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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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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차라리 피고인이 되고 싶다 (上)

닉네임
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9-02-27 14:38:13
조회수
907
차라리 피고인이 되고 싶다


姜信玉 변호사님 법정모욕 사건



좀 오래전 일이지만,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전국 5대 도시에 근무하는 법관 357명을 상대로 ‘현직 판사들이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법부 관련 사건’을 조사한 바 있었는데, 유신정권에서 나왔던 인민혁명당 사건 등 긴급조치 사건 판결들이 수치스러운 판결 제1위로 나타났다. 제2위는 행정부에 의한 법관의 인사 조치, 제3위는 1980년 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순서였다.
그렇지만 70년대와 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은 아버지 때의 일이고, 90년대에 태어난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할아버지 때의 일이므로 멀고 먼 희미해진 역사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그들이 새삼스럽게 기억해야만 할 가치가 있을까? 결국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가 될 것이다.


1. 1974년 4월 3일

대통령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은 반국가단체

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 3일 밤 10시를 기해서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만 가지고는 국민의 반유신 항쟁을 막을 수 없게 되자 학생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 것이다.
내용인즉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고무 찬양하는 일체의 행위를 최고 사형에까지 처하겠다는 것이었다. 비단 민청학련에 관련된 행위가 아니더라도 학생의 ‘정당한 사유 없는 결석이나 시험거부 행위’에 대해서도 5년 이상의 징역에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노린 유신헌법, 이것을 반대하거나 개정만 주장해도 15년 징역에 처한다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
그 황당무계한 초현실적인 조치로도 유신독재 반대의 불길은 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출현한 또 하나의 초강수가 바로 ‘긴급조치 4호’였다.
긴급조치 4호가 나오기 직전(같은 날인 1974년 4월 3일 오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의 이름으로 된 ‘민중 · 민족 · 민주 선언’이 발표된다. 그 성명은 ‘바야흐로 민권 승리의 새 날이 밝아오고 있다. 공포와 착취, 결핍과 빈곤에 허덕이던 민중은 이제 절망과 압제의 사슬을 끊고 또다시 거리로 나섰다’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에 우리는 반민주적 · 반민중적 · 반민족적 집단을 분쇄하기 위하여 숭고한 민족 · 민주 전열의 선두에 서서 우리의 육신을 바치려 한다’로 끝맺고 있다.

유인태가 그 당시를 회상했다.
4월 14일, 나와 이철은 여정남의 신설동 하숙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 정오 뉴스를 듣던 나는 숟가락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2백만 원이라니!”
얼마 전까지 현상금이 50만 원인 줄 알고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2백만원이라는 것이었다. 말이 2백만 원이지, 그 돈을 지금 시세로 환산하면 대충 4천만 원은 될 것이다.
“셋(이철, 강구철, 나)이 합쳐 2백만 원이겠지! 간첩 현상금이 30만 원인데”
이철이 대답했다.
“아니야. 네가 잘못 들었어. 아무러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간첩 몇에 해당하는 현상금을 걸겠냐.”
이 다툼은 1시 뉴스에서 해결되었다. 각각 2백만 원의 현상금이 붙었던 것이다. 이철은 나보다 태평한 것 같았다. 그는 어차피 잡힐 것이니까 아는 사람에게 신고케 해서 그 현상금의 절반만이라도 어려운 가정에 보탬이 되게 했으면 좋겠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 어쨌든 더욱 불안을 느낀 우리는 밖에 나간 여정남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밖에서 돌아온 여 선배는 숨찬 목소리로 대뜸 말을 꺼냈다.
“우리 셋이 같이 있는 것은 자멸 행위인 것같소. 일단 헤어집시다.”
“지금 이 마당에 갈 데가 막연한데요.”
내가 불안스레 말햇으나 여 선배는 도저히 같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헤어지는 게 위험이 분산될 것이오. 잡히지 않으면 모레 저녁 6시 어린이 대공원 후문에서 만납시다.”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소위 ‘민청학련 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위와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1974년 4월 3일을 기해 현정부를 전복하려 한 불순세력으로, 이들은 북괴의 통일전선 형성 공작과 동일한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 · 농민에 의한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한 과도적 정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획책하였다’고 했다.
중앙정보부는 관련자 1,204명을 조사한 끝에 그중 745명을 훈방하고 253명을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하였으며, 군 검찰부는 그중 180명을 기소하였다.
5월 27일 일본인 2명을 포함하여 민청학련 관련자 54명이 1차로 기소된 것을 비롯하여 모두 18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 주동이 된 국가 변란 기도 사건의 주모자급에 대한 수사를 마치고 우선 그중 54명에 대해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 제1호,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 음모, 내란 선동 죄명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구속 · 기소했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후 이 조치 위반으로 수사한 인원은 모두 1,024명이며, 그중 자진 신고자가 266명, 검거자가 732명이며, 죄상이 무거운 253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했다.”고 발표했다.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비상군법회의 검찰부 발표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민청학련 사건은 이철, 유인태 등 평소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몇몇 불순 학생이 핵심이 되어 작년 12월 경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봉기를 획책하여 오면서 그 과정에서 1) 서도원, 도예종 등을 중심으로 한 인민혁명당계 지하 공산세력, 2) 재일 조선인총연맹(조총련) 계열, 3) 과거 불순 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조영래 등 용공 불순세력, 4) 일부 종교인 등 국내의 반정부적 인사, 5) 기독교인 중 일부의 반정부세력 등 여러 세력과 결탁하여 이들과 반정부 연합전선을 형성한 후 국내외의 반정부 역량을 총집결, 전국에 걸친 유혈 폭력혁명으로 일거에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 과도의 연립정부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공산정권을 수립코자 했던 국가 변란 기도 사건이다.
서도원, 도예종 등은 인민혁명당, 민주민족청년동맹 등 사건으로 피체되어 복역하고 출소한 뒤에도 1969년 경부터 지하에 흩어져 있는 인혁당 등의 잔재 세력을 규합,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경북대학교 여정남을 학원 담당책으로 하여 1973년 12월 하순 여정남에게 재경 각 대학교의 반정부 학생과 접선하여 이들에게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을 선동하고 그 방법을 교시하여 자금을 지원하는 등으로 전국적인 대학생 조직을 만들도록 지령했다. (중략) 이철, 유인태 등은 평소 현 사회체제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 이를 시정하는 길은 폭력혁명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노동자, 농민의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오던 자들로서 1973년 11월 초부터 수십 차에 걸쳐 동년 10월 초의 학원 소요의 주동자이며,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의 지도부 요원이 된 황인성, 정문화, 김병곤, 나병식, 서중석, 정윤광, 이근성, 강구철 등과 수시로 회합하면서 각 대학이 개학을 하게 될 3~4월 중 유리한 시기를 틈타 일제 봉기할 수 있도록 각자가 임무를 분담하여 전국적 대학생 연합체의 조직에 착수, 폭력 봉기를 선동, 일제 봉기의 시기가 되면 전국적으로 행동을 통일키로 함으로써 폭력혁명 주체의 저변 조직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계획대로 폭동이 성공하여 정부가 전복된 후에는 임시 과도정부로서 ‘민족지도부’ ‘10인협의회’라는 연립정부를 세우고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 정권을 세워 북괴와 야합하여 적화통일할 것을 획책했음이 밝혀졌다.

