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에세이> 표절(剽竊)에 대한 단상 (혹은 ‘난 한물 간 가수’)

닉네임
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7-01-17 15:56:08
조회수
2660
표절剽竊에 대한 단상 (혹은 ‘난 한물 간 가수’)


난 한물 간 가수
국내 컬러 TV 방송은 1980년 12월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라디오를 통한 듣는 음악과 텔레비전을 통한 보는 음악의 줄다리기가 시작 되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면서 12년 만에 보는 음악 쪽으로 완전히 돌려놓았다. 서태지는 한국 대중음악과 서구 팝음악 간 시차를 줄이고 그때까지 라디오와 TV로 양분돼 있던 한국 음악 판도를 TV로 바꿔 놓았다.
보는 음악의 중심에는 안무와 뮤직비디오가 있다. 현재 통용되는 아이돌 그룹 안무의 기본 틀은 서태지와 아이들에게서 나왔다. 몸을 크게 써서 보여주는 포인트 안무를 대중 가요계에 보급한 장본인이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거의 모든 10대가 그 동작을 따라하기 위해 열병처럼 들끓었던 춤은 ‘난 알아요’의 회오리 춤이 처음이었다. 한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듀스의 춤도 의미 있었지만 단박에 눈에 박히고 누구나 한 번쯤 따라 추어보고 싶은 포인트의 매력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단연 앞섰다. 각각의 동작과 표정부터 그것들과 연결되어 음악의 분위기에 몰입하도록 하는 구성력과 연출력은 그때 수준에서는 아주 탁월했다.
그러므로 현재 활동하며 아이돌 춤을 만드는 국내 가요 안무가들 중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수를 돋보이게 하고 공간감을 확장하는 흰색 배경, 곡 분위기를 장면처럼 표현한 세트, 안무를 돋보이게 하는 빠른 카메라 워크, 가수의 얼굴을 예쁘게 표현하는 촬영 각도와 편집을 비롯한 아이돌 영상 공식의 다수가 이때 만들어졌다.
랩과 노래, 그러니까 자극적인 랩과 낙차 큰 멜로디로 중독성 있는 후렴구 노래라는 히트 가요의 공식도 ‘난 알아요’ 이후 확산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런 방식을 국내에서 선보인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앞서 홍서범, 신해철을 비롯해 몇몇 있지만 이후 댄스 그룹의 범람기를 통해 판의 룰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이다.
서태지는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경력을 만들었다. 스무 살에 데뷔했다. 사랑 노래뿐 아니라 획일화된 교육, 통일에 대한 무관심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곡으로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음악, 춤, 패션 같은 여러 분야에서 한국에는 거의 없던 전혀 새로운 유행을 우리 사회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최전성기에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다.
그게 치밀하게 계산된 일종의 쇼였을까? 그 후로도 다시 무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으니 말이다.
서태지 은퇴 약 7개월 후인 1996년 8월 데뷔한 H.O.T.는 사회를 비판하는 가사, 강렬한 랩, 파격적인 패션과 헤어스타일 등 서태지와 아이들의 여러 가지 성공 코드를 답습한 그룹이다. 이후 젝스키스, 신화 등 다른 아이돌 그룹도 비슷한 노선을 밟았다.
그의 CD가 나오는 날은 학생과 직장인이 등교와 출근도 미뤄두고 새벽부터 음반 가게 앞에 줄을 섰다. 1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 서태지가 은퇴할 때 가지 말라며 막아섰고, 그가 돌아올 때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반겼던 팬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간 걸까.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니라 서태지가 말하는 동화 속 이야기였던 걸까. 서태지는 왜 더 이상 화제의 중심에 서지 못하는가?
서태지 은퇴 이후에도 팬클럽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1996년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가 발족했고 1997년 인터넷이 도입되면서 서태지 매니아, 서태지 닷컴 등 팬들이 자체적으로 꾸려가는 팬 사이트가 등장했다. 2012년에는 팬들이 모여 만든 20주년 기념 ‘서태지 아카이브’ 사이트가 개설됐다.
1970년대 권위주의 정권은 심야 방송에 대한 일각의 비판론을 업고 ‘팝송 전면 금지’라는 어처구니없는 조치를 취하였다. 외국 유행가를 몰아내고 가곡, 민요는 물론 국민가요, 군가를 내보내야 한다는 선곡 가이드 라인이 제시됐다.
바로 그 직후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존 바이즈의 ‘도나도나’등 불건전한 외국팝송 135곡이 금지곡으로 발표됐다. 판정을 내린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팝송을 가리켜 불온한 좌익 선전물 또는 지성, 자아를 말살하는 반문명이라고 규정하기까지 했다.
1970년대 양병집이라는 한국 가수가 그의 노래를 번안해 부르기도 했지만 (그 번안곡들은 고 김광석이 다시 부르기도 했다.) 그 노래들의 원작자가 밥 딜런이라는 사실을 요즘 와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밥 딜런은 한국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물결이 형성되는데 밑거름을 뿌렸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1970년대 한대수를 비롯해 김민기, 양희은 등이 통기타 선율에 꽉 막힌 청춘의 설움과 저항의 메시지를 담았던 것도 딜런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들의 뒤를 이어서 서태지가 등장한 것이다.

