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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차라리 피고인이 되고 싶다 (下)

닉네임
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9-02-27 14:40:23
조회수
813
6. 공소 사실

피고인 강신옥은 원적지에서 망부 강태흥의 5남으로 출생하여 영주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6. 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58. 9. 경 고등고시 제10회 행정과에 합격하고 동년 11월 경 육군에 입대하여 1959. 9. 제1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1960. 4. 경 제대, 동년 9월 경 동 대학에 복학하여 1961. 9. 경 동 대학을 졸업과 동시 서울지방법원 사법관 10호로 발령을 받고 동 과정을 이수한 후 1962. 12. 경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1964. 9. 경 동직을 의원 사직하고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다가 1965. 6. 경 미 국무성 장학금으로 미국 예일대학 법과대학을 거쳐 조지 워싱턴 대학원에서 비교법학을 전공하여 동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수여받고 1967. 9. 경 귀국하여 서울 중구 무교동 11번지에서 변호사업에 종사하여 오고 있던 중 1974. 6. 초순경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학 교수 백낙청으로부터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 피고사건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구속 기소된 공소에 김영일의 변호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착수금 10만원으로 동인에 대한 변호를 수임하고, 동 년 6. 13. 경 한국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으로부터 같은 피고 사건으로 같은 군법회의에 구속 기소된 동 나병식, 동 정문하, 동 황인성, 동 안재웅, 동 이직형, 동 정상복, 동 나상기, 동 서경석, 동 이광일 등 9명에 대한 변호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착수금으로 도합금 50만원을 받아 동인 등에 대한 변호를 수임하고 그들에 대한 변호를 위하여 동 군법회의 법정에 출입하던 중 동 군법회의로부터 같은 피고사건 관련 피고인 중 고등학교 후배인 여정남이가, 변호인을 선임하고 있지 않으므로, 동인에 대한 국선변호인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수락함으로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에 관련되어 동 군법회의에 구속 기소된 11명에 대한 변호를 수임한 자로서,
변천무쌍한 국제정세하에 북괴는 재침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적화통일을 위하여 광분하고 있는 이때 국가의 보위와 민주수호를 위하여 전 국민의 총화 단결이 요구되므로 국민의 정당한 의사에 기초를 둔 유신헌법으로서 평화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국민 총화를 저해하며 국론의 분열을 조장하고 유신체재를 부정하는 경거망동을 발본 색원하고 국가의 기본 질서와 안전보장을 위해서 헌법 제53조에 의하여 대통령 긴급조치가 선포되었는 바, 소수의 일부 불순학생들이 반 국가단체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구성하여 북괴의 사주를 받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과 연립전선을 형성하여 인민 민주주의 혁명의 노선에 의한 통일 전선 형성 공작에 따라 폭력혁명에 의한 공산주의 정권수립을 획책 한, 건국 초유의 대역 기도를 1974. 4. 3.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에 의해 사전 예방되어 동 연맹을 구성하거나 그 구성을 사주한 자들이 일망 타진되어 백척간두에서 조국이 수호되었음에도, 유신헌법은 1인 독재체재를 형성하여 장기집권을 위한 악법이며 대통령긴급조치는 정권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망상 오신하여 오던 중, 전시와 같이 동 연맹의 구성원들에 대한 변호를 수임하게 되자 동 군법의 법정에서 변호인의 변론을 하게됨을 기화로, 평소에 악법이라고 생각하던 긴급조치들을 반대 비방할 것을 결의하고, 동 군법회의 재판을 위협할 목적으로 1974. 7. 9 17:20경 동 군법회의 법정에서 변호를 담당한 동 연맹의 전시 구성원들에 대한 변론을 함에 있어서 ‘이러한 사건에 관계할 때마다 법률 공부한 것이 후회가 되는데 그 이유는 본 변호인이 학교에 다닐 적에 법이 권력의 시녀, 정치의 시녀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이번 학생들 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법은 정치의 시녀, 권력의 시녀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지금 검찰관들은 나라일을 걱정하는 애국학생들을 내란죄니,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을 걸어 빨갱이로 몰아치고,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으니, 이는 법을 악용하여 저지르는 사법살인 행위라 아니할 수 없고, 본 변호인은 기성세대이기 때문에, 그리고 직업상 이 자리에서 변호를 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피고인들과 같이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다. 악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으며 악법과 정당하지 못한 법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고 투쟁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학생들은 악법에 저항하여 일어난 것이며 이러한 애국학생들인 피고인들에게 그 악법을 적용하여 다루는 것은 역사적으로 후일에 문제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나치스 정권하에 한 부부가 있었는데, 처가 남편과 이혼할 목적으로 남편이 나치스에게 저항하는 욕을 했다고 해서 나치스 당국에 고발하여 형을 살게 되었는데, 나치스 정권이 무너진 후, 남편이 풀려나와 악법하에서 자기를 고발하였던 처를 고발하여, 처에게 처벌을 받게 한 사실이 있으며 또한 러시아인이 당시 러시아는 후진국이라고 말을 한 마디 한 관계로, 러시아 황제로부터 엄중한 처벌을 받은 바 있다. 오적시를 쓴 김영일 피고인은 민족시인으로서 훌륭한 시인이며 본 변호인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훌륭한 시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발설함으로써 대통령 긴급조치 제1, 4호를 비방하는 한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함과 동시에 위 법정을 모욕한 것이다.


7. 1974년 8월 30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제3심판부
사건: 74비보군형공 제59호 대통령긴급조치위반, 법정모욕
피고인: 강신옥 변호사
검찰관: 소령 이근일
변호인: 변호사 이병린 외 99명

주문
피고인을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에 처한다. 이 판결 선고 전 구금일수 중 50일을 위 징역형에 산입한다.
압수된 변론초안문 3매는 피고인으로부터 이를 몰수한다.

