 있을까. 독자 역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려면 대가를 치러야할까.

화자(narrater)와 작가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화자가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화자는 작가의 일부 또는 대리인이 아닐까.

몽테뉴가 말한 것처럼, (성실한) 작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을 자신의 책 속에서는 하는 법이다. 읽기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맺어진 신사협정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신뢰하고, 상대방에게 기대하고, 자기 자신에게 요구하는 만큼 상대방에게도 요구한다. 서로 주고 받는다.
왜 작가가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으려고’, ‘독자의 호감을 얻고 멋있어 보이려고’ 아첨할 필요가 있을까. 이건 상업주의와는 관계없는 것이다. 작가는 메시지를 발신해야하고 그걸 제대로 수신하는 일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도 자기의 역할이 있고 그걸 충실히 이행해야만 한다. 작가를 비판하기 전에 자신이 끝까지 성실하게 읽어보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책은 이해될 때 비로소 그 진수가 드러나는 법이다.

에코가 말한 모범 독자란 누구인가.
진지한 작가는 기존의 독자를 보지 않습니다. 독자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지요. 모범 독자가 되는 법은 책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을 통해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고 마지막 장에 도달한 독자는 그 책의 모범 독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세르반테스가 말한 모범소설(Novelas ejemplares)과 모범독자는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모범소설이란 1613년 세르반테스가 펴낸 열두 편의 중 · 단편 모음집이다. 작가는 유익한 교훈과 달콤하고 보람 있는 결실을 독자들에게 준다는 의미에서 ‘모범’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작성일:2019-04-27 11:44:47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