일시적 잠적과 깜짝 귀환이라는 새 앨범 발매의 순환 공식은 깨졌다. 요즘은 최정상권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이 TV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일상을 낱낱이 공개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뛰어들고, 1년에도 몇 번씩 디지털 싱글과 미니 앨범을 발매해 가요계를 노크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식 활동 경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GOD가 데뷔하면서부터이다. 아이돌 그룹 최초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찍으며 일상생활을 공개했다. 카리스마보다는 친근함과 허술함을 강조했다.
음원이나 음반 수입이 가수의 주 수입원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이전처럼 뮤지션으로 변신을 꾀하는 대신 연기, 예능 등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데뷔 초부터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휴식기 없이 싱글 앨범을 내며, 음악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습의 요즘 아이돌 그룹은 멀티 엔터테이너의 모습을 보여주며 완전히 탈서태지화하고 있다.
서태지가 만들어 놓은 공식은 상당히 오랜 기간 남아 있다가 시대가 빠르게 변하면서 급격히 변화한 것이다. 디지털 음원 시장이 출현하고 소비 행태가 바뀌면서 가수가 수면에서 사라지는 순간 인기가 없어지는 것이다.
7인조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은 2016년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200에서 26위에 올랐다.
올해로 데뷔 4년차 방탄소년단은 K팝의 새 장을 열고 있는 걸까.
방탄은 남다른 소통 전략을 가졌다. 무대 위의 멋진 모습뿐 아니라 무대 밖 모습을 공개하는 데 거침없다. 데뷔 초부터 유투브 채널에 ‘방탄 밤’이라는 짧은 동영상을 수시로 올렸다. 대기실, 숙소, 연습실에서 장난치고 놀고 고민하는 멤버들의 일상을 그대로 담았다.
가짜 우상 같은 아이돌 그룹이 아닌, 옆에서 기댈 수 있는 영웅이 되자는 컨셉은 옆집 오빠, 동생, 친구 같은 방탄을 탄생시켰다. 멤버 슈가는 오버하거나 숨기기보다는 유투브나 SNS을 통해 실제 모습을 쉴 틈 없이 올렸다며 회사에서 시킨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하고 싶어서, 재밌어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선배 K팝 아이돌들이 유투브를 통해 전 세계에 자신의 음악을 알린 데서 한발 나아가, SNS로 글로벌 팬들과 소통하며 팬덤을 구축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최근 K팝은 기로에 서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싸이나 빅뱅 등이 있지만 저변 확대에 한계가 있었다. 방탄의 이번 빌보드 기록은 하위 문화에 머물러 있던 K팝이 미국, 유럽과 같은 주요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1990년대가 마지막 스타 싱어송라이터 시대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전문가들은 2000년대 들어 음반시장이 몰락하고 아이돌 위주로 음악 흐름이 재편되면서 개성 있는 창작가 겸 가수가 주류로 떠오르기 어려워졌다고 분석한다.
지금은 싱어송라이터와 아이돌 그룹을 키우는 회사가 분리된 시대라고 했다. 90년대는 아이돌이란 개념이 없었다. 인디 음악계에는 수많은 싱어송라이터가 있지만 그들의 음악이 대중에 노출될 기회가 크게 줄었다.
지금은 대형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지배하기 때문에 가수 한 사람의 창작력으로 승부할 수 없는 시대다. 자본과 힘을 갖고 스타를 양성하고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더 이상 서태지 같은 1인 창작가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게 된 것이다.
잘생기고 예쁜 가수에게 흥행성이 보장된 다국적 작곡가 여러 명이 붙어서 하나의 음반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온, 오프라인의 여러 채널을 통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홍보해 어떻게든 띄우는 방식은 아이돌 중심의 국내 가요계 뿐만 아니라 영미권 팝 시장에서도 보편화된 풍경이다.
음반 시장의 몰락과 디지털 사회로의 급격한 이행으로 영웅의 시대는 갔지만, 천재성과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팝스타가 사회 격변기와 맞물려 등장하면 또 한 번 서태지형 신드롬이 가능할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서태지가 1980년대, 아니면 2000년대에 태어났다면 그런 반향을 낳기 힘들었을 것이다. 1990년대는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자본화가 진행되면서 소비문화의 주류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사운드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그걸 뒷받침할 음악적 테크놀로지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서태지형 영웅의 시대는 다시 올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서태지 신드롬은 1990년대였기에 가능했다고 못 박았다. 그러므로 인터넷 시대 이후 서태지의 특성 자체가 하나의 딜레마가 되어 서태지 앞에 나타났다.
더 이상 새로운 장르나 신선한 음악이 음악계에 파급력을 주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고,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으로 최신 해외 장르가 음악 마니아들의 가정에 매일 배달되고 업데이트되는 환경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음반시장은 체질적으로 격변하고 있다. 2000년대 접어들며 디지털 음원의 공유와 스트리밍, 다운로드가 음악의 주 소비 행태가 되면서 50년 가까이 이어온 세계 음반 시장의 활황은 일순간 무너졌다. 수익이 줄어드니 모험은 멀어졌다. 대중음악은 작품인 동시에 제품이었다. 근데 작품과 제품 사이의 무게 균형이 깨지면서 대형 음반사는 반드시 수익을 낼 수 있는 콘텐츠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만약 서태지가 2014년에 스무 살이 됐다면 그의 활동 무대는 지금 서울 홍대 앞 인디 음악계일 것이다.
한편 서태지에 대해서는 다른 냉혹한 평가도 있다.
서태지가 그저 해프닝처럼 나타나 자기 방식대로 음악을 한 뒤 과대한 평가를 받고 있는 팝스타로 보는 이도 적지 않다. 이들은 서태지가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하거나 동료 음악가나 음악계와 공동 발전을 모색하기보다는 짧은 시간에 만든 자신만의 음악을 구현하기 위해 매니지먼트 시스템과 국내외 최상급 스태프를 일시적으로 헤쳐모여 했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케이팝 아이돌 시스템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보다는 앞서 발전한, 예컨대 쟈니즈 육성 시스템과 SMAP같은 일본의 아이돌 산업을 벤치마킹했고, 음악의 질적 향상은 서구권 음악의 직접 도입과 국내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튼튼한 기반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한 음반업계 관계자는 서태지가 당시 국내의 다른 음악가들의 수준과 비교해 볼 때 입지전적 혁신을 이뤄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가 가요계의 표준을 월등하게 넘어서는 창작품을 내거나 그로 인해 큰 유산을 남겼다는 것은 그 시대와 여론이 만들어낸 위선적인 신화라고 평가했다.
서태지가 솔로가수로 처음 냈던 5집은 미국에서 작업해 음반 발매와 뮤직비디오 공개 같은 기본적인 홍보만 했다. 6집은 서태지의 컴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모아진 사실상 마지막 음반이다. 은퇴를 번복한 서태지가 4년 만에 빨갛게 물들인 레게머리로 실체를 드러냈던 것이다.
7집과 8집은 컴백 쇼가 라디오나 TV의 한 채널에 독점 전파를 탔던 것 정도를 제외하면 큰 술렁임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본인의 입으로 서태지의 시대는 1990년대에 끝났다고, 정리했다.
2014년에 나온 9집을 보면 서태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보인다. 서태지의 9집 ‘크리스말로윈’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새로운 장르를 해외에서 들여오던 초기의 서태지는 아니지만, 여전히 변신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서태지가 좋은 멜로디 메이커라는 것을 확신시켜주고, 솔직한 가사가 돋보이는 서태지식의 대중가요라는 평을 얻을 수 있을까?
40대이고 아빠가 되어 돌아 온 서태지는 말했다.
“서태지 시대는 사실 1990년대에 끝났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난 한물 간 가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그걸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면 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2세에게서 받은 강렬한 이미지가 고스란히 음악으로 나왔습니다. 아빠로서 딸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를 신작에 담았거든요. 나의 시대는 끝났고, 8월에 태어난 딸 삑뽁이가 신작의 뮤즈가 되었지요.”
서태지가 직접 밝혔듯 ‘크리스마스와 할로윈’을 합친 제목의 이 노래는 우리가 산타라고 믿는 세상의 모든 권력이 사탕발림으로 우리를 흥분시키면서 사실은 우리를 약탈하고 착취한다는 섬뜩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크리스말로윈’을 도대체 뭔 말을 지껄이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또는 변태 같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게다가 놀라운 사실은 이 노래가 하루 정도 음원 차트 1위를 하다 하릴없이 곤두박질쳤다는 점이다.