재판장:  육군중장 류병현
심판관: 육군소장 강신탁
심판관: 판사 신정철
심판관: 판사 송병철
법무사: 육군중령 황종태

“같이 좀 가시죠.”
두 사람은 법정 바로 옆방으로 끌려갔다.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앙정보부 제6국 소속 간부인 듯한 사내 두 명이 화난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강신옥을 맡은 사내는 조금 전 변론 내용을 확인하면서 그런 변론을 한 의도를 물었다. 강신옥은 흡사 구토를 하듯 어제부터 가슴속에서 일렁이고 있던 것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군사법정의 소송절차 중 어떤 부분이 형사소송법과 군법회의법에 위반되고 있는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그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변론 내용을 다시 진술케 하여 그것만을 자세하게 적었다.
밤 8시쯤 일단 조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
정신이 아뜩해지면서 참으로 긴 하루를 보냈구나 싶었다. 군사법정에서 오랏줄에 엮이고 수갑을 찬 학생들을 바라볼 때마다 느꼈던 그런 가슴 저림이 이젠 낭패감과 뒤섞이면서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지만 강신옥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1시쯤이었을까. 비몽사몽간에 그는 대문 두들기는 요란한 소리에 잠을 깼다. 저녁 내내 그를 옥죄고 있던 불안감의 실체는 역시 그들,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 잠깐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침착하려고 마음을 다지며, 새파랗게 겁에 질린 아내의 등을 두드려주고 강신옥은 그들을 따라나섰다. 밤 기운이 전신을 감싸자 그는 비로소 섬뜩함과 함께 머릿속이 하얗게 변색되고 있음을 느꼈다.
행선지는 남산이었다. 평소 낭만으로 바라봤던 남산에 그토록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가 있었는가 싶도록 그곳은 입구부터 살벌했다. 검은 산등성이 아래 창백한 불빛과 어둠이 구획해내는 위협적인 건물의 윤곽에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이 세상의 온갖 강압과 공포가 다 서려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실의 어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수사관이 야전침대 받침대를 빼내 들고 강신옥을 다짜고짜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그 몽둥이 찜질을 고스란히 맞았다. 이미 체념을 하고 있었지만 육체적인 고통이 야기하는 정신적 위축감을 견뎌내기는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얼마나 맞았을까.
“이게 무슨 짓이야.”
문이 덜컹 열리면서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한 순간 방안에는 진공 상태처럼 모든 동작과 음향이 정지된 듯 했다.
“누가 사람을 때리라고 했나?”
고함은 어느새 점잖고 차분한 목소리가 되어 몽둥이를 든 청년을 타이르고 있었다.
“나가 있어.”
청년이 밖으로 나가자 사내는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강신옥을 일으켜 세웠다.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부장님 명령으로 몇 가지 조사할 게 있어서 모시고 오랬더니 애들이 지레 짐작으로 이런 무례를 범했군요. 용서하십시오.
경상도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입니다. 어찌 배신감을 안 느낄 수 있겠습니까.”
사내는 뻔한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늘어놓고 있었다. 어쨌든 몽둥이를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에 강신옥은 고개를 들고 상대편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과장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날부터 사흘동안 강신옥은 정식으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홍성우도 같은 경로로 끌려와서 비슷한 신세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의 추궁은 ‘긴급조치에 위반한 학생들과 민청학련이란 이적단체에 동조했으니 그 변론 행위는 역시 긴급조치에 위반된다’는 것이었고, ‘군법회의를 모욕했으니 법정모욕죄가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아직 민청학련이란 실체와 학생들의 행동에 대하여 법적 판단이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들을 변론한 행위가 긴급조치 위반이란 말인가?’ 강신옥은 처음에는 이들을 이론적으로 설득해보려고 시도를 했으나 결국 체념을 하고 말았다. 쇠귀에 경 읽기 식인데다 위의 지시를 받고 그 틀에 끼워 넣기 위해 행하는 수작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6국은 조사를 마치더니 처음에는 그냥 풀어주었다. 하지만 조사가 끝나고 사흘 만에 석방된 강신옥은 1974년 7월 15일 오후 4시경 무교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다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후 바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죄명은 법정모욕죄와 긴급조치 제4호 위반이었다.
그는 변론을 맡은 사건 관계자들을 만나러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수사관원들에게 끌려갔다. 당시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었는데, 때마침 손에 그 당시 싱가포르 수상인 이광요의 전기를 들고 있었다. 독재정권과 부단히 싸워온 그의 생애에 워낙 매료되었던 탓에 재독하던 중이었는데 수사관들에 두 팔을 잡히는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갖고 끌려갔다간 또 무슨 빌미를 잡힐까 걱정돼서였다. 그래서 약속한 사람들에게 못 간다는 전화나 하고 가자고 사정해 간신히 사무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는데, 실상은 책을 놓고 가기 위한 핑계였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그 후 7개월간 서대문구치소에서 지냈다. 구치소에 들어가는 순간, 뭔가가 치밀어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특히 그가 변론하던 학생들을 안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들도 강 변호사를 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뭐라고 할까. 연대감 또는 현실에 대한 비통함 같은 것을 그 순간 다같이 느꼈기 때문이라고 할까…….
안에서는 주로 책을 읽으며 소일을 했다.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같은 고전들을 원문으로 읽으며 지냈는데, 감옥생활을 경험한 이들은 누구나 느끼는 기분이겠지만 마치 성인이라도 된 듯 편안했다. 그래서 석방된 후, NCC에서 마련한 축하 모임에 나가서 ‘도덕사우나’에 가서 세속의 때 벗기고 잘 지내다 왔다고 하니 모두가 웃었다.
강신옥은 8월 22일 법원에 기소되었다. 그리고 1974년 8월 30일 오후 3시 제1회 공판이 육군본부 법정에서 개정되었다.
동료 변호사들이 1심때엔 99명의 변호인단을 짜 변론을 해주었고, 2심 때에는 1백25명으로 늘어나 많은 정신적 도움을 주었다. 또 앰네스티같은 국제인권단체들도 석방을 위해 힘써주었다.
그 당시 법정은 변호사들이 완전히 주도했다. 검사는 기라성 같은 선배 법조인들 앞에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법조 원로들이 주로 나서서 변론을 했다. 그 사건은 변론할 명분이 충분했다. 변호사가 변론하다가 법정에서 구속됬으니까. 그래서 김제형, 고재호와 같은 재야 법조계의 최고 변호사들이 나서서 변론을 한 것이다.
제1회 공판기일에서 인정신문이 있은 뒤 고재호 변호사가 모두진술과 함께 “변호인의 활동은 헌법 해석상 당연히 면책될 뿐만 아니라, 군법회의법 28조 소정의 면책조항에 비추어 본안 심리에 앞서 공소기각이 되어야한다”며 공소기각 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 신청은 즉각 기각이 되었고 심리에 들어가 검찰관의 신문과 박승서 변호사와 김동환 변호사의 반대신문이 끝난 후 강신옥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형사 변호인은 수임사건의 범죄사실이 아무리 흉악한 것이라도 변호할 의무와 권리를 갖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변호사 헤스팅의 말과 같이 ‘변호사는 마치 택시운전사와 같습니다. 차비를 거절할 수도 없고 자기 피고인이 과연 무관한지, 죄인인지, 거짓말쟁이인지, 진실한 것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다만 변호를 맡은 피고인의 주장 범위 내에서 자신의 능력의 최선을 다하여 피고인을 위해 투쟁할 뿐인 것’입니다.”
강신옥은 당시의 변론 경위와 심정, 변호인의 책무, 저항권 이론에 대한 신념, 변론 활동의 면책성에 관한 소신을 밝혔다.
증거조사를 위하여 속행된 9월 2일 오후 공판기일에서는 변호사 김제형이 증거인부와 함께 이 사건 변론 당시 법무사였던 김영범 육군중령 등 증인 3명과 민청학련 사건기록 검증 등 증거신청을 했다. 그러나 법무사는 이 신청을 기각하고 검찰측 증인을 재정증인으로 신문한 후 바로 결심을 했다.
검찰은 강신옥에게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구형했다.
이병린, 박승서, 이재성, 조준희 순으로 변호인들은 약 3시간에 걸친 변론을 통해 “군법회의법 제28조 제2항은 변호인의 변호 행위의 절대적 면책특권을 규정한 것인데 이 사건 변론 내용은 변호인이 직무상 행한 변호 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되며, 또한 이 사건 공소장의 공소사실이 어느 부분이 누구에 대하여 어떤 방법으로 모욕 행위를 하였는가를 구분하여 지적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법정모욕 부분에 대하여는 범죄가 되는 사실이 포함되지 아니한 것으로서 결정으로 공소를 기각하여야 하며 공소사실 전체도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상 방식에 위반하여 무효인 것으로 공소를 기각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변호인단은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호 활동을 하다가 문제된 이 사건은 우리 나라는 물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상 유례가 없는 중대한 사건임을 강조하고 공소사실이 일부 변호사의 변론 내용을 사실과 다르게 왜곡시키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변호인의 직무와 면책성, 자연법적 저항권 이론 등에 관한 진술을 했다.
강신옥은 최후 진술에서, “인간의 역사에 비추어 인간의 오류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인간의 지혜로 재판 제도가 마련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당사자주의를 취하고 있는 재판 제도 아래에서 한쪽 당사자가 자유롭지 않다면 재판 그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고, 자신은 전인격과 양심에 비추어 마지막 변론의 기회에 그 책무를 다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9월 4일 선고공판.
심판관은 강신옥에게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8. 14년 만에 무죄판결

