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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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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단편선> 문화재보호법 제92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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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7-07-07 12:51:29
조회수
883
문화재보호법 제92조


그날 한남동 언덕길에 강바람이 세게 불었다.
한남동의 언덕 꼭대기에 있는 붉은 타일 지붕을 얹은 단독주택이다. 대문의 콘크리트 기둥에는 徐經石이라는 낡은 나무 문패가 걸려있다.
거실의 천장에는 검은 색 전등갓이 씌어 진 백색 등이 달려있고 커다란 책상 위에는 아직도 켜있는 컴퓨터 화면이 눈을 깜빡이며 졸고 있으며 많은 고서적들이 어지럽게 쌓여있는데 (책들은 탁자, 의자, 방바닥 구석, 창턱에도 쌓여있다.) 마시다만 커피 잔에는 커피 찌꺼기가 눌러 붙어 있다. 5단 책장에는 수백 개는 됨직한 작은 모조품 불상들이 꽉 들어차있고 거실 여기저기에는 목각 인형과 백자와 청자, 고대의 빗살무늬와 번개무늬 토기들이 널려있고 육각형 유리병에는 쥐 수염으로 만든 붓과 연필이 빼곡히 꽂혀있다. 한쪽에는 어려운 한자를 일필휘지로 휘몰아 쓴 한지들이 겹쳐있고 벽에는 태피시트리로 짠 거대한 탱화가 걸려있다.
덧창이 열려있는 창문으로 차가운 회색 달빛이 부서지고 있다.
현자처럼 보이는 명예 교수는 늙어가면서 몸이 오그라들었고 등은 약간 굽었다. 완전히 백발이었고 얼굴에는 세월이 남긴 깊은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헐렁한 옷차림을 하고 있고 발에는 낡은 슬리퍼를 신고 있다. 말을 할 때마다 노교수의 입에서는 위장병이 걸려서 나오는 역한 입 냄새가 났다.
“교수님…… 아니면 박물관장님, 대학 부총장님,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님, 고고학계의 원로 학자님 등등 어떻게 호칭을 해야만 할까요?”
“그건 모두 옛날 일이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네. 젊은이 마음 내키는 대로 부르게나”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데요.”
“여보게 …… 늙으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네. 여자들이 먼저 떠나지. 영장류 중 1년 내내 발정을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니까, 그래서 ‘호모 섹슈얼리스’라고 하는 거야.”
“그러면, 교수님은 젊어서 미남에다 키도 훤칠했으니까 이 여자에서 저 여자로 미친듯이 쫓아다녔단 말씀인가요?”
“그렇다네. 나는 심미주의자이거나 유미주의자이겠지. 진짜 예술품 감정가인 거지. 이 세상에서 어느 여자도 같을 수 없다네. 지금 관능적 쾌락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게. 여자 수만큼이나 다양하다니까. 흥분도 다르고 그래서 매번 더 자극적이라네.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것은 다른 육체, 다른 숨소리, 다른 몸짓을 만나는 것이니 얼마나 짜릿하겠는가.
걸리는 여자마다 모두 ……. 때론 여자를 굴복시키려고 여자의 약점을 잡고 늘어지기도 했지. 그러니까 여자는 정복이나 수집의 대상인거지. 여자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니까. 나는 아름다움의 수집가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말일세…… 아주 어려서부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안증에 몹시 시달렸다네. 내가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 불안증을 달래주는 것이라네. 여자의 푹신한 육체는 아주 아늑하거든. 그래서 여자가 필요한 것이지, 그렇다네. 그러나 지금은 이 처참한 몰골을 보게나. 늙으면 별 수 없지. 그러니까 여자들은 기겁을 하고 다 도망갔다네.
그나저나 이걸 좀 풀어주면 안되겠나. 몸을 옥죄니 숨이 차구만. 손목이라도 풀어주게나. 담배가 피고 싶네. 내가 지금 어디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지요. 담배는 피워야겠지요.”
노교수의 콧구멍에서 희미하게 빠져나온 두 줄기 담배 연기가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노교수는 받침 접시에 중간쯤 피다만 담배를 비벼 끄더니 새로 한 개비를 꺼내서 불을 붙인다.
“교수님 말입니다, 저는 이따위 도자기 몇 개를 빼앗으러 찾아온 게 아니지요. 저도 쥐구멍에 쨍하고 볕 뜰 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게는 한번이라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노교수는 오랜 침묵이 흐른 뒤 조금은 진정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럼, 도대체 뭘 원하는 가?”
“진짜가 있지요, 진짜……. 잘 아실 텐데요.”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구먼.”