한국 포크 음악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가수 조동진의 음반이 20년 만에 발매됐다.
데뷔 30년 이상의 중견 가수들도 조동진 앞에서는 새카만 음악 후배가 되어서 형님과 오빠라고 그를 불렀다. “그렇게 빨리, 또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을 줄 몰랐어. 기타를 집어넣는 데 10년, 다시 꺼내는 데 10년이 걸린 셈이네.” 작은 공연에서 조동진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담긴 짧은 영상에 이어 소속사 푸른곰팡이 측의 간단한 해설과 함께 10곡이 차례로 흘렀다. 조동진은 1979년 ‘행복한 사람’이 담긴 1집 음반을 발표하며 서정성 짙은 포크음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제비꽃’ ‘나뭇잎 사이로’ 같은 명곡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장조풍의 단아한 선율과 사색에 잠길 틈을 주는 여유 있는 템포는 여전했다. 도입부나 후렴구에서 오케스트라와 전자 음향을 동원해서 풍성한 음색이나 실험적 사운드를 가미한 점은 낯설고도 신선했다. 아날로그가 힘을 잃고 파편화된 조립품으로 전락하는 시대에도 조동진은 값싼 나르시시즘이나 자기 도취에 빠지지 않고 남다른 음악적 가치를 전달한다.
그는 이번 새로운 음반을 내놓으면서 소감을 밝혔다. “허송세월하면서 보냈던 그 텅 빈 시간들이야말로 내 생애 최고의 순간들이었다.”