1975년 2월 15일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 석방 발표가 있었고 강신옥 변호사는 이틀 뒤 다른 구속자 148명과 함께 구속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그런데 다시 1976년 6월 법무부에서 ‘긴급조치를 위반하여 변호사법 14조 소정의 변호사의 품위를 손상했다’며 강신옥을 변호사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고 징계 개시 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대법원 판결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징계 절차가 정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이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그는 14년간 변호사 업무를 계속할 수 있었다.
강신옥 변호사가 말했다.
1976년 6월에 다시 사무실을 열긴 했으나 본격적으로 시국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총소리가 울린 10·26 사건 이후이다. 김재규 재판의 변론을 맡으면서부터인데, 김재규를 살려내야 유신잔재를 척결하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변론과 동시에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비록 5·17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무산되긴 했으나 당시 재야를 위시한 국민의 열기는 대단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쿠테타 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국회를 폐쇄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해 정치활동 금지, 휴교령, 언론 검열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 다음 날인 5월 18일 역사적인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흘 후인 5월 20일 오전 10시 정각,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대법원 판사들은 김재규 사형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로 나는 또다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돼 죄인 취급을 받으며 보름간 조사를 받아야 했는데, 예전에 갔을 때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심하게 조사를 받았다. 죄목인즉 김재규 변론을 맡으면서 고 박정희 씨의 사생활을 파헤쳐 명예를 훼손시키고, 구명운동을 전개해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는데, 굳이 나를 구속해 문제를 확산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선지 풀어주었다.
강신옥의 법정모욕과 긴급조치 위반 사건은 당초 대법원 형사1부로 배당되었는데 빨리 결론을 내라는 정부 당국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사건기록을 캐비넷 속에 처박아둔 채로 판결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0년 후인 1985년 1월 29일에서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결론을 내렸다.(재판장 유태흥 대법원장, 주심 전상석 대법원 판사)
대법원 판결은 비상고등군법회의의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하였다.
그 파기사유 및 군법회의가 아닌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한 이유에 대하여는, “1972년 12월 27일 제정된 구 헌법에 따라 이루어진 긴급조치는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의 제정 공포에 따라 실효되었고, 구 헌법 제53조의 대통령 긴급조치권은 제5공화국의 국가이념이나 그 헌법정신에 위배됨이 명백하여 제5공화국 헌법 부칙 제9조에 규정된 그 계속 효 또는 잠정 효는 부인될 수밖에 없으며, 구 헌법에 따른 긴급조치가 실효된 이상 피고인은 면소의 판결을 받아야 할 뿐만아니라 군법의 피적용자도 아니고 현재 비상계엄 상태에 있지도 아니하므로 이 사건 재판 관할권은 일반 법원에 있다”라고 판시하였다.
결국, 위와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서울고등법원이 1988년 3월 4일 강신옥 변호사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선고하기에 이른 것이다. (서울고등법원 제1항소부, 재판장 최공웅, 임승균, 손평업 판사)
재판부는 그 판결이유에서 법정모욕죄 부분에 관하여 “공정한 재판을 구하는 변호인의 변론 행위는 비록 변호사의 정당한 변호권의 범위를 일탈할지라도 명백하게 재판을 위협, 방해하기 위한 것임이 뚜렷한 고도의 모욕, 소동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한 법정모욕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라고 전제한 다음, “피고인이 이 사건 공소 내용과 같은 변론을 할 당시의 구체적 상황에 비추어 피고인이 재판을 위협하거나 방해할 목적으로 그와 같은 내용의 변론을 하였다고 볼 아무런 자료가 없다”고 판시하였다.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부분에 관하여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내용과 같이 긴급조치가 1980년 10월 27일 실효되어 형이 폐지되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면소 판결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상상적 경합범으로 기소된 법정모욕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므로 이를 주문에서 별도로 내세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편, 서울고등법원 제1형사부는 1988년 7월 15일 강 변호사가 무죄 확정 후 신청한 형사보상청구 사건에서 1974년 7월 15일부터 218일간에 걸친 미결구금에 대한 보상으로 국가는 금 327만 원을 지급하도록 결정했다.