학생들이 4월 3일을 기해 동시에 시위를 전개하기로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신헌법의 폐지와 유신정권의 퇴진을 기대한 것이었지 주동 학생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폭력혁명을 시도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유일한 증거는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뿐이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명칭도 시위에 사용될 전단을 아무 명의 없이 낼 수는 없어서 편의상 작명한 것일 뿐이다. 단체로 규정하는 데 반드시 적시해야 할 가입절차, 정관, 기구, 조직 규정 등이 없어 조직이라기보다 연락체계 수준이었다.
이날 발표는 중간수사 발표와 달리 ‘조직도’에서 ‘인혁당 재건위’가 중심에 있었다. ‘민청학련’은 여정남이 지휘하는 그 하부 기관인 것처럼 묘사했다. 공소장 요약 발표문의 절반도 인혁당 관련자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오로지 여정남이라는 한 인물을 매개로 이 두 단체를 억지로 연결짓고자 한 것이다.
수사 당국은 사람들의 관심이 덜한 인혁당 관련자들을 완전히 공산주의자들로 날조한 뒤에 학생들도 마치 공산주의자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하는 술책을 사용한 것이다.
민청학련 구성원의 활동에서는 어떠한 용공 · 반국가적 혐의를 입증할 만한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혁당 관련자 누구도 민청학련 관련자에게 직접 지시하거나 데모의 목적을 전달한 자가 없을뿐더러, 민청학련 관련자 누구도 인혁당 관련자와 사상 노선을 함께한 자가 없었다. 오로지 경북대 졸업생 여정남이 “인혁당 관련자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과, “이철과 유인태 2명에게 그 내용을 전달했다”는 허위 진술서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인혁당 재건위’라는 것조차도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실체 없는 인혁당
인민혁명당, 이른바 인혁당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64년 8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혁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하면서부터였다.
1964년 박정희 정부가 굴욕적 한일회담을 체결하려 하자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은 일본의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이 없는 한일회담이라고 격렬히 반대했다. 반대 시위가 극에 달해 전국의 대학생들이 연일 거리로 나와 시위와 성토를 벌이던 6월 3일, 박정희 정부는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일체의 옥내외 집회 · 시위를 금지하고 언론 보도를 사전 검열하도록 했다. 계엄을 두 달 가까이 지속하면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무장군인들이 대학을 장악하고, 시민들에게는 밤 9시부터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을 구속하고 대학생 352명을 제적시켰다. 대통령에 당선된 지 1년도 안 되어 내린 이런 초강압적 진압 조치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잠재웠으나 국민들의 마음속 반대 의견까지 잠재우지는 못했다.
박정희 정부는 반대 여론마저 잠재우기 위해 한일회담 반대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동기에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여주기로 했다. 학생 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 세력이 있고 이들이 정부 전복을 위해 학생들로 하여금 회담 반대 투쟁을 하도록 선동했음을 증명한다면 국민들을 조용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55일간의 계엄령이 해제된 지 보름 정도 지난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정보부장이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열어, “북괴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하여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한 것이다.(이것이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
관련자들은 도예종, 이재문, 박중기, 박현채 등 혁신계 인사와 김중태, 김정강, 서정복, 현승일, 김정남, 김도현, 김승균 등 학생들이었다. 이들이 북괴 노동당 강령을 토대로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배후 조종했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8월 18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 당시 신직수 검찰총장은 중정의 압력에 굴복하여 수사에 전혀 참여하지도 않았던 검사들에게 기소를 지시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검사들은 크게 반발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검사는 사건 관련자들이 중정의 조사 과정에서 전기고문, 물고문 등 심한 고문을 당했음을 밝혀내고, “증거가 없어 공소 유지가 불가능하며,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소를 거부하였다.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주장 말고는 간첩과 접선한 흔적이 없고 불온 단체를 조직했다거나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고 볼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관련자들을 기소하라는 상부의 압력이 계속되자 이에 항의하여 사표를 내고 말았다. 대한민국 검찰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사단장을 할 때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했던 충복인 신직수 검찰총장은 당직 검사 정명래를 시켜 관련자 26명을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등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도록 지시했다. 이때의 검찰총장이 10년 뒤에는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제2차 인혁당 사건 조작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다음 해 1965년 1월 선고 공판에서 도예종 등 2명에게 각각 징역 3년, 2년을 선고했을 뿐 나머지 10명에게는 전원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57명의 대규모 지하조직을 적발했다고 큰일 난 듯이 발표했는데, 결론은 2명만 북한 찬양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뿐, 국가 변란 혐의는 전원 무죄였다.
이는 57명으로 구성된 공산계 대규모 지하조직, 즉 인혁당이 실체가 없음을 사법부가 입증한 것이었다.
이 무렵은 시위 학생들의 영장을 기각한 데 불만을 품고 나중에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는 차지철의 사주를 받은 공수특전단 군인 20여 명이 총과 칼로 무장하고 한밤중에 법원과 판사의 집에 난입하여 협박을 하던 때였다. 그런 야만적인 시대였는데도 이러한 판결이 나왔던 것은 인혁당 사건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조작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이처럼 1964년 8월에 있었던 인혁당 사건은 완전히 사기극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인혁당을 재건’하려고 했다고 하는 발표는 언어도단이다. 인혁당은 아예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4년 9월 5일 오후, 중앙정보부 부장실.
인혁당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제5국 대공과장 이용택이 숨가쁘게 말했다.
“부장님! 이거 큰일 났습니다.”
“뭐가 또 그리 큰일이오.”
“인혁당 관계자들이 기소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웬일이오? 우리가 그들을 검찰로 넘겨준 게 언젠데. 구속 마감일이 가까워 오지 않았나?”
“바로 오늘입니다. 저희가 지난달 18일에 검찰로 넘겨주었는데 그 뒤 만 18일을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행사하고 있어서요.”
“담당 검사가 누구였더라?”
“이용훈 부장검사 지휘 아래 최대현, 김병리, 장원찬 등 세 검사입니다.”
“이거 봐요, 이 과장!”
“네, 부장님”
“당신 왜 그리 일을 덤비오. 학생들까지 잡아넣어 가지고 말이오. 검사들이 오죽했으면 기소를 못하겠다고 나왔겠느냐 말이야. 조사를 너무 엉성하게 했단 말이오!”
“죄송합니다. 심증은 뚜렷하나 물증이 약하고, 또 그자들이 워낙 노회하여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게 틀렸다는 거요. 그들이 빨갱이라는 심증은 나에게도 있단 말이야. 허나 물적 증거가 없으면 일이 안 되는 거라고! 어떻게 심증만 가지고 처벌할 수가 있나. 당신은 증거 없이는 처벌하지 못하고, 심증은 증거로 채택될 수 없으며, 사색은 처벌받지 아니한다는 죄형법정주의도 모르고 있나?”
“죄송합니다, 부장님.”
“죄송하고 자시고 지금 와서 떠들면 무슨 소용이 있어? 당신들이 그따위로 일을 해서 나를 망신주려고 결심한 것 아니야?”
“면목 없습니다. 부장님.”
“잔소리 말고 최대현 검사에게 전화를 거시오. 내가 말할 테니까.”
최대현은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나의 심복처럼 움직이던 젊고 유능한 검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저 최대현입니다.”
“최 검사.”
“네, 말씁하십시오.”
“당신 어떻게 사건을 처리하고 있는 거요? 중앙정보부를 그렇게 망신을 주어야만 되겠나?”
“죄송합니다, 부장님. 저는 기소할 만한 요건이 충분하다고 계속 주장해왔습니다만 이용훈 부장검사께서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가 현재 이 사건에 있어서는 저희 세 검사들의 상급자임에는 분명하니까요.”
“이용훈이는 무슨 마음을 먹고 그렇게 세게 나오지?”
“반공도 좋고 빨갱이를 타도하는 것도 좋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검사의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김병리, 장원창 검사 등은 이용훈 부장검사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사의를 표명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의를 표명하는 것만이 잘하는 일은 아니야.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아니냐 말이야.”
“알겠습니다.”
“서울지검 검사장에게 내 말을 전하시오. 재판 결과야 어떻게 나든간에 단 한 명이라도 기소는 해야 할 것 아니오! 중앙정보부를 어떻게 보는 거요?”
“알겠습니다, 부장님. 말씀을 단단히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중정 측의 조사가 너무 소홀한 것 같았습니다.”
“알겠소. 좋아. 그럼 수고하도록.”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는 끊어졌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
나는 옆에 있던 이용택에게 들으라는 듯이 투덜대며 전화기를 꽝하고 내려놓았다.