그녀는 ‘맨발의 디바’다. 1989년 데뷔한 뒤 그는 대학로 무대를 점령했다. 괴물 같은 가창력을 가진, 맨발로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신인에게 사람들은 맨발의 디바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녀의 모습을 가장 생생히 자주 접할 수 있는 곳은 콘서트다. 지난해 900회를 넘겼고, 곧 1000회 공연 기록을 앞두고 있다.
이은미가 말했다.
“음악을 30년 가까이 하면 쉬워질 줄 알았는데 더 어렵다. 올해가 제일 힘들었다. 새 앨범을 준비하는데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작업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다.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정말 지쳤다. 그래도 이번 생애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내 운명을 좀 더 사랑하고 열심히 부딪혀야겠다고 마음잡았다.
요즘 가요 시장이 음원 중심으로 바뀌면서 빨리 음악이 소비되고 사라져서 너무 안타깝다. 많은 음악가가 어떻게든 좀 더 가슴에 담아 둘 수 있는 노래를 만드는 게 목표인데 이렇게 바뀌니 힘들다. ‘누가 알아줄까’ 하는 허망함이 있다. 후배들이 이제 어떻게 하느냐고 조언을 구할 때 답을 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 그런 자괴감을 부수고, 허망함에서 탈출해야 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을 끄집어내야 하는 게 앨범 작업이다. 자기 성찰이 되고, 깨달음이 온다.”
새로 나온 앨범에서는 이은미의 날 목소리가 특히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기계적인 터치를 거의 하지 않았다. 연주와 노래만 들어갔다. 음악이 갖고 있는 힘을 제일 먼저 내세우고 싶었다고 했다. 그녀는 이런 음악을 10대 아이들에게 들려주라고 권하고 있다. 자극적인 것에만 노출되지 않게, 기본적인 음악의 선율을 알게 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가수 이적은 말했다.
“호기심에 이것저것 했다. 그러면서 실력이 많이 늘었다. 앨범이 다 잘 된 게 아니다. 돌아 돌아 노래가 살아남는 경우가 있으니 잘 만들어 놓자,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저를 다독인다. 하지만 아직도 노심초사한다. 가수로서 이적의 유통기한이 끝나버린 게 아닌지, 새 노래를 발표하거나 공연을 앞두고 늘 불안하다.
공연에서 옛날 히트곡을 부르는 것도 좋지만 계속 부를 신곡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과거를 팔면서 살 수 없다.
패닉 시절처럼 센 노래를 지금 만들면 별로라고 그럴거다. 그래도 실험은 계속하고 있다. 센 가사를 만드는 건 쉽다. 계속 남아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를 만드는 게 더 어렵다.
음악이 가지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좋아한다. 도전적인 이름처럼 실험하며 살았다.
2004년부터 소극장 공연을 시작했다. 집에서 흥얼흥얼 노래 만들었을 때,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을 전하고 싶어 시작했다는 공연은 12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3월 ‘무대’란 이름으로 시작한 소극장 공연은 올 2월에서야 끝났다.
한 두곡 노래를 발표했다가 뜨지 않으면 사라지는 게 아쉽다. 온라인 차트에서 사라져버리면 그 노래가 나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앨범은 여러 곡이 모여 집합을 이루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낱개의 곡과 또 다르다. 그렇더라도 이제 음악 감상방법이 달라졌으니 고민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지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한 이적은 시원하게 내지르는 특유의 보컬과 함께 가요계를 앞만 보며 달려왔다.