강신옥 변호사가 말했다.
특별히 큰일을 해냈다든가 자랑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이번 일로 보람을 느끼는 것이 있다면 앞으로 후배나 동료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소신껏 변론을 펼 수 있는 선례를 남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번 판결로 인해 다시는 변론내용을 이유로 변호인을 구속할 수 없으리라고 믿는다.
법정에서의 변론이 문제가 되어 변호사가 구속된 것은 우리 사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세계적으로 그 유래가 없었다.


에필로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1년 당시 민청학련 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그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을 상대로 진상 조사를 하였다. 조사 초기에 상당수 수사관들은 “이 사건은 재판을 통해 결론이 난 사건인데 무슨 일로 조사를 한다는 것이냐”며 응하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자신은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며 발뺌하는 수사관들도 있었다. 일부 수사관은 “나는 가해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피해자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고 호소하며 조사를 피하려 했다. 대부분 수사관은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기보다는 망각의 늪 속에 영원히 묻혀 있기를 바랐다.
수사관들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다. 즐기려는 마음에서 사람을 고문하는 사람은 드물다. 죄 없는 자를 식별하지 못하는 수사관도 드물다. 그래도 고문을 한 사람들은 일말의 양심 때문이 아니라 뒷일이 걱정되어서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꽤 신경을 쓴다. 그러나 어찌 대명천지에서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상했던 일이지만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자 대부분의 수사관들은 고문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조사를 받을 수 없다고 고함을 지르며 거품을 무는 사람, “정권이 바뀌면 당신부터 조사하겠다”고 협박하는 사람, “세상이 뒤집혔다. 빨갱이들에게 무슨 인권이 있느냐. 완전히 빨갱이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사람 등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조사관의 첫 질문은 대개 “왜 고문을 하셨습니까. 이제 연세가 들고 나서 돌이켜 보면 후회가 되시죠”였다. 그 당시와 같은 상황이라면 지금 조사하고 있는 나라도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위와 같은 질문의 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무리 수사관들 스스로 고문 사실에 대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어쩌다 비위가 상하면 한 번쯤은 조사관과 맞붙어볼 요량으로 가슴 한 구석에 전의를 간직하고 있게 마련이다.
사실 조사관들은 그들을 조사하기 전에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왜 고문을 했는가에 대하여 상당 정도를 파악하고 있었고 조사를 받으러 오는 수사관들도 반쯤은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자백의 선두 주자일 수는 없다는 생각 그리고 위원회에서 자신이 한 진술이 외부에 공개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추정 때문에 고문을 시인하지 못하는 수사관도 있었고,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즉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고문을 차마 인정할 용기가 없어서 자백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 수사관들은 “이 사건의 현장 수사지휘 책임자이던 중정의 윤○○로부터 ‘물건(조직사건)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사건 조사가 마무리에 접어드는 시점에 윤○○가 세칭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료를 열심히 들여다보더니 느닷없이 이 사건을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직 사건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잔혹한 고문을 직접 했던 수사관들을 제외하고는 위와 같은 구체적 진술 앞에서 동료 수사관들의 고문 사실과 이유를 털어놓는 수사관이 나왔다. 그뿐 아니라, 고문한 수사관들조차도 이 사건이 중정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세칭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검찰과 중정은 먼저 가상의 사실을 유포한 후 인혁당 재건위를 만들어 냈다. 중정 요원들의 냉소적인 표현을 빌리면 ‘제품을 만들기도 전에 광고 컨셉을 기획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증거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이 기획한 제품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였다. 중정에서 사용한 ‘제품’의 제조기술은 다름 아닌 고문이었다.
피의자신문조서에는 조사 일시뿐만 아니라 장소도 허위로 기재되어 있었다. 국방부로부터 제출받은 공판기록을 분석하면, 이 사건 피의자들을 조사한 장소는 대부분 서울구치소, 서울 중부경찰서로 되어있다. 이 기록 역시 허위이다. 수사관들은 몇몇 조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조서가 중앙정보부 제6국에서 진행됐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를 부인하는 수사관은 한 사람도 없다. 특히 한 수사관은 “중정 간부로 수사를 현장지휘했던 윤○○이 경찰에서 파견나온 수사관들에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모두 경찰이 조사한 것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조사 장소를 허위로 작성하게 한 이유 역시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1964년의 제1차 인혁당 사건으로 망신을 당한 중정 수사관들이, 10년이 지난 후 또다시 이 사건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만들려는 상부 방침에 ‘무리한 수사’라고 심하게 반발하며 조서에 이름 남기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퇴직한 한 중정 수사관은 “중정에서 수사관들이 상부 지시에 이렇게 반발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했다. “사흘 매에 견디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만 세 시간을 견디는 사람도 본 기억이 없다. 증거고 뭐고 소용없다. 일단 공산주의자로 도장을 박아놓으면 확실한 면죄부를 손에 쥔 것이다. 누구 하나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 사건으로 피의자들은 고문으로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진 상태에서도 마지막으로 재판부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재판은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됐고 검찰은 물론 재판관들도 피고의 발언을 수시로 제지했다. 이 사건 피고인이었던 임구호 씨의 경우 재판관의 제지를 무시한 채 최후진술을 통해 “증거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직후에 검찰관실로 불려가 문호철, 이규명 검사 등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더욱더 충격적인 사실은 공판조서 또한 허위로 작성됐다는 사실이다. 공판조서에는 이 사건 피고인들이 수사과정에 당한 고문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항변하지 않았고, 검찰에서 작성한 조서의 임의성을 인정한 것으로 돼 있으며, 지하 비밀당을 만들어서 국가를 변란시키고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공소내용을 시인한 것으로 돼 있다.
이렇게 허위로 작성된 조서와 공판조서를 바탕으로 여덟 명은 사형을 당했고 나머지 피고인들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20년형을 선고받았다. 특히 사형은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날인 1975년 4월 9일 새벽에 집행되었다. 사형집행은 확정 판결 후에도 상당 시간 (보통 1~7년)이 경과한 다음에 집행되거나 혹은 감형조치되던 관례는 이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가해는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사형장에서 ‘적화통일 만세’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등의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사형장면을 목격했던 교도관들과 군종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와 같은 유언 역시 조작된 것이다. 당시 교도관 김○○, 안○○, 이○○에 의하면 도예종 씨는 “통일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한마디를 남겼으며 그 외에도 ‘적화통일’이란 표현은 사용한 사람이 없다.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말 역시 듣지 못했다는 것. 당시 사형집행 명령부를 작성했던 교도관 이○○ 역시 자신이 기록한 유언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유가족들은 사형이 집행된 후 사체조차 뜻대로 수습할 수 없었다. 일부 사체는 경찰이 경계하는 가운데 응암동 성당으로 옮기려는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바로 대구로 옮겨졌고, 송상진 씨의 경우에는 경찰들이 사체를 탈취한 뒤 가족의 동의 없이 화장한 후에 유골을 인계했다. (시체에는 발뒤꿈치가 사라지고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힌 고문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유가족들은 ‘빨갱이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사회에서 격리됐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고 어린 자식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놀림을 들으며 동네아이들의 전쟁놀이에서 나무에 묶인 채 수도 없이 총살을 당해야 했다. 이제야 이들의 무고함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하지만, 지난 세월 유신의 광기와 반공의 망령에 저당잡힌 인생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인물들
지금 되돌아 보면, 군사독재정권의 충복으로 입신 출세해서 惡의 편에 섰던 인물들과 자신의 양심과 의지에 따라 온갖 고통과 불행을 무릎섰던 善의 편에 선 인물들이 선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인물들은 명확하게 갈린다.
한쪽은 법기술자로 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 복무했다. (스탈린 치하에 살았던 유명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독재자를 가리켜 ‘백정이고 강도’라고 하였고 그의 심복들은 ‘백정이나 강도의 졸개’가 된다고 하였다.)
‘법과 양심’ 또는 ‘정의’는 어디로 실종되었는가.
그들은 큰 권력으로부터 흘러나온 작은 권력을 휘두르면서 거기에 도취되었고, 관존민비라는 유구한 전통 속에서 입신출세하기 위해 법률가의 양심이 인격이 파탄날 정도로 마비되어도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 했다. 그들은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고문을 하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 그래도 그들의 정신 수준은 죄책감을 느낄 수 없었다.
다른 한쪽은 극히 소수였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인 위대한 양심과 정의감 때문에 국가라는 거악에 맞서 외롭게 투쟁했고 마침내 승리했다. 정의가 불의를 누르고 승리한 것이다. 그들은 당연한 일을 했다고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유치하게 그 승리감에 도취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한승헌 변호사님
1934년,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났다. 전북대 법정대학을 나왔다. 1957년 제8회 고등고시사법과에 합격한 후 군법무관을 거쳐 법무부 검찰국, 서울지검 등에서 검사로 근무했다. 1965년 변호사로 전신하여 작가 남정현의 ‘분지’필화 사건,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여러 정치적 탄압 사건을 변호하는 한편,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이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 등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75년, 2년 반 전에 쓴 ‘어떤 조사弔辭’라는 수필 내용이 용공이라는 누명을 쓰고 반공법 위반으로 그는 전격 구속 기소되었다.(이 사건에 관해 상세한 것은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제3권 참조) 그해 4월 서대문구치소에 구속되어있었는데 함께 구속되어있었던 그가 변호했던 여정남은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과 함께 4월 9일 새벽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홍성우 변호사님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해군 법무관을 마치고 1965년부터 6년 동안 판사를 역임했다. 1971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론에 투신, 20여 년에 걸쳐 학생, 노동자, 민주인사, 조작간첩사건 등의 변론에 힘을 쏟았다.
이외에도 민주회복국민회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앰네스티,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 등에서 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했다. 정법회 결성에 앞장섰으며 1987년을 전후하여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대한변협 인권위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표, 참여연대 초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그가 말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받은 사람이 수십 명이지만, 이 때 잡히지 않고 구속되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이 공소장에 “공소 외” 누구누구 이름만 나온 게 100명도 넘을 겁니다. 그 후에 그 친구들이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 때 도망 못가고 잡혔으면 조영래도 피고인석 맨 앞줄에 나올 인물이지요. 이때부터 도망가서 1980년도에 자수한 겁니다. 오랫동안 도망 다니면서 그 동안 장가도 들고 애도 낳고 했지요. 김근태나 장기표도 그 때 다 도망갔어요. 그 후에 조영래, 김근태, 장기표는 산발적으로 사건 만들고 기소되어 관련 재판이 이루어진 게 여러 건이에요.