“왜 이러세요? 다 알고 왔단 말입니다. 제가 강도와 절도 전과가 5범이고 감방에서 10년 이상 썩었지요. 그때 교도소 감방 동료가 이야기 했단 말입니다.
말씀드리자면 그분은 내 남자 애인이었어요. 뼛속까지 게이였거든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제가 여자였고 그 분이 남자 역할을 했지요.
그런데 감방에서 원인 불명의 병으로 골골 앓더니만 갑자기 죽었지요. 38살의 한창 나이에 말입니다. 그때 교도소 돌팔이 의사는 소화제만 처방했고요. 죽자마자 교도소는 연고자가 없다는 이유로 즉시 화장을 해버렸어요. 뭔가 모르지만 뒤가 구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분이 죽기 직전에, 그제서야 나에게 비밀리에 털어놨지요.”
“뭘, 털어놨다고?”
“교수님이 1983년인가 부여에서 청룡사지 발굴 사업을 감독하면서 그 발굴 작업을 현장에서 지휘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이 사진들 좀 보세요. 그 당시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됐지요.”
“그건 맞는 말이네. 그때 내가 국립문화제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그 작업을 지휘했었지. 신라가 백제를 침공한 후 그 절을 깡그리 불태워 버렸는데 그때 처음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을 시작한 것이지. 그런데 아주 큰 성과를 얻었다네. 백제사를 새로 써야할 만큼 대단한 성과였지.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니까, 무엇보다도 소문만 무성하던 청룡사의 규모와 가람 배치를 규명하였는데 경주 황룡사 터와 맞먹을 만큼 컸던 거야.
내가 그 작업을 책임지고 지휘하게된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네. 가문의 영광이었고 대단한 명예였지. 그 작업이 끝난 후 국가 훈장도 받았다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당시 교수님은 은밀하게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지요. 쥐도 새도 모르게 말입니다. 안 그런가요? 고고학계의 원로 학자로서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한데……. 그건 오해야, 오해라고.”
“끝까지 오리발 내미는군요. 제가 가시 철조망이 겹겹이 쳐진 집으로 어떻게 넘어왔겠습니까. CCTV는 미리 돌려 놓았지만 말입니다. 왜 그렇게 철통같이 해놨지요?”
“마누라가 몇 년 전에 죽고 나서는 혼자 살기가 너무 무서웠다네. 불면증과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지. 그러니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야.”
“사모님이 돌아가신 게 천만다행이겠군요. 이 험한 꼴 안보고 돌아가셨으니까. 그런데 여전히 절 속이고 있군요. 엉뚱한 말씀 그만하시지요. 그게 그 물건 때문 아닙니까?”
“우리 집 보물은 그 도자기들이네. 그래 봬도 고려시대 비색청자이고 이조시대 분청사기라네, 진품이라고. 그게 전부야. 이왕 담을 넘어 왔으니 그것들을 가져가게나. 잘 팔면 1억은 받을 수 있을 것이네. 도둑놈이야 빈털터리에다가 기댈 곳 하나 없겠지. 그러니까 담을 넘어온 게 아닌가.”
“전 1억짜리는 필요 없지요. 그까짓 거는 좀도둑이나 주시지요. 전 그게 필요합니다. 어디다 숨겨놨지요? 집안 어디에?”
“난 모르는 일이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게. 나는 마누라가 죽고 난 후 종교를 바꿨네. 지금은 성당에 나가고 있지. 나는 성경 말씀이나 십계명을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것을 지독히 싫어한다네. 그러니까 천당에 갈 수 없는거지.”
교수의 창백한 얼굴에 옅은 홍조가 어리다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는 개정판 성경책과 성가집, 놋쇠로 만들어진 성물들이 불교의 성물들과 혼재되어 있는 상태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노교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해서 정확하게 알아 들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군요. 비상한 수단을 쓰는 수밖에. 이 칼을 쓴다는 말입니다. 예리한 칼날이 이리저리 쑤시면 견디기 힘들 텐데요.”
“제발 칼을 치워주게. 나는 마누라가 죽은 후 혼자 살면서 몸이 너무 부실하다네.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하며 살고 있는 게 신기하지. 꼭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불상에 대한 상세한 도록을 만드는 일이라네. 그건 전문가 중에서 전문가인 나밖에 할 사람이 없지.
이 작업을 위해 자료 수집차 인도와 중국, 일본, 티벳, 태국, 심지어 그리스까지 여러 차례 다녀왔다네. 내가 이미 불교 고고학과 불상에 관한 수많은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지만 필생의 역작이 될 걸세. 컬러 도록은 2000쪽이 넘을 거라네.