밥 딜런이 다른 대중음악계 전설들과 다른 점은 오랫동안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지켜왔다는 것이다.
자기 히트곡도 제 맘대로 달리 편곡을 해서 소화를 했다. 하지만 꾸준히 자기 자신을 유지하면서 창작을 계속하여 가수라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 냈다.
딜런은 2016년에 37번째 앨범을 발매했다. 50년간 다양한 주제의 수많은 노래를 발표했다. 정형화된 틀을 거부하며 끝없이 자신을 변화시킨 것이다. 저항 가수라는 호칭을 공개적으로 혐오하며 모호한 가사와 변화무쌍한 공연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바꿨다.
1965년 그는 포크 음악에서 벗어나 록 음악을 과감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밥 딜런을 포크 음악 가수로만 여겼던 팬들은 그의 으 음악적 변신에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므로 딜런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 끝없는 변화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고정된 삶과 가치에 대한 거부를 일관되게 추구해 왔다. 음악적 형식에서 딜런은 그 시대의 유행과 관계없이 자신의 음악 장르를 무모할 정도로 급속하게 바꾸어 왔다. 고정된 가치와 느낌의 거부, 끝없이 유동하는 생각과 삶의 추구가 밥 딜런을 설명하는 또 다른 측면이다.
그런데 딜런의 노랫말을 시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물음은 곧바로 시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시를 쉽게 판별할 기준은 없다. 시는 대개 운문이지만 산문시도 있다. 애초에 시로 쓰이지 않은 글들이 시의 유기적 부분을 이루는 경우도 있다. 훌륭한 작품들이 중심부를 이루고, 그 둘레에 시적 특질이 점점 옅어지는 글들이 동심원을 이룬다.
가사가 시적이라고 그 자체를 시라고 할 수는 없다. 가사는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가수의 가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언어다. 가사가 깃드는 곳은 지면이 아니라 허공이다. 가사는 노래의 시작과 끝에 이르는 짧은 시간의 흐름에 맡겨져 찰나 속으로 명멸한다. 그 시간을 벗어나면 가사는 앙상한 텍스트로 남을 뿐이다. 문학적 가사로 꼽히는 가요의 명곡들을 글로 적고 다시 읽어 보라. 언어의 밀도가 꽤 성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들을 묶어 시집이라고 부르면 좀 안쓰러울 것이다.
가사에서 멜로디의 결에 맞지 않는 생경한 관념어나, 리듬을 방해하는 음운적 결함이 있는 언어, 가수의 음색과 따로 노는 언어들은 추방된다. 가사의 메시지에 집착하다 보면 멜로디나 음악적 구조가 허약해진다. 멜로디가 엉뚱하게 도약하기도, 심심할 정도로 평이해지기도 한다.
노래에서 가사는 선율 안에서만 그 의미가 있다. 멜로디가 좋으니까 노랫말도 덩달아 울림이 큰 것이지 그 반대는 없다. 선율을 벗어나는 순간 밥 딜런의 가사는 ‘끼적거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표절 剽竊 에 대한 단상
표준 국어 대사전
표절이란 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쓰는 행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장미를 잘 따는 것도 은총이다.