민청학련에 빨갱이 색깔을 입혀야 했는데, 그 때 잡힌 학생들은 일반국민들이 잘 모르니까 어려울 것이고요. 그래서 과거 사건에서 빨갱이로 낙인찍힌 이름 있는 사람들을 연결시키면, ‘아! 민청학련은 그런 빨갱이 뭐와 한통속인 모양이다’ 이런 연상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아닐까요.

아주 한여름에요. 그 때 변론하면서 흥분은 되고 화는 나고 그래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했어요. 법정에서는 양복도 못 벗잖아요. 옷 저고리에 땀이 줄줄 흐르면서 재판하던 생각이 나데요. 그러다가 강신옥 변호사가 변론하다가 험한 꼴도 당하고….

내가 한 2,30분 했을 거예요 변론을. 그 다음 황인철이 했어요. 황인철은 나와 평생 친구지만 묘한 재주가 있습니다. 얘기하는 건 과격한데 듣는 사람에게는 전혀 과격하게 들리지 않아요. 목소리도 낮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성량 자체도 잘 안들리고 표정도 부드럽고. 목소리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어투가 술술 부드럽게 하기 때문에 듣기에 거슬리지 않아요.
나는 싸우는 것 같이 덤비고. 손해는 내가 보지요. 매도 내가 먼저 맞고 그러는데.

나는 인간적으로 강 변호사 참 좋아하고 지금도 가끔 만납니다. 대체로는 보수적, 혹은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인 셈인데, 강 변호사의 보수주의적 입장에서도 이 재판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지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는 사람에게 유신정권의 행태라는 게 어쩌면 더 참을 수 없는 거였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더 격렬하게 비판을 한 겁니다.

피고인 중에서 진짜 죽음의 위험 속에 가장 놓여 있었던 게 이철하고 여정남이었습니다. 우리는 제일 위험하다고 느꼈지요.
강 변호사님은 여정남을 변론했으니까. 여정남은 민청학련보다 사형의 위험성이 더 컸을 것이고, 그 때문에 강 변호사님은 더욱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강력한 경고성의 비유를 쏟아내니, 재판부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느낌으로 제지했을 것 같고요. 더욱이 ‘사법살인’이란 말은, 이 재판에서 강 변호사님이 처음으로 쓴 용어 같은데, 실제로 사법살인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은 별개로 재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건이 다릅니다. 나는 그래서 도예종이나 서도원이나, 이 사람들 얼굴을 모릅니다. 민청학련 사람과 인혁당 사람들 사이도 서로 몰라요. 나는 인혁당 법정에는 안 들어 갔어요. 다만 여정남이는 민청학련에도 이름이 올라 있으니까. 여정남만 양쪽 재판정에 다 섰지요. 내가 본 건 여정남뿐이지요.