지금도 이 힘든 몸을 이끌고 일주일에 두 번씩 연구소에 나가 그 연구를 이끌고 있다네. 재벌 기업의 문화복지재단이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덕택에 가능한 일이었네. 재벌도 가끔 좋은 일은 한다네.
하지만 기억상실증이나 치매에 걸리기 전에, 죽기 전에 반드시 끝마쳐야하지. 그래서 그 희귀한 도록이 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는 내가 살아있어야 한다네. 지나간 과거의 시간이 아무리 소중하다고 한들 현재 이 순간 만큼일 수는 없는 거라네. 이해하겠는가?”
“그렇지만…… 그 도록에 그 귀중한 물건만은 빠져야 하니 정말 안타깝군요.”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땀이 흐르는 얼굴을 닦고, 목덜미와 손등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퀴퀴한 노인 냄새가 나는 거실을 돌아보았다. 그는 독한 술을 몇 모금 꿀꺽꿀꺽 삼켰고 심한 기침이 나왔다. 맹렬한 술기운이 척추 뼈를 타고 온 몸에 흐른다. 두툼한 낡은 회색 카펫이 깔려있는 바닥으로 술병을 내리치자 유리 파편이 튕긴다.
“교수님의 천인공노할 범죄 사실을 알게되면 그래도 재단에서 자금을 계속 지원하게 될까요. 당장 손을 끊겠지요. 그러면 필생의 역작은 불가능한 것 아닙니까.
저에게도 필생의 작업이 있지요. 바로 그 물건 말입니다. 제가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는 격입니다만…….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는 국보 제78호로 지정된 금동 반가사유상이 있는데 일본에는 역시 일본 국보인 주구사가 소장하고 있는 목조 반가사유상이 있지요. 미륵보살님이 깊은 사색에 잠겨서 은은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른손 손가락을 뺨에 댄 채로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린 모습이 서로 닮았다는 말입니다. 그 무렵 백제 불교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그 원형의 도형이 함께 일본에 전해졌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백제에는 이미 몇 십 년 전에 이들 반가사유상의 원형인 청동 반가사유상이 있었고 그게 신라와 일본으로 각기 전해졌고 그 원형을 본떠서 확대해 만든 것이 일본 국보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그 물건은 원형이라는 말입니다. 훨씬 정교하고 섬세한 것이지요.
교수님이 백제 불교가 일본으로 이동한 경로에 관해 쓴 어떤 책에서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청동 반가유상을 여태까지 발견하지 못한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더군요.
그게 청룡사지 발굴 당시 교수님이 꺼냈고 그것만은 쉬쉬하면서 감쪽같이 숨기신거죠. 그걸 제 연인은 혼자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송기태가 기억나십니까? 그때는 아마 27살쯤 되는 팔팔한 나이였겠지요.”
“글세 말일세. 언제적 일인데…… 가물가물하군.”
“교수님은 거짓말을 할 때마다 티가 나는걸 모르시겠습니까? 얼굴이 달아오른다구요.”
“너무 지레 짐작하지 말게나.”
“그 사람은 발굴 현장에서 대형 크레인의 기사로 일했습니다. 그가 30톤 무게의 목탑 터 심초석을 대형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 것이지요. 그때 교수님 혼자서 심초석 밑으로 들어가서 유물이 묻혀있는지 여부를 샅샅이 훑었다고 하더군요.
심초석 안에는 교수님 예상대로 적심석이 설치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청동거울과 청동그릇 그리고 금동귀걸이, 백제 항아리 등 수천여점의 유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딱 하나 그 물건만은 숨겨놓은 채 다른 유물들은 전부 공개하였지요. 이 사진을 좀 봐 주세요. 그때 교수님 자세가 다소 엉거주춤하지요. 그게 그 물건을 숨기는 모습이였지요. 제 연인은 그걸 크레인의 운전석에서 내려다 본 것이지요. 그때 백제 불상이 나올 거라고 기대했는데 나오지 않아서 알게 모르게 의아해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송기태는 그때 군산에 있는 항만 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건설회사에서 크레인 기사로 일했다. 어느 날 그가 털어놨다. 그날 밤 동거녀와 밤늦게 까지 술을 마시다가 끝내 거친 말들이 오고갔는데, 그 여자가 ‘용서 좋아하시네. 남자 구실도 못하는 주제에…… 넌 호모라고…… 진짜 호모. 병신같은게.’ 라고 말했고, 그가 화가 나서 술병을 바닥에 던져 박살을 내고 나서 여자의 뺨을 서너차례 세게 때렸다. 그리고 ‘니 지금 죽기 싫으면 당장 짐싸가지고 나가라’고 소리쳤다. 여자가 갑자기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나와 발악을 하며 위협했다. 그가 여자의 손목을 낚아채서 칼을 빼앗아 그녀의 눈을 겨냥해 허공에 휘두르다 어느 순간 목 부위 경동맥을 찔렀다. 붉은 피가 바닥에 흥건히 흘러내렸다. 검사는 살인을 강하게 의심하였다. 개업한 지 불과 몇 개월밖에 안된 부장검사 출신의 변호사가 상해치사로 마무리하였고, 그는 5년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그가 말했었다. ‘글세, 진실을 말하자면 그건 살인이였을거야. 정확히 겨냥했거든. 그 여자가 죽도록 미웠으니까.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참이야.’