꿀벌은 꽃들을 여기저기 옮아 다니며 자신의 것으로 삼은 뒤에 그것으로 꿀을 만든다.

새로운 것은 절대 없다. 그저 ‘단어의 위치’만 있을 뿐.

예술은 표절자가 아니면 혁명가다.

모든 것이 다 말해졌다. 인간들이 존재하고, 생각하기 시작한 지 7천여 년이 흘렀으니, 우리가 너무 늦게 온 것이다.

…… 내가 창조한 소설 세계의 가장 중요한 한 요소는 역사이다. 내가 중세의 연대기를 읽고 또 읽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세의 연대기를 읽으면서 나는 모름지기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애초에는 작가의 머릿속에 없던 것, 가령 청빈을 둘러싼 논쟁, 소형제회 수도사들에 대한 심문관의 적의 敵意 같은 것들도 소설 안으로 껴안아 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다른 책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세상에 알려진 다른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때때로 나는 손을 멈추고, 이마를 찌푸리며, 환각에 사로잡힌 시선으로 나 자신을 ‘작가’로 느끼기 위해 망설이는 척하곤 했다. 게다가 나는 속물근성 때문에 표절을 몹시 좋아했고, 일부러 표절을 극단까지 밀어붙이곤 했다.
나는 이 잡동사니에다 좋았건 나빴건 내가 읽은 것 모두를 뒤죽박죽 쏟아 부었다. 이야기들이 그 때문에 타격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이득이었다. 이음새를 만들어내야 했고, 그 결과 나는 좀 덜 표절자가 되었다.

재능 있는 사람은 훔치지 않고, 정복한다. 그는 자기가 탈취하는 지방을 자기 제국에 병합시킨다. 그는 그 지방에 자기 백성들로 들끓게 하고, 황금 왕홀의 세력을 거기까지 뻗친다. 나는 이런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알려지지 않은 장면들의 아름다움을 우리 대중에게 알려주었는데도 고마워하기는커녕 내게 도둑질이라고 손가락질하고, 그 아름다운 것들을 표절이라고 지적하니 말이다. 나 스스로를 위로하자면, 적어도 나는 셰익스피어와 몰리에르와 비슷하다.

어떤 것을 완벽히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조차도 인간을 창조할 때 발명해낼 수 없었거나, 감히 발명하지 못했다. 신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 기원전 1186년부터 1155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람세스 3세는 주요 기념비에서 전대 파라오의 이름을 들어내고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셰익스피어는 플롯, 캐릭터, 제목을 빌렸고, 다른 작가의 연극, 시, 소설을 재작업했는가 하면, 구절을 인용 표시도 없이 통째로 가져오기도 했다. 그런 완전한 표절은 용서받기에 그치지 않고 청중들에게 환영과 기대를 받기까지 했다. 바지선에 탄 클레오파트라를 묘사한 장면은 플루타크에게서 통째로 끌어온 것이지만 천재의 손으로 윤색되었다.
로렌스 스턴은 로버트 버튼의 <우울의 해부>, 프랜시스 베이컨의 <죽음에 대하여>,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이외에도 여러 작품에서 가져온 구절을 거의 토씨까지 그대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적절히 재배치해서 <트리스트람 섄디>에 넣었다.
에밀 졸라는 알코올 중독을 다룬 자연주의 소설 <목로주점>에서 상당 부분을 표절했다. 그는 말했다. “내 소설은 전부 이런 식으로 쓰여졌다. 나는 펜을 들기 전에 도서관과 산더미 같은 주석들에 둘러싸여 산다. 내 전작에서도 표절을 찾아보시길, 여러분, 굉장한 발견을 하게 될 테니.”
루퍼트 브룩은 ‘독창성이란 아주 많은 출처를 표절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고 파블로 피카소는 ‘표절이란 또 다른 도둑에게서 훔쳐오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인지 다른 글에서 글귀를 훔쳐왔다.
에릭 클랩튼은 가끔 로버트 존슨이나 머디 워터스의 가사를 통째로 가져왔고 밥 딜런은 다른 작가의 글을 천 번도 넘게 가져왔다는 사실이 2014년 5월에서야 밝혀졌다.
마크 트웨인은 편지에 썼다. ‘아, 이런, 그 표절 소동이 어찌나 말도 못하게 웃기고 올빼미처럼 바보 같고 기괴한지요! 입으로 했든 글로 썼든 인간이 한 말 중에 표절 말고 뭐 다른 게 있었다는 듯 말입니다! 인간이 내뱉은 모든 말의 알맹이, 영혼, 더 들어가 볼까요, 말하자면 실체, 거대한 부분, 실질적이고 귀중한 재료는 바로 표절이지요. 지성인들에게서 나온 모든 것들의 99퍼센트는 표절이지요, 간단명료합니다.’
T.S 엘리엇은 ‘가장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시인이 빌려오는 방식이다. 미숙한 시인은 모방하지만, 성숙한 시인은 훔쳐온다. 형편없는 시인은 가져온 것을 훼손하지만 훌륭한 시인은 더 나은 것으로, 아니면 적어도 다른 것으로 만들어낸다. 훌륭한 시인은 도용한 것을 독특하게, 뜯어온 글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엮어낸다. 하지만 형편없는 시인은 도용한 것을 아무런 관련도 없는 부분에 던져 넣는다.’라고 말했다. 그가 쓴 <황무지>는 기본적으로 인용 덩어리였고, 각주도 대부분 정확하지 않았다. 엘리엇은 고의로 그렇게 했음을 시인했고 출판사는 교정을 해서 새로 찍어낼 수밖에 없었다.
롤랑 바르트나 미셸 푸코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은 모든 글이란 협력에서 나오는 것이고 일종의 문화적 공동 작업으로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엄격히 따졌을 때 저자라는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개인의 창작행위는 사회적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에 정신적 노동의 결과인 지적산물도 당연히 사회적인 것으로 사회에 속해야 한다고 보았고,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 작가들의 모든 작품을 국유화하였다. 그들은 ‘철강노동자가 쇳덩어리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을 필요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마찬가지로 지식인 계급이 자신이 만든 것에 자기 이름을 넣을 특권을 왜 받아야 하나?’라고 말했다. ……