정보부에 붙들여 가면 담당 계장은 지휘를 하고 계장 밑에 수사관이 있고, 수사관이 나를 조사를 합니다. 신문을 해서 조서를 썼는데, 수사관이 다른 방에 지시받으러 가고, 나는 잠시 숨 돌리고 그럴 때 있잖아요. 그럴 때 방에 날 혼자두지 않습니다. 절대 혼자 놔두질 않아요. 무슨 자해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수사보조원이 하나 있어요. 수사관이 나갈 때는 그 보조가 옆에서 나를 지킵니다.
둘이만 앉아 있으면 대화를 하게 되죠. 이런 저런 대화를 하던 중에 이 사람이 나한테 잘해줘요. 마음으로 잘해주는 건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어떻게든지 가능하면 날 편하게 위로해주고 안심시켜 주려고 그러고요. 이 사람 얘기하는 게, 참 빨리 잘되어 나가게 됐으면 좋겠다. 이런 취지의 얘기를 해요. 난 그 때까지만 해도 속에 좀 삐딱한 게 있었지요. “당신도 내가 나가는 걸 바라느냐” 그랬더니 “아니 변호사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냐”고 하더군요. 자기는 사람 아니냐 그거지요. 그 때 정색을 하면서 “사실은 제 형님이 최종길 교수입니다” 그러더라고요.

1975년 소위 2·15조치 때 이철을 비롯한 학생들은 나왔고, 김지하도 나왔고, 지학순 주교도 나왔고요. 강신옥 변호사도 석방되었습니다. 못 나온 게 유인태, 이현배, 그리고 이강철이도 못 나왔을 겁니다. 그게 참 얼마나 웃기는고 하니, 2·15조치로 석방하는 명분이 학생들은 석방한다는 것이에요. 재학생만, 하여간 이 철이는 이거할 때 학부 4학년이었어요. 민청학련 조직할 때 재학생이었고, 유인태는 미리 졸업을 했어요. 그러니까 유인태는 무직자란 거지요. 그렇다고 이 철은 아직 순진한 대학생이니까 석방이고, 유인태는 대학도 졸업한 무직이니 너는 풀어줄 수 없다… 그때 기준이 우습잖아요? 그래서 ‘무직자’인 이현배하고 유인태가 오래 살았어요.

민청학련 사건을 변론할 때 “양심범 변호”, “정치범 변호”, “인권사건” 이런 식으로 불렀어요. 점잖게 부르면 “시국사건”이고. 그 사건을 하다보니까, 아까 당시의 내 정신적 혼미에 대해 얘기했잖아요, ‘아 내가 앞으로 갈 길이 이거구나.’ 꼭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한마디로 변호사로서의 내 직업에 대한 보람을 거기서 찾은 겁니다.
고립무원한 정치범 · 양심범들의 편이 되어 준다는 것, 그들의 법률적인 입장이나 권익을 보호해 주고, 그들의 주장을 대변해주고 하는 것, 이게 지금 우리나라 상황에서 변호사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절감한 거지요. 힘든 가운데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되고 전력투구를 하게 되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참 그런 사건에 초짜고 아마추어고, 그냥 흥분도 잘하고 그랬지만,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 때 내 나이 서른일곱이었어요.
이걸 맡으니까 다른 일을 하나도 못 하겠더라고요. 재판을 하루 걸이로 하고 그래요. 그러면 재판 안하는 날은 구치소에 가서 면회를 해야 해요. 서른 몇 명을 면회한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게. 재판 없는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면회 다니고, 재판하는 날은 육군본부 비상군법회의에 가서 하루 종일 재판하고 그렇게 이 사건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건은, 사건이 잘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할 수도 없었어요. 완전히 이 사건에 전력을 쏟아 지냈는데…

1970년대 후반 학번인 제가 보거나 들은 바로는, 1970년대 학생시위에서 화염병이 등장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화염병 제조 방법도 몰랐고, 실험한 적도 없고요. 화염병이 학생시위에 등장한 것은 1984년 정도인 것 같습니다.

강신옥 변호사님
1936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났다. 195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1958년 고등고시행정과에, 1959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1962년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지만 이듬해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1968년도 통일혁명당 사건과 관련된 신영복 교수의 변호를 맡으며 시국사건 변호에 참여했으며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된 9명에 대한 변호를 맡았다. 최종 변론 중 긴급조치를 비판하다가 구속되어 구금되었다가 1975년 2월에 석방되었으며 이후 1988년 무죄로 최종 확정되었다.
강신옥 변호사는 10·26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재규 장군이 10·26 혁명을 결행한 날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과 같은 날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그리고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기막힌 우연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김재규 장군은 박정희를 죽인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 이후는 우리 국민들의 몫이었지요. 김재규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당시 박정희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런 박정희를 제거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거지요.

황인철 변호사님
1940년, 충남 대덕에서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과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하다 1970년 변호사를 개업했다. 그가 변론을 맡은 주요 사건은 대부분 70, 80년대 시국 사건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인권 변호사로서 독재 정권은 물론 세상의 불의와의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다.
그 무렵 그가 말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철이 회상했다.
황 변호사님은 섬세한 영혼을 가지신 분이셨다.
“이군, 정의와 진리는 그것을 ‘깨닫는 것’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짐이 될 수도 있는 게야. 그리고 그것이 역사성 · 사회성을 띠게 될 때에 그로 인해서 겪게 되는 고뇌와 아픔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야. 나는 처음부터 이 사건이 학생들의 데모를 잠재우기 위한 충격 요법의 일환으로 민중을 우매하다고 착각한 정부가 만들어낸 조작극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네. 어린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긴 하네만 힘들겠지만 우리들이 ‘민중을 위한 헌신의 의무’를 삶의 몫으로 받았다 생각하면 힘이 날 것이네.”
그리고는 말없이 내 손을 굳게 잡아주셨다.