하지만 1974년 4월 25일과 5월 27일 두 차례에 걸쳐 또 다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발표된다. 그 내용은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과거 공산주의 불법 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와 일본 공산당 등이 개입되어 있으며 (중략) 이들은 공산주의 비밀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학생 데모를 조종하여 폭동을 야기하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민청학련의 배후 조종으로 조작 · 기소된 도예종 등 인혁당 관련자 22명은 대부분 사형이나 무기징역이란 중형을 받고 다음해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기각된 직후, 만 하루도 되기 전에 그중 8명에게 사형을 집행하였다.

한승헌 변호사가 말했다.
여정남은 인혁당과의 관련을 정면 부인했으나 결국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하루 만에 인혁당사건 피고인들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 변호를 맡았던 피고인 중 유일하게 그가 사형을 당할 때, 나 역시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1975년 4월 9일 새벽 그가 형장으로 끌려가던 그 시각에 그의 변호인이던 나는 같은 감옥의 감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저지른 최악의 사법살인이었다.
그런데 30년 뒤 공개된 한 문서에 의해 해괴망측한 일이 하나 더 밝혀졌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중앙정보부가 1964년 8월 20일 작성한 내부 문건 ‘김상한에 대한 북파 공작 상황 보고’를 공개하면서, 인혁당을 조직했다는 김영춘은 김상한이 본명이며 그는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에 소속된 북파 공작원이라고 밝힌 것이다.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인혁당 적발 기자회견에서 “북괴 간첩 김영춘이 인민혁명당의 조직 확대 공작을 도예종에 맡기고 월북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과거사위원회는 “인혁당 발표문에 나오는 김영춘과 중정이 내부 문건으로 작성한 ‘인혁당 조직체계’ 등의 문서에 나오는 김상한이 동일한 행적을 한 것으로 보아 김영춘과 김상한은 동일일”이라고 하면서, “김상한은 남파 간첩이 아니라 북파 공작원이 확실하므로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결론지었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공개한 중앙정보부 작성, ‘김상한에 대한 북파공작 상황보고’ 문건 내용은 이러하다.
김상한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1962년 육군 첩보부대의 북파 공작원으로 선발돼 훈련을 받은 후 북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는 그를 남파 간첩으로 둔갑시키고 이름을 김영춘으로 바꾸어 인혁당을 조직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중정은 1974년 제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에도 그를 등장시켰다.


2.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

중앙정보부 제6국은 ‘특별국’으로 박정희 정권의 특명을 처리하는 특공대였다. 이용택 국장은 정보부장 신직수를 건너뛰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수사 상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제5국은 원래 간첩사건을 전담해서 조사하는 부서였다. 하지만 그 당시 제5국과 제6국은 모두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에 동원되어 지하실 방에서 수사를 하면서 온갖 종류의 고문을 자행하였다.
야전침대에서 뺀 봉으로 사람을 두들겨 패는 몽둥이 찜질은 가장 기본적인 고문이었다. 고문을 하다가 피의자의 비명소리가 크게 나면 입에다 솜을 집어넣고 구타했다. 피의자들은 하도 심하게 맞아 온 몸이 시퍼렇게 변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피부가 새카맣게 탄 것 같았다.
물고문은 이른바 통닭구이 고문과 병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우선 고문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철봉에 붕대를 감는다. 그러지 않으면 고문당한 사람 피부에 찰과상이 나서 고문 사실이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통닭처럼 대롱대롱 매달린다. 그리고는 물수건을 얼굴에 씌운 다음 고춧가루가 섞인 물을 주전자로 서서히 얼굴에 붓는다. 이 고문을 당하면 호흡이 매우 어렵고 숨을 쉰다 해도 고춧가루가 섞인 물이 들어와 폐가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
전기고문은 엄지손가락이나 발가락에 코일을 붙인 다음 군인들이 사용하는 야전용 전화기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는 방법을 쓴다. 고문을 당해본 사람에 따르면 이로 인한 고통은 마치 번갯불로 온몸을 지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전기고문은 보통 물고문이 끝난 후 하는데 경우에 따라 한 쪽 눈을 실명케 하고 발뒤꿈치가 사라지게하고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히고 또는 발가락을 영구히 마비시키거나 사람을 실신시켜 사망 직전에 이르게 하는데, 이때 살아나도 그 후유증 때문에 평생을 반신불수로 고생해야 한다.
고문은 수사 초기 중정에서부터 검찰 조사를 받을 때까지 수시로 자행됐다. 수사관들이 고문을 가한 이유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고문을 할 필요가 없다. 이 사건의 경우에도 피의자들의 혐의점을 밝히기 위한 수사보다는 원하는 답변을 얻기 위한 고문이 중점적으로 자행됐다.