“허허…… 그렇게 되었지. 그 보물은 국보급 중에서도 국보급이 되겠지. 가격으로 치자면 수백억 원이 될 것이라네. 아마 가격을 산정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그렇지. 일본 쪽에서는 더욱 환장하겠지. 자기들 국보의 원형이니까.
내가 그때 눈이 멀어가지고…… 그걸 보는 순간 내 눈을 한 동안 의심했지. 그래서 감쪽같이 처리하였다네. 그건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서만 감상해야했어. 너무 아름다웠으니까 말일세. 백제 금속공예기술의 극치 였던거야. 모방품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원형의 아름다움이였으니…….
아무리 창조적 모방 혹은 절대적 모방이라도 원형에는 조금 못 미치는 법이니까. 나는 극히 미세한 그 차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네. 그 차이를…… 그 아름다움을…….
나는 자신을 합리화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 만큼 강력한 거짓말은 없다네. 안타깝게도 나는 계속 자신을 속여야만 했지.”
“도둑질한 물건의 존재에 대해 여태 입도 뻥긋하지 않았나요? 엉겁결에라도 말이지요. 아니면 잠꼬대도 하지 않았나요? 사모님도 모르고 있었던가요?”
“여자의 입은 믿을 수가 없다네. 그건 그렇고, 마누라한테도 체면은 차려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그걸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었겠어. 거짓말을 주워섬길 수도 없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었다네.”
“오랫동안 혼자서만 그걸 감상하셨군요. 전 국민이 보아야 할 것을 말입니다. 죽고 난 후에 어쩔 셈인가요? ”
“내 무덤 속으로 함께 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그걸 내 놓으시면 비상한 수단을 쓸 필요가 없겠지요. 입을 열게 하려면 잔인한 고문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총은 없지만, 예리한 칼과 염산이 가득 들어있는 병은 가지고 있지요. 어차피 내 놓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게 국보인지 뭔지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오직 돈 문제이지요. 지금쯤은 안락한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자면 충분한 돈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큰 돈을 벌 길은 이것 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건 안 될 걸세. 차라리 그 칼로 내 가슴을 찔러도 말일세.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게. 차라리 이 집에 불을 질러서 함께 타버리겠네. 불은 인간이 발견한 가장 훌륭한 정화제라네.”
“저기 검은색 커다란 금고가 있군요. 금고는 불에 안 탈텐데요.”
“금고에는 보관하지 않았다네. 그건 어리석은 일이지”
“늙은 노인네들의 아집과 옹고집은 정말 불쾌하지요. 저는 교수님을 죽이고 싶진 않군요. 필생의 역작을 완성할 기회를 드리고 싶군요. 그 대신 이 모든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겠습니다. 그건 간단하지요. 그 자세한 내용을 정리해서 신문사에 팩스로 보내면 되거든요. 그러면 기자들이 특종을 하기위해서 득달같이 집으로, 연구소로 달려오겠지요.
모든 사실이 까발려지면 교수님은 뭐가 되겠어요? 평생 쌓아온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결국 감방에 가서 몇 년 살다가 죽어서 나오겠지요. 그 물건 역시 국가가 압수해 갈 것이고요.
나같이 미천한 사람도 감방은 살 곳이 못 되던 군요. 그런데 10년을 넘게 살았죠. 그 절망의 좁은 공간 속으로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네요. 하여간에 빨리 선택을 하십시오.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노교수 얼굴에 분노와 살기가 어렸다. 노교수는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잠깐 바라보았다.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를 차갑게 쏘아보다가 다시 표정을 누그러뜨린다. 노교수는 의자에 묶여있는 몸을 꿈틀거렸다. 하얗게 센 굵고 긴 눈썹을 씰룩거리며 깊이 숨을 들여 마시며 억울함을 삼키고 있다.
“현명하게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타협이 필요하지요 물건을 저에게 건네면 명예도 보장해 드리고 평생의 역작도 보장해 드리지요.”
“그래, 그렇군. 자네 말이 맞는 거 같군. 도둑놈 말이 맞을 때도 있군. 지금 진퇴양난이라고 할 수 있군. 그대가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다구. 날 함정에 빠뜨리고 그걸 즐기고 있는거야.