모든 모방이 표절로 낙인찍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귀한 감정을 가져오고 빌려온 장식을 끼워 넣는 일에 때로는 창작을 대신할 만큼 많은 판단을 들어가게 한다.

표절, 표절, 표절하라!
다만 꼭 ‘연구’라고 불러주길.

과거에 말해지지 않았던 것은 오늘날에도 결코 말해지지 않는다.

무엇도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른 어딘가에서 전생을 살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이미 말한 것 이외에는 말할 수가 없다. 시인들은 호메로스를 표절한다. 맨 나중에 등장하는 작가가 일반적으로 가장 우수하다.

우수한 작가들은 남의 것을 빌려간 사람이 그것을 개선하지 못하는 경우를 표절이라고 부른다.

한 작가의 것을 훔치면 표절이고 많은 작가들의 것을 훔치면 연구다.

현대 작가들의 생각을 훔치면 표절이라는 비난을 받고, 고대 작가들의 생각을 훔치면 박학하다는 칭찬을 들을 것이다.

하늘을 표절한 땅/ 낮을 표절한 한밤의 송사/ 우리는 긴긴 어둠을 서로의 살 속에 말아 넣는다./ 그것들은 저희끼리 얽혀 가다가/ 우리 온 정신의 성감에서 만난다./ 끈과 단추는 모두 풀어 헤치고/ 우리는 서로를 표절한다./ 다만 기쁘도록/ 다만 어울리도록/ 그런 아침과 밤을 만나게 하는 까닭,/ 그것을 표절하는 남자와 여자,/ 자연과 인간은 표절투성이다./ 태초, 하늘이 나를 표절하듯/ 신이 나를 표절하듯.

말이 많으면 못쓸 말이 많다네

모든 것은 흐르고 아무것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굽어지지 않는 길은 없다.
변화에는 일종의 구원이 깃들어 있다.
桑田碧海
人生無常