유인태가 그 당시 고문 상황을 증언했다.
3월 28일, 29일 등 최초로 검거된 학생들은 특히 많은 고문을 당해야 했다. 수배자들도 체포하고 배후도 만들기 위해서였다. 밤낮으로 신발을 벗겨 얼굴과 머리를 때리거나 몽둥이 찜질과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기, 몽둥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뭉개대는 고문을 해댔다. 몇날 며칠이고 잠을 못 자게 하고 흰 벽을 쳐다보게 하는 고문도 있었다.
물론 물고문도 있었다. 발가벗긴 뒤 나무 사이에 묶어 대롱대롱 매달리게 한 다음 수건을 얼굴에 씌우고 주전자로 물을 붓는 것이었다. 숨이 콱콱 막혀 오두발광을 할 때면 “너 군대에 있을 때 북한에 갔다왔지?”하는 것이었다. 견디다 못해 그렇다고 끄덕이면 물붓기를 중단하고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 거부하면 또 물고문…….
지하실에서 로프로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갈기기도 하고 사정없는 몽둥이 찜질에 손이 살갗에 조금만 닿아도 소스라칠 듯 아파 맞을 때보다 더 고통이었다. 며칠 지나면 친절하게 안티프라민 같은 것을 발라주고 위로도 해주었다.
수사관들은 공포심을 불어넣기 위한 방법도 많이 썼다. 어떤 수사관은 소리를 엄청나게 크게 지르는 역할을 주로 맡은 것 같다. 밤새 내내 고문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실제 고문당하는 상황인지 녹음기 소리인지 구별이 어려웠다.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고문당하던 몇몇이 4월 15일 경에야 서대문구치소에 넘겨졌을 때, 그래서 서대문구치소의 솜이 여기저기 삐져나온 푸르딩딩한 이불을 둘러쓰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을 때, 정말 천국이나 특급 호텔의 특실에 온 기분이었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03년 펴낸 ‘기억과 전망’ 봄호에는 ‘인민혁명당 사건을 통해서 본 인권의 문제’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데 당시 사건 관련자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지 기술되어있다.
고문은 주로 중정 6국 지하실에서 이뤄졌다. 수사관들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일삼았고, 지하실 사무실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몽둥이질을 했으며, 피의자들에게 일주일 이상 잠을 안 재우기도 했다. 하재완은 폐농양증에 걸려 입에서 피를 토했고, 장이 항문으로 빠져나와 똑바로 앉거나 걷지 못했다. 박중기는 전기고문을 받는 도중 실신했다. 이수병은 소나 돼지도 그렇게 맞으면 죽을 정도로 몽둥이질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피의자들 대부분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반 실신하는 경험을 했고, 몽둥이질 후유증으로 부축을 받으면서야 겨우 계단을 올라 다닐 수 있었다. 서울 구치소 안에서도 철창을 붙잡고 몸을 뒤척이면서 겨우 교도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김지하 시인은 1975년 2월 ‘동아일보’에 제6국에서의 체험을 이렇게 쓰고 있다.
저 기이한 빛깔의 방들, 악몽에서 막 깨어나 눈부신 흰 벽을 바라봤을 때의 그 기이한 느낌을 언제나 느끼고 있도록 만드는 저 음산하고 무뚝뚝한 빛깔의 방들. 그 어떤 감미로운 추억도, 빛 밝은 희망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 무서운 빛깔의 방들. 아득한 옛날 잔혹한 고문에 의해 입을 벌리고 죽은 메마른 시체가 그대로 벽에 걸린 채 수백 년을 부패해가고 있는 듯한 환각을 일으켜주는 그 소름끼치는 빛깔의 방들. 낮인지 밤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언제나 흐린 전등이 켜져 있는, 똑같은 크기로 된, 아무 장식도 없는 그 네모난 방들. 그 방들 속에 갇힌 채 우리는 열흘, 보름 그리고 한 달 동안을 내내 매순간 순간마다 끝없이 몸부림치며 생사를 결단하고 있었다.

중정에서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법률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엉성하였다. 그래서 이 불완전한 피의자 조서를 완벽하게 만들어 기소하는 임무는 검사에게 넘겨졌다.
이철은 그 당시를 회상하였다.
(이철이 마지막으로 잡혀들어온 4월 24일에는 이미 민청학련 사건의 윤곽과 배후 세력이 제6국의 각본에 따라 확정돼 있었다.)
그는 조사 엿새째 되는 날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런데 밤중에 갑자기 헌병들이 발로 차면서 깨웠다. 처음 보는 수사관과 헌병들이 양쪽에서 팔을 끼고 수사관이 앞장서서 다른 건물로 데려갔다. 숲길을 거쳐 들어간 건물 입구에서 지하로 한참을 내려갔다. 복도 입구에 철창이 있고, 벽과 천장은 모두 흰색 방음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철창 앞 경비병에게 수사관이 자신의 신분증을 내주었다 받으니 문이 열렸다. 그들은 그렇게 또 한참을 가다가 한 방으로 이철을 집어넣었다. 제법 넓은 방에 회의 테이블 같은 긴 철제 책상과 의자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바로 5국 지하실이었다. 5국은 진짜 간첩들을 고문하는 곳이라 그런지 공기부터 살벌했다.
바닥에는 전기선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이철은 ‘여기가 전기고문 하는 곳인가 보다. 아, 이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잔뜩 긴장한 채 적막함 속에서 초조한 시간이 30여 분 흘렀을까. 갑자기 건장한 사내 서너 명이 우르르 몰려왔고 사람 하나 누울 만한 크기의 판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중 한 사람이 외쳤다.
“눕혀!”
이제부터 소문으로만 들었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할 차례인데 그러면 죽었다 싶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저놈 바로 보내란다.”
“지금 막 시작하려는데 어떤 놈이 지랄이야!”
“하여튼 빨리 보내래!”
진짜 고문을 시작하려던 건지 겁주려고 쇼를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철은 다시 수갑을 차고 다른 방으로 끌려갔다. 좀 작은 방이었는데, 여기도 방음벽으로 사방이 가로막힌 채 철제 책상과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곳에 몸집이 작은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야비한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너, 빨갱이로 죽게 됐으니 영광이지?”
그 소리에 이철도 악이 받쳐 반말로 대꾸했다.
“당신 누군지 내 모르겠는데. 전쟁 나면 당신 같은 놈들은 배 타고 다 도망가도 총 들고 싸우는 건 우리야!”
그러자 그가 표정을 바꾸면서 말했다.
“수갑 답답하지?”
그가 수갑을 풀어주었다.
“담배 한 대 피울래?”
담배를 주면서 다시 말했다.
“나 송종의 검사야.”
그가 바로 송종의 검사였다. 기소를 위한 검찰 조서를 작성하는데 검찰로 부르지 않고 직접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출장을 나온 것이다. 이철은 이는 이전에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와 다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공포 분위기 속에서 조서를 완성하려는 술책임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송종의는 나중에 김영삼 정부에서 검찰총장에 내정되었지만,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철 등 야당 의원들이 민청학련 고문 조작 사건의 주범이라고 결사 반대해서 낙마시켰다. 그 대신 법제처장이 되었다. 악랄한 고문 검사가 세상이 바뀌어도 법을 만드는 국가 기관인 법제처의 장관이 된 것이다. 아! 대한민국!)
이철이 체포된 것은 이미 중앙정보부의 각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억지 진술서를 써버린 뒤로 이철이 그것을 부인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린 터였다.
송종의는 우선 이철과 유인태가 인터뷰한 일본인 기자 다치카와로부터 공산주의 폭력혁명을 지시받았다는 자백을 완벽히 받아내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치카와가 공산혁명을 선동한 게 맞지?”
“아무리 우리가 학생이고 사회를 모른다 해도 난생 처음 보는 일본 놈 기자가 와서 뭘 하란다고 덥썩 할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좀 하지 마시오.”
“하야카와가 일본 공산당원인 건 알고 있었나? 아무 목적도 없이 너희를 만나 공작금을 주었겠나!”
공작금이란 인터뷰가 끝난 뒤 취재비로 7,500원을 준 것을 말한다. 지금 돈으로 30~40만 원쯤 될 터인데. 무슨 혁명 공작금을 보내는데 3~4억도 아니고 30만 원인가.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공작금은 턱도 없는 소리고 인터뷰 사례비를 받은 것입니다. 하야카와는 정식으로 한국에 유학 와 서울대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인데, 공산주의 문제가 있는 인물이면 당신들 정보 당국의 책임이지 우리가 누가 누군 줄 어떻게 압니까? 누구도 그런 지시를 받거나 배후 조종을 받은 사람은 없어요.”
5박 6일 동안 이철은 송종의 검사로부터, 유인태는 문호철 검사로부터 각각 이러한 자백을 강요받았다. 이들이 끝까지 버티자 검사들은 새로운 논법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유인태와 이철을 한방에 같이 놓고서 말도 안 되는 애국론까지 들먹이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일본 놈 둘을 구속했다고 일본에서 지금 난리다. 죄도 없는 자기네 국민을, 취재 활동 중인 기자를 잡아다 고문했다고 항의가 엄청나. 지금 저 두 놈이 죄가 없다고 되어버리면 말이야.
우리는 완전히 골로 가는 거야. 일본 놈들 앞에서 앞으론 고개도 못 들어. 저자세로 가야 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공연히 일본 놈들한테 꿀리게 되는 것만은 막아야 되지 않겠어?
내가 검사로서 약속하는데 이 부분은 외교적으로만 사용하고 국내 재판에는 사용하지 않을 거니까 대충 걔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렇다고 써버려.
너희도 한국 사람이고 애국자인 걸 믿으니까. 애국적 견지에서 일본의 공세는 막아야 하지 않겠냐?”
이철은 두려웠다. 검사들의 달콤한 애국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수사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부정해도 어차피 종국에는 그들의 요구대로 써줘야만 이 지옥 같은 수사가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거인처럼 덩치가 크고 눈이 왕방울만 한 문호철 검사도 같은 내용의 회유를 유인태에게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유인태와 이철은 진술서에 본의 아니게 서명하고 말았다. 이철은 이 회유를 이기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기자회견에서 일본 기자들이 폭력혁명을 사주했다는 내용은 검사들의 강압으로 허위 자백한 것이며,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3. 1974년 6월 15일