그동안 참으로 많은 악몽을 꾸었다네. 이 순간 수치심과 함께 깊은 회환을 느낀다네.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보물을 가지고 조용히 사라지는 거야. 약속을 지키게. 절대로 비밀을 지키는 걸세. 그대의 그 잘난 애인이 발굴 현장에서 감쪽같이 숨기다가 죽기 직전에 그대에게 넘긴 걸세. 그렇게 정리하자고. 자넨 여기 오지 않았어.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을거야. 결코 나를 알지 못하는 거지, 안 그런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나 해야겠네. 그걸 일본으로 밀반출 하지는 말게나.”
“그렇고 말고요. 그렇게 하면 만고의 역적이 되겠지요.”
그는 노교수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그는 미륵보살의 옅은 미소를 보는 순간 온 몸이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에 하염없이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육개월 여를 돌이켜보았다. 그는 그때 잠시 우두커니 서서 생생하게 기억을 되새겼다.
나는 치밀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자세한 방법과 절차에 온 신경을 집중했었다. 등기부 등본을 보니 깨끗했다. 단 한번도 근저당권을 설정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노교수는 30년 전에 이 집을 구입하였고, 이후 이사를 간 적이 없다. 나는 그 물건이 이 집안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여러 차례 충분한 간격을 두고 우연히 지나가는 행인 행세를 하며 집 주변을 샅샅이 답사했고, 밤 10시쯤이면 그곳 꼭대기 언덕길은 인적이 뜸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구식 CCTV의 카메라는 나사를 풀어서 그 방향을 반대로 조절하면 그만이였고, 담쟁이 덩굴이 뒤덮인 담벼락 위에 겹겹이 둘러쳐진 철조망은 집 뒤쪽의 녹이 쓴 철조망 위에 고무 매트를 걸치면 타고 넘어갈 수 있고, 노교수의 외출과 귀가 시간을 정확히 체크했다. 노교수는 파출부를 두고 있지 않았고 세탁소에 세탁물을 맡기는 일도 없었고 다만 동네 슈퍼마켓에서 정기적으로 음식재료를 배달시켰을 뿐이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모범택시를 이용하였다. 그가 연구소 건물을 드나들 때 그의 거동을 관찰했다. 그는 백발인 머리가 빗질을 하지 않아서 헝클어진 채 늘어져있었고, 깊은 주름이 진 얼굴은 고집 세게 보이는 두툼한 입술만이 돋보였다. 그를 여러 차례 관찰한 후에는 꿈속에서도 그 얼굴이 정확하게 떠올랐다. 한번은 택배 기사 행세를 하기로 하고 초인종을 길게 눌렀고, 날카로운 초인종 소리가 문 밖에까지 들렸으나 노교수는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오후 5시쯤으로 그가 집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그렇게 했는데도 전혀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무렵 불교와 불상, 고고학에 관한 몇 권의 책과 발굴 당시 신문기사와 발굴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국립도서관에서 읽었고, 가끔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며 짜릿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수 없이 되내었다. 절호의 기회야…… 절호. 일생일대 단 한번 있는, 아니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야. 그러니까 침착해야 되는 거야. 침착, 침착해야 된다고. 마지막으로 출소한 후 깨끗하게 손을 씻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이게 마지막이야, 나 자신에게 약속하는데 정말 마지막이 될 거야. 그 무렵 불면증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신경안정제로 여기고 그렇게 마셔대던 술을 단 한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러나 노교수는 경찰을 불러 신고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를 죽일 수 있을까. 이 단도로 그의 심장을 푹푹 찌를 수 있을까. 그럴 순 없을것이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사형을 집행 할 수 있겠는가. 그를 거듭 설득하고 단지 위협만 할 것이다. 평생 학자로만 살았으니 아무리 황소고집이라고 해도 의외로 단순할지도 모른다. 그날 밤에는 술을 마셔야만 할 것이다. 그 팽팽한 긴장감을 술 없이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나의 강도 행각 역시 협박만 있었지 그 이상으로 폭행은 없었지 않은가. 위협에 넘어가지 않고 끝까지 버티면 난 포기하고 철수했다. 그게 나의 한계였다.
그는 한남동 입구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검은 가방을 꺼냈는데 그 가방 속에는 튼튼한 가는 밧줄과 예리하게 벼린 군용 단도, 염산이 든 병 그리고 술병이 들어있었다. 세탁소와 슈퍼마켓, 약국, 부동산등 몇몇 가게를 지나자 길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는 단국 대학교 뒤쪽 단층 붉은 벽돌집과 옥상이 평평한 2층 주택이 양쪽으로 늘어선 경사가 진 시멘트 포장을 한 좁은 도로를 따라 올라갔다. 골목에는 사람이 없었다. 가로등에서 희미하고 노란 불빛이 흘러내린다. 막다르고 아늑한 언덕 밑에 이르렀다.
