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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선> 1987년 7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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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7-12-22 13:57:34
조회수
690
1987년 7월 5일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시위대를 향해 일명 지랄탄이라고 하는 다발탄 페퍼포그와 최루탄, 사과탄이 연이어 무차별 발사됐다. 교문에서 300여 미터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서 있던 쇠파이프를 든 백골단이 격한 괴성을 내지르며 교문 바깥쪽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시위대를 향해 군홧발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면서 진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깨동무를 하며 촘촘히 짜여 있던 시위 대열이 무너졌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던 학생들의 대오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학교 안으로 뛰기 시작했다. 마스크와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렸지만 쉴 새 없이 터지는 최루가스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뿌연 최루가스가 백양로를 따라 학교 안으로 연기처럼 빠르게 퍼져갔다.
그는 전투경찰에 쫓겨 교문 안으로 들어갔다. 자욱한 최루탄 가스 사이로 학교 안으로 도망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총탄처럼 퍼붓는 최루탄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어서 앞서 달리는 학우의 발만 보고 걸었다. 집회에 참석했던 천여 명의 학우들 중에는 학교 안으로 쫓겨 들어가면서도 구호를 외치거나 운동가요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였다. 요란하게 쏟아지는 최루탄이 그의 뒷머리 밑에 박혔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빙빙 돈다. 그 순간 시간은 멈춰버렸고 온 세계가 정지해버렸다. 그는 온몸에 최루가루를 뒤집어쓴 채로 쓰러졌다. 뒷머리와 코에서 피가 줄줄이 흘러내린다. 머리가 부서질 것처럼 아프고 온몸에 감각이 마비된 듯하다. 뒤를 따라 교문 안으로 들어오던 한 학우가 달려가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서너 명의 학우들이 주위로 몰려든다. 그는 발작을 하듯 몸을 떨고 있었다. 그들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그를 붙잡고 뛰었다. 그의 뒷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얼굴을 타고 떨어졌고 코에서도 피가 쏟아졌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전투경찰은 일사불란하게 시위를 진압했고 학생들은 도망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경찰들도 너무 지쳐있었다. 온몸이 뻣뻣했다. 눈꺼풀이 나른하게 감겨온다.
여름은 슬프다.
여름의 파란빛은 더욱더 여위어가고 짙은 회색의 잿빛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여름 오후의 비스듬한 석양 때문에 너무 눈부시지도 않고 너무 어둡지도 않은 시각이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멈춘다. 언제부터인가 상상력은 고갈되어 버렸다. 감각의 예리함은 사라졌다. 이제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야만 하루하루 버틸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아주 긴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 오늘은 힘든 하루였다. 슬프고 더럽고 추한 하루였다. 어떻게 이 하루를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하루를 절대 다시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코피는 멈췄고 뒷머리에서 흘러내리던 피도 멎고 있었지만 그는 온몸을 쥐어뜯으면서 괴로워했다. 응급실까지 업고 온 학우가 집 전화번호를 묻자 그는 더듬더듬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며 힘겹게 말했다.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
의사가 와서 눈을 뜨라고 말했지만 이미 정신을 잃었고 그의 몸은 조금씩 굳어져 가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그날, 6월 9일부터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혼수상태로 27일 동안 사경을 헤맸다. 혼수 상태에서 가끔 의식을 되찾는다. 그때 그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는 어디로 표류하고 있었을까. 여전히 그 순간의 미몽과 악몽 속을 헤매고 있었을까. 절망과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을까. 아니면 어떤 꿈과 희망, 구원의 불빛을 보았을까.
6월 22일, X선 촬영 결과 합병증세인 폐렴 증후가 발견되어 항생제를 투여하고 기관지 절개 수술을 실시했다. 기관지 절개 수술로 폐렴 증세가 약간 호전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다른 환자로부터 세균 감염을 막기 위해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중환자실 격리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계속 폐렴이 크게 악화되었고 혈압은 50~80으로 떨어지고 맥박은 100으로 상승했다.
7월 5일, 0시 30분쯤 갑자기 혈압이 떨어지면서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새벽 1시경에는 심장 정지 빈사 상태에 빠졌다.
1966년 8월 29일 태어나서 1987년 7월 5일 일생을 마감했다. 21년 남짓 생을 살다가 간 것이다.
너무 짧은 생이었다.
희뿌연 한 공기를 가르며 직선으로 날아든 SY44 최루탄이 뒷머리를 강타했고 쇳조각이 숨골에 박힌 것이다. 그런데 최루탄 총신을 개조하지 않고서는 사람 뒷머리를 맞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루탄 총신은 원래 45도 이상의 각도로 쏘아야 발사가 된다.
그가 최루탄을 맞은 시간은 그날 오후 5시경이었다. 저녁나절이었지만 여름이었기 때문에 대낮처럼 환했다. 그해는 서머타임이 시행되었다.
역사를 창조한 죽음은 민주주의 청사에 불멸의 빛이 되었다.

피로 얼룩진 땅, 차라리 내가 제물이 되어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다.
작성일:2017-12-22 13:57:34 121.138.19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