민복기(일본식 이름, 이와모토 후쿠키 岩本復基) 전 대법원장
제2차 인혁당 사건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보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6월 15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 확정까지 10개월이 걸렸다. 3심을 거치는 동안 피고인등의 형량은 변함이 없었고, 특히 8인의 사형수들의 형량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형이었다.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재판장 민복기는 방청석에 몇몇 가족들만 띄엄띄엄 앉아 있는 썰렁한 법정에서 무표정한 얼굴에 건조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10분 동안 읽은 뒤 상고기각을 선고하고 곧바로 퇴정했다.
(그는 1974년 12월 10일, 인권선언기념일에 축사를 하면서 ‘유신은 인권 보장의 첩경’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2000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수상했다.)
대법원 1975. 4. 8. 선고 74도3323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전원합의체 판결에 참여한 대법원 판사들은, 민복기(재판장),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주심), 한환진, 임향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이다. 이들 중 유일하게 이일규 대법관이 반대의견을 냈다.

이일규 전 대법원 판사, 전 대법원장
그 당시 이일규 대법원 판사는 다음과 같이 반대의견을 냈다.
비상군법회의의 설치에 관한 대통령긴급조치제2호는 2 「11」에서 그 조치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군법회의법을 준용하고 있으므로 아래에서 단순히 법이라함은 군법회의법을 가리키면서 나의 의견을 기술하겠다. 군법회의의 항소심은 원칙적으로는 사후심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법 제415조, 제416조에서 변론의 방식이나 피고인의 출석에 관하여 제1심과 다른 규정을 들고 있으나 그렇다고 전혀 복심 내지 속심 즉 사실심으로서의 기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법 제425조에 따르면 고등군법회의(따라서 비상고등군법회의)는 원심판결을 파기하는 경우에 그 소송기록과 원심군법회의 또는 고등군법회의에서 조사한 증거에 의하여 판결하기 충분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피고사건에 대하여 직접 판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는 원심판결에 사실의 확정에 영향이 없는 법령적용에 잘못이 있는 경우와, 원심판결에 사실오인 또는 양형부당이 있는 경우를 포함하여 제1심에의 환송 또는 이송하는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소송경제상 자판을 하도록 인정된 제도로서 후자의 경우 즉 사실인정을 다시 하거나 새로운 형의 양정을 할 때는 사실심으로 심판하여야 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군법회의에서 판결은 특별한 규정이 없는한 구두변론에 의하여야함은 법 제71조에 명백히 규정되고 있는 바로서 항소심에 있어서도 법 제420조와 같은 특별규정이 없는한 판결은 반드시 변론을 거쳐서 하여야하며 여기서 말하는 변론을 거친다함은 군법회의의 면전에서 당사자가 공격방어한 소송자료에 터잡아서하는 심리과정을 거쳐서 하는 직접심리주의(법 제349조)를 말하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소심이라 할지라도 다시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양형을 할때에는 위에서 말한 의미에서의 변론을 거치지 아니하고서는 본안판결을 할 수 없다 할 것이며 이는 소송경제때문에 직접심리주의가 변질될 수 없고 또 헌법 제24조에서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 있는 점에도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의 항소심인 원심판결은 검찰관의 공소사실의 진술도 없이 또 제1심에서의 신문과 중복된다하여 피고인의 신문을 생략한다하여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시행하여 결심하였는바 이는 공소사실에 대한 변론을 거쳤다고 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E, 같은 F, 같은 G, 같은 H, 같은 L, 같은 M, 같은 N, 같은 O, 같은 Q, 같은 R, 같은 임규명, 같은 C, 같은 D, 같은 T, 같은 U, 같은 AB, 같은 W에 관한 제1심의 양형이 부당하다하여 제1심판결을 파기하여 사실인정을 다시하고 양형을 달리하는 판결을 하였으니 이는 변론 즉 사실심리를 아니하고 재판을 한 재판절차에 위법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고, 이 위법은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할 것이므로 이 부분 원심판결은 파기를 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당원 1963.10.10. 선고 63도256 판결이 군법회의의 항소심에서 사실인정과 양형에 관한 자판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직접심리를 아니하여도 위법이 아니라는 뜻이라면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일규 대법원장은 훗날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혁당 사건이) 내가 있던 3부로 배당됐다. 3부 구성원은 주심이 이병호 판사였고, 주재황 판사, 김영세 판사 그리고 나였다. 나 혼자 소수의견을 내서 전원합의체로 갔다. 통상 막내 판사가 먼저 의견을 말하는데 내가 의견을 말하자 일순 침묵이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민복기 대법원장 주재로 다수결을 통해 2심 판결이 확정됐다. 피고인들의 ‘고문으로 그렇게 진술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상고 이유에 대해 ‘그렇게 볼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상고기각했다.”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다.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이미 지난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이번 재심판결 역시 이번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제도가 바뀌고 나서 판결이 달라졌다고 사과한다면, 제도 바뀐 때마다 예전 판결을 가지고 일일이 사과해야 하는가.”

여정남
대구에서 태어났다. 1962년 경북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1969년 3선개헌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1971년 전국 대학생 학술 토론 대회에서 ‘반독재 구국 선언문’과 관련하여 구속되었다가 5개월 만에 석방되었고, 1972년 구국장교단의 반유신 유인물 배포 사건으로 강제연행되어 고문을 당해 한쪽 귀가 먹고,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으로 풀려났다.
1973년 11월 5일 경북대의 대규모 반유신 시위를 주도적으로 지휘했다. 1973년 12월 서울대의 이철, 유인태를 만나 전국적 유신 반대 투쟁을 협의 · 연대하고, 1974년 민청학련의 반유신 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북대 시위를 추진하였다. 그해 4월 체포되어 50일 동안 남산 지하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인민혁명당 재건위의 학생 조직책으로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다른 인혁당 관련자 7명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바로 다음 날 새벽 사형이 집행되어 세상을 떠났다. 2007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nternatinoal Commission of Jurists)는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김형욱은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서 말했다.
박정희와 이후락의 지령을 받은 신직수, 그리고 신직수의 심복 이용택은 10년 전에 문제됐다가 증거가 없어서 석방한 사람들을 다시 정부 전복음모 혐의로 잡아넣었다. 중정이 발표한 혐의사실로 보아서는 이용택이 새로운 혐의와 이를 뒷받침할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나는 단번에 그 사건이 조작된 것임에 분명하다고 직감했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발표했다.
박근혜가 말했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에게 인혁당 사건 사과를 요구하자, “이미 충분히 사과했다. 헐뜯기에 불과하다. 법적으로 이미 끝난 일이다.”라고 말했고, 그 후에는 “한마디의 가치도 없는 모함이다. 대통령과 코드가 있는 인사들이 모여 역사를 왜곡하고 헐뜯는 수작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근혜가 왜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변명을 해야 했을까. 그녀가 그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말이다. 그 사건은 아버지 때의 일이고 아버지와 딸은 별개의 존재가 아닌가. 존재는 개별적이고 그래서 고독하다. 그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연좌제의 망령을 떠올린다.)