그가 짧게 탄성을 질렀다.
“오, 이런! 이걸 마침내 내 손 안에 넣게 되다니. 맙소사, 하나님 맙소사. 저는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저의 입 속으로 찾아오셨네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제가 밧줄을 풀어드리면 가볍게 몸을 푸시고 물을 많이 드십시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김진만 변호사의 사무실은 법원 정면 교대역 대로변에 말쑥하게 신축한 건물의 10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탁 트인 전망이 좋았다.
발소리가 울리지 않는 두툼한 고급 양탄자 위로 벽에서부터 은은한 램프 불빛이 흘러내렸다.
그는 그때보다 살이 많이 쪘고 부드러운 까만 머리카락은 희끗희끗 해졌으며 자기는 변함없이 정확한 사람임을 과시하려는 듯 무테 안경 속에서 상대방의 눈을 뚫어질 듯 쳐다 보았다. 그의 단단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고급스럽게 장식한 변호사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는 어려운 법률 용어를 섞어 쓰면서 같은 이야기를 자꾸만 되풀이하였다. 선임비 명목으로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한테서 옛날에 재판을 받은 적이 있다고? 그런가? 이름을 가르쳐 줄수 있겠나.”
“기억할지 모르겠습니다만은, 김영철입니다. 그게 강도사건이였지요.”
“그렇지, 그렇군. 지금 나이가 40대 초반이거나 중반이 되겠구만.”
“맞습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요.”
“그래, 그렇다네. 내가 벌써 60대 중반이 되었으니까.”
“판사님…… 아니네요. 지금은 변호사시지요. 변호사라는 호칭이 귀에 익으셨습니까?”
“…… 그렇다네. 개업한지가 3년이 넘었으니. 그런데 내가 개업한 지는 어떻게 알았나.”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신문이란 신문에 죄다 개업 광고를 때렸지 않습니까. 화려한 법조 경력을 뽐내면서 말이지요. 옛날 감방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거 있잖습니까, 연수원 출신들 말입니다. 걔들은 그렇게 비싼 돌출 광고는 언감생심이라고 하더군요.
그때 방 식구들이 모두들 입을 삐죽거렸지요. 판사할 때는 정의의 사도처럼 기세등등하더니만 변호사 개업하자마자 이제는 돈에 혈안이 되어 날뛴다고 말이지요. 물론, 변호사님의 경우는 다르겠습니다만은…….”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네. 돈이 필요하니까 돈을 벌어야 한다네. 돈이란 많을수록 좋은거지. 그나저나 브로커를 쓸 수도 없고 안 쓸수도 없고…….”
“그러면 변호사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변호사님은 고등법원 부장판사, 지방법원 법원장, 고등법원 법원장 등 법원 고위직을 두루 거치셨는데 대법관만 빠졌습니다. 관운이 거기까지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정말 억울하다네. 대법관이라는 게 순전히 정치적인 거지. 그걸 알아야만 하네. 지방색이 문제야. 서로 나눠먹기를 해야하니까. 그래서 내가 희생양이 된 거라네. 내가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말일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겠지요. 그 대신 일찍 개업해서 전관예우 덕을 톡톡히 봤을 거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렇다네. 그것은 사법부의 위대한 전통이고 지금은 하나의 관습법이 되었다네. 많이들 봐주더구먼. 그래서 아파트도 옮기고 했지. 그런데 갑자기 웬일인가? 용건이라도 있는 건가?”
“그때가 까마득한 옛날 일이지만 엊그제 일 같군요. 제가 그때 재판을 받았는데 상당히 약하게 때려주셨지요. 그래서 지금도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선 변호사는 면회 한 번 오지 않고 정말 불성실했지요. 고작 한다는 게 마지막에 딱 한 마디, ‘관대한 처벌을 바랍니다.’라고 했지요. 그런데도 판사님께서 잘 봐주신 거지요. 가장 약한 3년형을 때리셨는데 감방 안에서는 모두들 당연히 5년쯤 예상했거든요.
그때 어떤 판사는 형이 세기로 소문이 나있었지요. 그러니까 감방 식구들은 모두 무서워하기도 하고 싫어했지요. 솔직히 말하면, 증오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공공의 적이였으니까요. 그래서 엄청나게 험한 욕을 퍼부었지요. 그 판사가 들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용건이 있어 왔습니다. 변호사님을 정식으로 선임해서 법률자문을 받을 일이 생겼지요. 선임비는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이걸 자세히 말씀 드리기 전에 먼저 꼭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약속부터 해 주셔야겠습니다.”