비상군법회의 제1심판부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

재판장 중장 박희동, 심판관 소장 신현두, 심판관 부장검사 김태원, 심판관 부장판사 박천식, 법무사 중령 김영범.
검찰관 송종의, 최명부, 강철선, 문호철, 이규명.

민청학련 사건의 재판은 사건 관련자를 공동심리하지 않고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분리 심리했다. 민청학련 사건은 제1심판부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제2심판부(재판장 육군 중장 박현식)가, 일본인 기자들은 제3심판부에서 별도로 비공개 심리를 거쳤다. 다만 인혁당 관련자들 중 여정남은 민청학련 피고인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배후 세력으로 분류된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현 선생 등도 별도 재판을 받았다.
피고인들이 워낙 방대한 숫자이기도 했지만 서로 진행 과정을 알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기들이 억지로 짜맞춘 각본이 탄로날까봐 검찰관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법정 출입문 부근에는 헌병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살풍경한 풍경이었다.
피고인들은 손과 허리를 밧줄에 칭칭 동여매인 채 굴비 엮이듯 엮여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채 법정으로 들어갔다. 넓지도 않은 법정은 말 그대로 초만원이었다.
6월 15일, 국방부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에 끌려나온 학생운동 지도자급 34명 중에는 이철, 유인태, 여정남, 황인성, 나병식, 윤한봉, 안재웅, 나상기, 서경석 등과 함께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총무인 이직형의 얼굴도 보였다.
가건물로 된 군사법정 안은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선풍기 혜택을 받는 법대 위 심판관들이나 손 부채에 의지하는 방청객들, 그리고 장승처럼 늘어서서 방청석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는 헌병들 모두 후줄근히 젖은 모습이었다.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은 서울 삼각지 국방부 청사 뒤에 설치되어 있었다. 재판석 가운데 재판장 박희동 육군 중장이 정복을 하고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양옆으로는 신현수 육군 소장, 박천식 부장판사, 김태원 부장검사와 법무사인 김영범 대령이 앉았다.
방청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일반인의 방청은 금지되었고, 가족도 피고인 1인당 직계존비속 1명에게만 출입비표를 제공했다. 가족이 한 명도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연락이 안 되거나 정문에서 신원 확인에 문제가 있으면 차단했기 때문이다.
언론사 기자도 소수로 제한했을 뿐 아니라 취재한 것을 보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수첩에 메모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긴급조치 위반 행위를 보도하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재판 뒤 군법회의에서 배부하는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낄 뿐이었다.
그 당시 재판은 심지어 피고인들의 수갑도 풀지 않은 채 인정신문이 시작되었는 데도 심판관 중에 끼여 있는 현직 판사조차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호인석에서 “법대로 수갑을 풀고 재판해달라”고 요구하면 그때서야 마지 못해 수갑을 풀어주었다.
32명의 피고인에 대한 공소장 549쪽을 읽는 데만 하루 종일 걸렸다. 찌는 듯한 무더운 날씨에 송종의 검사는 몇 번이나 읽기를 멈추고 연신 땀을 닦아가며 냉수를 들이키고는 다시 읽기를 계속하였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물이라곤 선언문, 유인물, 김지하의 시 ‘오적’, 일본어 서적, 그리고 트랜지스터 라디오 몇 개와 피의자신문조서뿐이었다. 그러므로 조서를 빼면 결정적인 증거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재판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시한 증거 외에는 어떠한 증인이나 증거도 채택하지 않았다. 피고인들은 모두 수사기관과 검찰에서 자백과 진술은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검찰이 제시한 피의자신문조서를 모두 증거로 채택했다.
종전 제3공화국 헌법에서는 ‘피고인의 자백이 유일한 증거’이거나 ‘피고인의 자백이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닐 때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증유의 유신독재헌법은 이 조항 전체를 아예 삭제해버렸다. 과거 같으면 증거로 인정받지 못할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고, 무죄가 되어야 할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검찰 신문에서 피고인들은 시위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폭력혁명 운운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극력 부인했다.
피고인들은 “자신들은 평화적인 데모를 위하여 서로 연락만 했을 뿐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사실도 없고 폭력에 의하여 정부를 전복하거나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꾀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진술하였지만, 조사 과정에서 검찰관들이 “자신들의 답변을 전혀 무시하고 그들 마음대로 적어 넣은 뒤 무인을 강요하여 날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피고인들은 한발 더 나아가 유신체제의 부당성을 당당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검찰이 묻는 대로 ‘예, 아니오’라고 수동적으로 대답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재판장은 유신헌법 비판을 금지한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하는 행위가 법정에서 발생하자 당황했다. 중단하라는 고함과 함께 퇴장시키겠다고 협박했으나 학생들은 따르지 않았다. 법정은 시간이 갈수록 소란스러워졌다. 재판은 경고, 발언 저지, 퇴정 명령, 항의와 휴정으로 얼룩졌다.
전체적인 재판 진행은 일괄해서 중앙정보부가 통제했다. 중간중간 정장을 입은 중정 요원이 단상 뒤 재판부 출입문을 통해 들락날락하면서 재판장에게 은밀하게 쪽지를 전달하거나 귓속말을 하는 모습이 빈번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긴급조치 제2호 제10항에서 “중앙정보부장은 비상군법회의 관할 사건의 정보, 수사 및 보안 업무를 조정·감독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비단 ‘수사 및 보안 업무의 조정·감독’만이 아니라 실은 재판 전체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것이 민간재판이 아닌 군사재판을 택한 이유였다. 중앙정보부는 국가 정보기관이 아니라 정권 보위를 위한 컨트롤 타워였으며 공작 본부였다.
인혁당 관련자 재판은 민청학련 관련자 재판보다 이틀 늦은 6월 17일부터 서울 필동 헌병사령부 법정에서 시작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인혁당 관련자 공판에서는 피고들이 “아니오”라고 한 대답을 “예”로 바꾸어 제멋대로 기록했다.