신직수 전 검찰총장, 전 중앙정보부장
1927년,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천주교이며(아마 황사영 백서 사건 이래 가톨릭 교회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흑역사의 대표적인 사례), 세례명은 요셉이다. 1946년 전주사범학교(현 전주교육대학교)와 한국대학(현 서경대학교, 과거 국제대학) 법과를 졸업하고(일부 포털에서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대학의 오기로서 잘못된 정보이다.) 육군 법무장교로 임관하였다. 박정희가 5사단장일 때 참모장이 김재규였으며, 법무참모로 근무하기도 했고,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박정희와의 인연으로 5.16 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법률비서관이 되고, 1961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63년 7월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으며, 그 해 12월 불과 36세의 나이로 검찰총장이 되어 1971년 6월까지 재직하였는데, 검사장들이 이에 반발하여 검찰총장 취임식에 불참하기도 하였지만, 군사정권 시절에 중앙정보부 차장까지 지낸 사람이 낙하산 인사로 내려오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등고시 사법과 출신이 아닌 군법무관 시험 출신이 검찰총장이 된 유일무이한 사례) 그가 검찰총장 당시 제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다.
1973년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제7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김재규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유신정권 기간 동안의 인권유린 문제에 있어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 그가 검찰총장과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민청학련 사건과 인민혁명당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 장준하 의문사 사건,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등이 일어났었다.
김형욱은 이렇게 평가했다.
……법무부 장관 등의 직을 거치는 동안 부패하기 시작해 끝내 유신체제를 앞장서 변호했으며 정보부장 취임 후에는 유신헌법 체제를 수호하는 데 누구보다 선두임을 자처했다. 10월 유신의 각본을 만든 장본인은 박정희와 이후락이었지만 이 각본을 사실상 연출한 것은 신직수였다. 그는 민주회복운동자들을 탄압하는 데도 앞장섰으며 필요하다면 박정희의 뜻을 받들어 그들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잘라버리는 것도 불사할 만큼 표변했다. 그것은 변신 치고도 무서운 변신이었다. 아무리 인간의 심리와 태도가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돌변하는 가변적인 존재라고들 하지만 신직수의 변신을 나에게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 제4권, 216~217쪽 참조)

문호철 검사
1937년 출생. 남산 부활절 예배 내란 조작 사건을 담당했다. 1974년 민청학련 · 인혁당 고문 · 조작 사건의 신문 조서 작성을 담당한 검사들 중 중심적 역할을 했다. 민주화 운동가들에 의해 ‘공안사건의 저승사자’로 불리었다. 1978년에 사망했다.

송종의 검사
1941년 평안남도 출생. 1974년 민청학련 · 인혁당 고문 · 조작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직접 와 신문 조서를 작성한 검사로서, 문호철 검사와 함께 중심적 역할을 했다. 1992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1996년 법제처 처장을 역임했다.

이규명 검사
1934년 출생. 1971년 사법파동을 야기한 검사로 1974년 민청학련 · 인혁당 사건을 맡았고 1986년 구국학생연맹 및 자민투 사건으로 86명을 구속 · 기소했다. 1988년에 사망했다.

이용택
1930년 11월 29일 경상북도 달성군(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대구농림고등학교,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였는데 1974년 중앙정보부 제6국장으로 있으면서 민청학련 사건과 인민혁명당 사건을 조작 기획하였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말했다.
이용택은 나를 매우 따르던 심복이었으나 한때 밀수와 관련된 부정이 말썽이 되어 나는 재임 후반기에 그를 잘랐다. 그는 실직자가 되어 있었는데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그를 다시 채용했다. 이후락은 중앙정보부를 대폭 개편하여 제6국 총무국을 정치수사국으로 만들고 이용택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새로 만든 제6국은 북한의 정치보위국에 맞먹는 남한의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정치 전위대였다.

참고 자료
벌써 반세기가 지나갔다. 우리 세대에, 나의 경우 20대 중반쯤 한참 젊은 시절에 일어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에도 벌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을 재조명하거나 재평가할 위치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그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알지 않고 넘어갈 순 없었다.
나는 이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재료로 하여 에세이를 쓸 수는 없었다. 삶과 죽음과 관련한 이런 난해한 단어들이 떠올라서 가슴이 꽉 막혀 버렸기 때문일까? 나는 에세이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소설에서는 소설이니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면 이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백일몽을 꾸는 것처럼 혼란스러운 가운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한낱 幻像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사형선고와 교수형. 사법살인. 그들의 광기란!? 불안. 체념. 절망. 다시 체념. 설마!? 설마!?? 무고한 사람들을!!?? 천벌을 받으리라!! 일말의 양심이 있을 것이 아닌가!! 캄캄한 독방. 밤의 공포 불면증. 악몽. 신들은 불행하게도 인간처럼 자살을 할 수가 없다. 고독. 패배. 마지막 희망. 눈물과 냉소. 운명 혹은 숙명. 순환. 죽음이 안겨줄 평화. 사랑. 이별.)
4월은 잔인한 달인가. 나는 그날 새벽의 뼛속 깊이 스며드는 한기를 느낀다.
나는 아래 참고자료 중에서 어떤 부분은 전부를 그대로 인용, 원용해서 이 논픽션 중편소설을 완성했다. 그렇다면 나는 사실주의 작가들이 강조한 관찰과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표절을 하였거나 절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거대한 역사적 진실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염치로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실을 (작가의 발상의 근원이지만 작가의 편견, 고정관념, 가치관과 밀접하게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첨가, 삭제, 수정, 재수정하거나 변주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역사적 진실에 관한 그들의 언어를 충실히 옮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것도 포함해서) 전체 자료가 잘 정리 보관되어 있지는 않다. 특히 인혁당 사건의 경우가 그렇다. 이 중대한 사건에 대한 자료가 그렇게 허술하다니. 국방부 자료실에는 인혁당 사건의 공소장, 판결문, 소송기록 등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창고에 처박혀 있을 것이고 그나마 조만간 보존기간 만료로 소멸될 수도 있다. 대법원에는 판결문만 겨우 남아있을 것이다.
이 대명천지에 국방부는 이 역사적 사건의 기록 보존을 위해서, 특히 방대한 소송기록이 사라지지 않도록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할
작성일:2019-02-27 14:40:23 14.32.9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