변호사가 잠깐 동안 눈빛에 혐오감을 담고 응시했다. 이내 미소를 지었고 혐오감은 사라진 듯 했다. 그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옛날 기억을 더듬고 있던 것이다.
“그건 염려 말게나. 고객의 비밀을 지키는 것은 변호사의 참된 의무이니까. 그렇겠지. 잘 왔어요. 내가 아니면 누가 해결해주겠어. 옛날 그 강도사건의 피고인 이였단 말이지. 돌고 돌아서 피고인이 결국은 고객이 되었네. 인연이야, 대단한 인연이라니까. 어쨌거나 중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복수하려고 찾아온 게 아니여서 천만 다행이군.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나는군 그래. 그때 당신은 정상 참작의 여지가 충분했거든.
뭐냐하면 당신은 아주 젊은 나이이니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슨 짓이든 했을 텐데…… 그런데 협박은 했지만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어. 그때 거실에 혼자 있던 젊고 예쁜 여자에게 손도 대지 않고…… 절제력이 대단했었지. 그 때문이었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물건이란 게? 대단한 보물이란 말이지?”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값이 얼마나 나갈지는 저도 모르지요. 전문가가 아니니까요. 그게 아마 2000년 10월 중순경인지, 말경인지, 하여간에 가을쯤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그날 밤 회색 달빛이 엷은 구름 속에서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그리고 밤늦게 차가운 가을비가 내렸지요…….
제가 배운 게 도둑질인데 딱 한 번만 하기로 하고 갔었지요. 그리고 그 후론 정말 착하게 살았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런데 그 교수님 댁에 골동품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제가 인사동 쪽에서 일하면서 우연히 들은 것이지요. 전 그렇게 값나가는 귀중품인 줄은 몰랐지만…… 어쩐지 함부로 내놓고 팔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그러니까…… 10년이 훨씬 넘게 집에 숨겨두고 있으면서 정말 애지중지하였지요. 그 교수님에게서 배운 대로 아무도 모르게 집 천장 대들보에다 비밀 공간을 만들어가지고 오동나무 상자에 방습제를 넣어서 함께 보관하였지요.
그래서 저는 아파트에서 살지를 못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여자가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성화를 부려도 말입니다. 제가 그랬지요. 사람이란 땅을 딛고 살아야만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우겼지요.”
“15년이라…… 용케도…… 오랫동안 기다렸군. 그 인내심을 칭찬할 만 하다고.”
“저도 사실 팔고 싶지가 않습니다. 헤아릴 길이 없는 신비한 미소는…… 그게 아마 인간의 미소가 아니라 신의 미소이겠지요. 사람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그리고 아주 천천히 녹여주지요. 그러면 마음이 아주 편안해집니다.
죽을 때까지 곁에 두고 싶었지요. 그 노교수님의 애틋한 심정이 이해가 된다니까요.
그러나 더 이상은…… 제가 지금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거든요. 한계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나이에 또 다시 칼을 들고 담을 넘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글쎄 말이야…… 이렇게 말 할 수도 있을 거야. 10년 전에 인사동 뒷골목에 있었던 허름한 골동품 가게에서 모조품으로 알고 싼값을 주고 구입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러면 선의취득이 되니까. 그리고 지금 그 가게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러나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어설프게 그 골동품 가게를 말했다가는 들통이 날 수도 있겠지. 결국 꼬리가 잡히는 거야. 조심하라고, 말 조심을……
그날 한남동에 있는 그 교수의 자택에 침입한 일은 이미 15년이 지났으니 특수강도죄의 공소시효가 막 끝났다네. 그 교수라면 나도 잘 알고 있지. 고고학계의 유명한 원로 교수이니까. 그 교수는 몇 년 전에 한강 다리에서 차가운 물속으로 떨어져 자살했었지. 아무런 유서를 남기지 않고서 말이야. 신문에 그렇게 났더라고. 자신의 역저가 발간되고 나서 외롭게 혼자 살다가 신병을 비관한 나머지 유서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다고 했지.
그러니까 당신이 입을 다물고 있기만 한다면 강도죄가 밝혀질 리가 없지 않겠나. 그리고 당신 애인이었던 사람은 그 당시 절도죄를 지었는데 그로부터 그 물건을 나중에 취득했다고 가정해도 장물취득죄의 공소시효는 7년 밖에 되지 않은데 그 역시 이미 지났지. 공소시효 때문에 무사하게 될 거야.