검찰의 사실 심리가 시작되면서 유인태는 일본인 기자와 인터뷰에서 폭력혁명을 교시받은 사실을 추궁당했다.
검사가 신문했다.
“1973년 12월 26일부터 2회에 걸쳐 일본인 기자 다치카와와 인터뷰라는 명문으로 만나서 그로부터 공작자금을 받고 폭력혁명 방법을 교시받은 사실이 있지요?”
유인태가 진술했다.
“인터뷰만 했을 뿐 폭력혁명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에 서명 날인한 사실은 있지요? 그때 검사로부터 폭행이나 협박을 당한 사실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폭행은 없었지만, 문호철 검사가 ‘너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일본과 외교 문제가 걸려 있으니 국가적 이익을 위해 일본인 관계는 공소대로 시인해달라.
이건 외교 관계에서만 쓰고 재판에는 쓰지 않는다고 검사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다’고 해놓고 인간적 배신을 했습니다.
공소 항목마다 국가 변란, 정부 전복 같은 말이 끼어 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 데모도 작년 10·2 데모와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유신 당국의 각성과 시정을 촉구하는 학생운동이었을 뿐입니다.”
황인성은 민청학련이란 명칭은 유인물의 주체로 썼을 뿐 조직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민청학련이라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조직을 통해 폭력혁명을 기도했다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유인물에 민청학련이라는 명칭을 쓴 것뿐인데 그것은 3월 말경 유인물을 만들 때 아무 단체도 쓰지 않고 백지로 낸다는 것이 학생운동 통례상 없었던 일이라 그 당시 즉석에서 제가 구상, 제안한 겁니다.
그것이 학생의 입장에서 가장 학구적이고 민주적이라고 판단되어 결정된 것이라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유인물이 나온 후에야 비로소 안 사람들도 있고 중정에서 조사받을 때 처음 안 사람도 많습니다.”
정문화도 정부 전복이란 표현은 수사기관에서 처음 들었다고 진술했다.
“중정 수사 과정에서 ‘너희들이 반정부 데모를 벌여 정부를 전복하고 궁극에 가서 노동정권을 수립하려 했으니 인정하라’고 강요를 받았으나 그런 사실이 전혀 없어 부인했으며, 검찰에서도 강력하게 부인했음에도 도대체 그런 말이 왜 자꾸 나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검사가 김효순을 추궁했다.
“피고인은 1974년 3월 23일 18시경 주거지에서 상 피고인 이근성과 투쟁 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시민과 노동자, 농민을 선동시킬 수 있는 노래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쾌히 수락하여 피고인이 평소 애창하고, 혁명 정신으로 피의 항쟁을 고취하고 노동자의 투쟁을 선동하는 북괴의 ‘혁명가’와 ‘우리들은 노동한다’ ‘학원수호가’ ‘탄아탄아’ ‘붉은 태양 솟아오르는’ ‘스텐카라친’ 등 별지 제6호의 내용과 같은 도합 13곡의 가사를 대학 노트 2매에 수록, 제공한 적이 있지요?”
김효순이 진술했다.
“검사님이 북괴의 혁명가라고 하는 ‘날아가는 까마귀야’라는 노래는 북괴의 혁명가가 아니라 3·1 운동 무렵 만주 독립군들이 항일운동을 하면서 부르던 독립군가입니다. 이는 ‘사상계’ 1970년 3월호 ‘회상의 항하’라는 글에도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스텐카라친’은 러시아 농민들의 민요이고, ‘학원수요가’나 ‘탄아탄아, 우리들은 뿌리파다’ 같은 것은 대학 데모때 늘 부르던 노래일 뿐입니다.
이제 와서 갑자기 북괴의 노래로 둔갑시킨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검사는 이근성에게 북한 대남방송을 들은 사실을 추궁했다.
“피고인은 12월 27일 21시경 주거지에서 피고인들이 결성한 조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정부 전복을 위한 활동 상황에 대한 북괴의 평가와 국내 불순 세력의 동향을 확인하기 위하여 라디오로 북괴의 위장 대남방송인 ‘통일혁명당’ 목소리 방송을 통하여 ‘남반부 주부 여러분, 물가고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라는 제목의 선동 방송을 청취한 적이 있지요?”
이근성이 진술했다.
“저는 북한 대남방송을 들은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중정에 가기전부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구타를 당해 그 후 온전한 정신상태에서 정상적으로 진술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정에서 이북방송을 들은 것으로 하라고 하도 강요하기에 내가 12월 말경 서울 집에서 들은 것으로 했는데. 사실 그때는 서울에 있지도 않았고 시골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확인해 보시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나병식은 검찰관이 조사 과정에서 “농민·노동자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식의 질문을 해서 “그렇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나중에 이를 구실로 공소장에 “노농정권 수립을 획책했다”는 식으로 억지를 썼다고 주장했다.
이현배에게는 공산주의 계열 불온서적을 소지한 사실이 있느냐고 추궁했다.
“저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입니다. 군인은 총으로 국가를 지키고 학자는 학문으로 국가를 지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게 학자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공과 관계되는 자료를 넓게 구하여 읽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불법으로 구한 자료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책도 문화공보부 장관의 승인을 받은 종로1가 유명 해외서적 센터에서 정식으로 수입 허가를 받아 판매하는 책을 구입한 것입니다.
이게 불온서적이라면 그런 책을 살 수 있게 수입 허가를 내준 당국의 책임이지 모르고 산 저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검사가 말했다.
“피고인, 설사 당국이 실수로 불온서적 수입을 허가했더라도 불온서적을 발견하면 신고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피고는 북괴의 불온 삐라를 습득하면 이걸 막지 못한 당국 탓만 하고 신고 안 합니까?”
이현배가 말했다.
“불온서적을 입수하고도 신고 안 한 것도 죄라 하는데, 공산주의 선전 유인물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저 자신도 신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정식 수입하여 판매한 것인데 어떻게 불온서적인 줄 알겠습니까?
그런 책을 살 수 있게 한 것은 수입 허가를 내준 당국의 책임이지 모르고 산 저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이현배가 반공법 4조 1항에 걸린 이유였다. 학생 신분이 아니면서 반공법에 걸린 자는 석방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그는 이 책 한 권으로 징역을 3년 6개월 더 살게 되었다.
사정이야 어떻든 사람들이 꽉 들어찬 여름의 재판정은 한마디로 찜통 속을 방불케 했다. 헌병의 호위로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는 피고인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땀을 비오듯 흘렸다.
6월 중순의 초여름 날씨는 재판정의 열띤 설전과 공방으로 한여름의 폭염으로 변해갔다. 공판이 진행될수록 학생들의 투쟁에 대한 정당성 주장과 검찰관의 유신정권 옹호론이 서로 충돌하여 점입가경이었다.
검사가 질문을 하였다.
“학생들에게 극한 투쟁을 하라고 선동한 사실이 있느냐?”
김지하가 대답했다.
“학생 운동은 사회를 위한 학생들의 순수한 기여 방법입니다. 데모는 학생 운동의 전부는 아니고 학생 운동의 한 방법일 뿐입니다. 학생 운동 모두를 철없는, 불순한 행동으로 매도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하는 극한 투쟁이란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학생 데모로 정부가 전복된다고 학생들도 생각하지 않고,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우리가 잡혀 와 모여 앉아 있는 이것이 우리의 운동 방법이고 우리의 극한 투쟁입니다. 이 점 잘 이해해두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은 법정에서 자신들의 정당한 이론을 당당하게 역설했다. 불꽃 튀는 설전과 공방전으로 검사가 오히려 궁지에 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재판 자체는 그들의 의도에 따라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군사정권이 잘 사용하던 ‘속전속결’이라는 구호를 그대로 실천하는 듯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곽성문은 검찰이 신청한 증인으로 나와서 송종의 검사의 질문에 답변했다.
“국사학과 선배 황인범과 4·19 직후 통일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황인범이 북한의 대남 적화와 통일전략에 찬동하는 말을 하는 걸 들은 사실이 있지요?”
“네, 있습니다.”
곽성문은 이런 식으로 검찰의 질문에 대해서 모두 시인했다.
담당 경찰관이 말했었다.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하게! 네 친구들도 속 차릴 놈은 다 차리더라. 학생회장이라는 녀석과 친구들이 지들은 살겠다고 다 불고 갔는데. 걔네들이 정보부에서 자기들을 쭉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걱정이 돼서. 그 애들 중에 5국장과 친척되는 친구가 있다데. 5국장한테 제 발로 찾아와서 다 불고 갔다는 거야. 걔들이 불어서 한강 절두산 밑에 가서 한 놈 잡아 오기도 했는데 뭘.”

통방
김지하 시인이 말했다.
감방의 뒤편 변기 바깥쪽 창문으로 다른 감방의 벗들과 소통하는 것이 통방이다. 감방에서의 유일한 낙은 면회, 즉 접견과 통방일 터이다. 아직 선고가 나오지 않았을 때, 왼쪽으로 한 방 건너 지금은 목사님이 된 서울대 법대의 김경남 아우, 그곁에 기독교사회운동의 맹장 황인성 아우, 오른쪽으로 한 방 건너 한때 지하철노조위원장을 하다 지금은 녹색교통을 시작한 정윤광 아우, 그곁에 지금 국회의원인 장영달 아우, 아래층 왼쪽으로 두 방 건너 지금 ‘조선일보’ 주필인 유근일 선배, 오른쪽으로 두 방 건너 인혁당 하재완 씨 등이 살고 있어 좋은 통방 이웃을 이루었으니 매일같이 통방, 통방, 통방이었다.
혹간 가다 구치소 간부에게라도 걸리면 다시는 안하겠다고 약속한 뒤 돌아서자 마자 그일을 가지고 또 통방! 그렇다. 통방으로 해가 떠서 통방으로 해가 지는 통방 징역이었다.
통방! 그것은 유신시절의 매스컴이었던 ‘유비통신’(유언비어를 그렇게 불렀다)처럼 우리의 ‘서대문통신’이었다. 각자의 집안 소식, 친구 소식에서부터 정세 분석과 철학 강좌까지 별의별 섹션이 다 갖추어진 거의 완벽한 매스컴이었으니 누가 이것을 녹음이라도 했다가 풀어 CD로 내거나 출판했다면 틀림없는 떼돈감이었다.
그러나 그 통방도 사형을 선고받자 마자 그날로 잡범들과 합방시켜버려 자취를 감췄다. 1.75평의 좁은 공간, 더운 초여름 날씨에 8명씩 들어앉아 있자니 그보다 더한 지옥은 없는 성싶었다.
내 생전 ‘생태학적 필요공간’이라는 말을 처음 실감했을 때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전선줄에 늘어앉은 참새와 참새 사이보다 더 좁아서 맨살이라도 살짝 닿는 날이면 “개새끼! 소새끼!”하며 말싸움이 벌어지기 일쑤고, 서로 눈길이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씹할 놈아! 뼉할 놈아!”하고 대판 주먹질이 오가기 십상이었다.
나는 어엿한 감방장으로서 치국평천하의 책임을 져야 했다. 참으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하도 안 풀려 천하태평의 도를 공모했다. 세 사람 입에서 한 마디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강아지!”
그렇다. 강아지만이 태평의 도였다. 강아지란 담배의 은어이다. 나는 그 날로 청소 담당 기결수와 담배거래를 시작했다. 내 영치금에서 그 값을 빼내가는 순 왕도둑 장사, 엄청나게 비싼 장사였다. 그러나 강아지가 한 모금씩 돌고 나면 8명의 나팔들이 일시에 빙긋이 미소지으며 눈을 게슴츠레하니 뜨고 일대 평화와 정적의 낙원으로 들어갔던 것이니, 범법임을 뻔히 알면서도 강아지 거래를 끊을 수 없었다.
그러다 한번은 간부에게 걸려 보안과까지 가서 시말서를 썼다. 그러나 돌아오자 마자 계속되었으니 아아! 평화란 얼마나 값지고 고귀한 것인가! 체호프의 ‘담배의 해독에 관하여’를 압도하는 ‘담배의 미덕에 관하여’를 언젠가는 집필하리라는 꿈마저도 꿀 정도였다.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어느 날 누군가 가래 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나는 삥끼통(감방 속의 변소)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물었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하재완입니더.”
“하재완이 누굽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인혁당입니더”하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아항, 그래요!”
4상 15방에 있던 나와 4하 17방에 있던 하재완 씨 사이의 ‘통방’이 시작되었죠.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물론 가짜입니더”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하고 나는 물었죠. “고문 때문이지러”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저런 쯧쯧”하고 내가 혀를 차는데, “즈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더”하고 하씨는 덧붙이더군요.
“아항, 그래요!”
그 뒤 7월 언젠가 ‘진찰’(구치소내의 의무과 의사가 재소자들을 감방에서 꺼내어 줄줄이 관구실 앞에 앉혀놓고 진찰하는 일과) 받으러 나가 차례를 기다리며 쭈그리고 앉았는데, 근처 딴 줄에 앉아 있던 키가 작고 양 다리 사이가 벌어지고, 약간 고수머리에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고, 왕년에 주먹께나 썼을 것같은 사람이 나를 툭 치며 “김지하 씨지예”하고 묻더군요. “그렇소만 댁은 뉘시유”하고 내가 묻자. 그 사람은 “지가 하재완입니더”하고 오른손 엄지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지 않겠어요.
“아항, 그래요!”
이렇게 해서 잠깐 만난 실물 하재완 씨는 지난번 통방 때와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교도관 눈치 열심히 보아가며 낮고 빠른 소리로 내게 말해주더군요.
마치 지옥에서 백년지기를 만난 듯 내 어깨를 꽉 끌어안고. 그러나 내귀에는 마치 한이 맺힌 귀곡성처럼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그 가래 끓는 숨소리와 함께 열심히, 열심히.
또 그 무렵 어느날인가 출정하다 한 사람이 나에게 “김지하씨지요”하고 묻더군요. “네. 그렇습니다만…”하고 대답하자 “나 이수병이오”하고 말합디다.
“아하, 그 ‘만적론’을 쓰신 이수병 씨요?”
“네.”
“어떻게 된 겁니까.”
“정말 창피하군요. 이거 아무 일도 나라 위해 해보지도 못한 채 이리 끌려들어와 슬기로운 학생운동 똥칠하는 데 어거지 부역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미안합니다.”
“아항, 그래요!”
나는 법정에서 경북대학교 학생 이강철의 그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잘 아는 것으로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 차례나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소위 인혁당이라는 것이 조작극이며 고문으로 이루어지는 저들의 전가비도傳家秘刀의 결과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뒤 어느날, 나는 감방벽에 기대 앉았어요. 한없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끝없는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어요.