검찰사건사무규칙에 의하면 검사는 공소권 없음을 이유로 불기소처분을 해야 하거든. 만약 검사가 이를 간과하고 기소하면 이번에는 법원이 면소 판결을 선고하게 되어 있네.
오랫동안 잘도 숨겼구먼. 자신 있게 공개적으로 경매에 출품하게나. 그리고 당당하게 정식 감정을 받게. 그걸 사적으로 몰래 팔려고 하면 일은 더욱 꼬이고 잘못될 확률이 많지. 도대체 주인을 찾기가 힘들 거라네. 국보급 보물이니 언론에서 알게 될 테고 이렇궁 저렇궁 말이 많겠지만,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뻔뻔해지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경매가 무사히 끝나기만 하면 두둑한 성공보수금도 드려야겠지요…… 그렇지만 그 교수님의 사건은 정말 안됐군요.”
“이렇게 몇 마디 해주고 나서 법률자문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을 수는 없다네. 내가 자문해준 것은 어차피 공소시효가 끝났기 때문이라네. 이걸로 끝일세. 다시는 이런 일로 찾아오지 말게나.”

사복을 입은 늙은 형사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서울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소속 경찰입니다. 김영철씨, 당신을 체포합니다. 언제든지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고, 불리할 경우 말을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는 너무 당황해서 입이 쩍 벌어지면서 말을 더듬거렸다.
“무슨 일인가요? 뭔가 오해가…… 틀림없이 오해가…….”
“그 동안 그 귀중한 보물은 어디에 있었는가요? 그러니까 어디에다 보관했느냐는 것입니다.”
“그야 제가 꼭꼭 숨겨 놓았지요. 너무 귀한 물건이니까요. 국보급 아닙니까.”
“그렇군요. 피의자는 두 달 전에 고미술품 경매에 귀중한 물건을 내놓았습니다. 이제야 이 세상에 처음으로 얼굴을 보인 셈이군요. 주최 측에서 감정 결과 진품으로 판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최 측이 그만 너무 놀란 것이지요. 이런 국보급 귀중품이 갑자기 나온 것이 이상하다고 하면서 문화재청에 보고를 하였고 결국 수사를 의뢰하였지요. 경매가는 몇 백 억 원을 호가할 거라고 하더군요.”
“그렇지요. 몇 백억 원이 되겠지요. 지금이 2016년 2월 말이란 말입니다. 제가 15년여를 넘게 이 날을 기다려온 게 아닙니까.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제 앞날이 훤합니다. 평생 돈 걱정 않고 살게 되었으니. 그 귀중품은 부여의 청원사지 발굴 작업 당시 나온 진품이 틀림없지요.
어떤 경우이든 다 지나갔단 말입니다. 경찰 나으리들 공소시효가 모두 지나갔단 말입니다. 그러니 죄가 없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법원장 출신 유명한 변호사에게 이미 법률자문을 받았지요. 물론 공소시효가 무엇인지는 잘들 아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형사는 이제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빈정거렸다.
“공소시효 좋아하시네. 그렇게 말할 줄 이미 알고 있었지. 문화재보호법 제92조에 의한 은닉죄를 적용한 거야. 은닉죄는 아직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지. 강도죄처럼 3년 이상의 유기징역이니까 꽤 중형감이라고 할 수 있겠네.
그러니까 공소시효가 10년이라고. 그리고 은닉죄의 공소시효는 피의자가 경매 출품을 의뢰한 그날부터 기산한다고 하더군. 내가 뭘 알겠어. 우리 변호사가 꼼꼼하게 검토한 후 그렇게 말한거야. 많은 돈을 주고 법률자문을 받았다는데 허사가 되어서 어쩌지. 그 유명하다는 거물 변호사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92조를 깜박한 모양이군.
그리고 그 보물은 압수되어 국가 소유로 넘어갈 거야. 당신이 억울해 할 것은 아니지. 원래부터 국가 소유니까.”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굴은 긴장했고, 무척 피곤해 보였다.
“……”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으라구. 다 자세히 밝혀지겠지. 조사해 보니까 오래됐긴 했지만 전과가 꽤 있더라고. 이제는 개과천선하고 손을 씻은 줄 알았는데 그 버릇 어디 가겠어. 우리가 모르는게 몇 건 더 있을지도 모르지. 다 털어놓으라고, 속이 시원하게…….”

봄이 멀지 않았다.
늦겨울의 여린 해가 서쪽으로 지면서 어둠이 찾아오기 직전 짧은 순간 황혼녘이 찾아왔다. 형사가 수갑을 채웠고 경찰차에 태웠다. 경찰 호송차가 출발했다.
작성일:2017-07-07 12:51:29 211.104.150.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