내 피를 부른다
거절하라고
그 어떤 거짓도 거절하라고.

거절하라고? 그래요. 거절이죠. 어둠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빛 속에 드러내라고? 거짓을 거절하라고? 그래요. 힐덜린의 시에 있어서의 그 빛의 수수께끼. 그것은 바로 이 거절이었어요. 정말 그래요.

김지하는 계속 도망다니다가 1974년 4월 25일 흑산도의 예리 여관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흑산 파출소 소속 경찰을 따라 배에 올랐다. 수갑에 묶인 그의 손은 목포에 도착한 내내 선장실 쇠창살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상경하여 끌려간 곳은 그 무시무시하다는 중앙정보부 제6국 지하실이였다.
긴급조치 4호 선포 며칠 뒤인 4월 19일 맏아들이 태어났지만 그는 이 소식을 뒤늦게 감옥에서 들었다.


4. 1974년 7월 9일, 결심 공판

첫 공판을 시작한 지 24일 만인 7월 9일, 이철, 유인태 등 32명에 대한 결심 공판이 열렸다.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죄였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적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법규는 모조리 갖다붙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형량이 무거운 조항만 골라 적용시켰다. 그때 김일성을 잡아다 재판을 했다고 해도 그 이상의 죄목은 더 달지 못했으리라.
검사가 구형을 하였다.
“피고인들은 4월 3일 전국 각 대학과 연합하여 일시 다발적으로 봉기하여, 유혈사태를 유발하여 폭동화시킨 후 폭력혁명을 하기로 모의하는 등 국헌을 문란케 하고 국가 변란을 기도했으므로
비록 대부분이 학업 도상에 있는 자들이나 죄질이 극악하므로 엄중히 처벌하고, 특히 그중 수괴에 종사한 자들에 대해서는 극형에 처하여 자유 민주 사회에서 영구히 제거하는 게 마땅하다고 사료되는 바입니다.
피고인 이철, 유인태, 동 여정남, 동 김영일, 동 김병곤, 동 나병식, 동 이현배를 사형에 처해주십시오.”
잠시 법정 안은 시간이 영원히 정지한 듯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정적만이 흘렀다.
“피고인 정문화, 황인성, 서중석, 안양로, 이근성, 김효순, 유근일을 무기징역형에, 피고인 정윤광, 강구철, 이강철, 정화영, 임규영, 김영준, 송무호, 정상복, 이직형, 나상기, 서경석, 이광일을 징역 20년 자격정지 15년형에, 피고인 구충서, 김정길, 이강, 윤한봉, 김수길, 안재웅을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에 처해주십시오.”
검사의 입에서 사형, 무기징역 등 무시무시한 말이 떨어지자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한 학생도 있었고, 설마 했다가 충격을 받은 학생도 있었다. 피식하고 웃는 학생도 있었다.
사형 구형에 가장 어이없어했던 것은 김지하와 이현배였다. 실제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한 일이 거의 없는 데다가 후배들 몇 번 만난 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본인들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놀랐다. 아마도 민청학련의 배후 조종 세력으로 4·19세대와 6·3세대를 상징하는 두 사람을 사형 명단에 넣어 구색을 갖추려는 정권의 무리한 시도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이미 그 전날 같은 시각 필동의 제2심판부 법정에서는 제2차 인혁당 사건의 판결 선고가 있었다. 검찰관이 구형한 그대로, 사건 관련자 21명 중 서도원, 도예종 등 8명에게는 사형을,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을, 나머지 피고인 6명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하였다. 이 천인공노할 판결은 그 후 바뀌지 않았고, 당사자들은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학생들이 예상보다 엄청난 구형을 받자 이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변호인들은 피고인보다 더 당황하고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충격을 가라앉히고 피고인들을 구하고자 있는 힘을 다해 발언했다. 황인철 변호사는 끝까지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논리
작성일:2019-02-27 14:38:13 14.32.9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