현대는 청중이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음악의 목표가 되었다. 아름다운 음악이 주는 감동 대신 메시지가 있는 음악이 주는 생각의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변화를 감수하면 새로운 음악들이 기다리고 있다.
언제까지 마음으로만 음악을 들을 건가? 아름다운 선율, 조화로운 화음, 규칙적인 리듬이 듣기 좋은 음악의 요소일까?
21세기 음악은 다를 수 있다. 듣기 좋던 화음은 조각조각 깨지고, 리듬이란 건 종잡을 수 없게 되고, 멜로디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음악의 요소를 잘게 부수고 그것들이 파편이 되고 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왜 음악은 멜로디가 지속적으로 연결돼야 하는가? 모든 요소들이 왜 한 데 어울려 음악이 돼야만 하는가?
현대 음악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리고 청중은 그 질문을 함께 던지거나 혹은 자신만의 답을 찾기도 하면서 음악을 듣는다. 지금까지 마음으로만 음악을 들었던 사람들은 이제 머리를 쓰며 음악을 듣는다. 그래서 현대 음악은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을까? 음악을 듣는 방식과 이유가 바뀐 것이다. 현대 음악은 감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기 위해서 듣는 음악이다.
(한물 간) 가수에게 지금 시대의 화두를 던지는 걸작을 더 이상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음악계의 판을 흔들고 미래를 내다보는 혁신적인 작품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의 음악적 조류에 적응할 필요는 없다. 대중성을 쉽게 확보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되고 과거로 막연히 돌아가는 노래도 안 된다. 새로운 트렌드와 옛 것의 재현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된다. 여전히 향후 진로를 모색하는 뮤지션의 끊임없는 혼란과 고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수는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게 아니라 다시 그리운 무대로 돌아와야 한다. 가요계의 변덕스러운 트렌드를 따르기보다 자신의 기본기를 충실히 보여줘야 한다. 옛날 옛적 잘나가던 시절의 음악에 더 이상 연연해서는 안 된다. 내면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노래에 대한 갈망을 어찌할 것인가. 자신에 대한 공포,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라.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혼란과 전율에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맡겨라.
그러므로 당신은 끊임없이 실험을 계속하면서 변화해야 한다. 변신을 거듭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꾸준히 어떤 형태이든 공연을 하고 새로운 앨범을 내는 뮤지션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부활을 또는 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여전히 냄비처럼 금방 뜨거워졌다가 식어버리는 반짝 인기에 목을 매달고 있는가. 그런 인기는 이미 충분히 누렸었는데. 아직도 골든디스크 상을 꿈꾸고 있는가? 아직도 가온차트나 소리바다 등 음원 사이트에서 차트 1위를 꿈꾸고 있는가? 인생무상을, (존재의 심연 속에 어둡게 숨어있는) 허무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자신의 초라한 음악적 재능에 비하면 그렇게 과분한 인기를 누릴 자격이 있었는지 스스로 한 번쯤 의아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때 스스로 부끄럽지 않았었던가?
인생은 우리를 실망시킨다.
그러므로 가수 조동진과 이은미, 이적, 밥 딜런을 보라. (조동진은 곧 70세가 된다. 가수는 노래했다. ‘부르지말아요/ 마지막 노래를/ 마지막 그 순간은/ 또다시 시작인데’) 그리고 현대 음악의 모색을 숙고해보라. 그것만이 자신의 음악 인생을 지켜내고 옛날 열렬한 팬들에게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나는 2년 전인가, ‘난 한물 간 가수’라는 말을 처음 듣고 연민의 감정과 함께 어떤 충동을 느꼈다. 내가 육십을 넘을 때, ‘난 이제 한물 간 인간’이라고 자괴하면서 느꼈던 자기 연민의 감정과 일맥상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 곧 죽음이다.
상실감.
우리는 모두 아슬아슬하게, 아니면 그럭저럭 살아간다.
우주는 고독한 곳이다.
나는 우리 대중 문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진실, 환상, 규범, 문법에 대한 짧은 지식마저 결여되어 있어서 독창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분석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마땅히 스스로 해야 할 면밀한 조사를, 고찰을, 해석을, 추측을, 가설 세우기를 멈춘다. 다만 그들의 (경청할 필요가 있는) 말을 정리 또는 편집해서 전할 뿐이다. ‘난 한물 간 가수’가 그 이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라는 이 글의 목적 혹은 주제를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에게 속삭인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라! 마음을 완전히 비우라고! 왜! 쓸데없는 수고를 해! 그대로 베끼라고!’ 그러면 듣는 사람, 읽는 사람이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나 자신에게는 일종의 위악적인 기교이거나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만 들린다. 내 주장을 완벽하게 또는 대충이나마 표창 表彰 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타자의 언어만을 사용한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 것인가? 그러면 이 글의 화자 (또는 필자)는 누구란 말인가? 누가 말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표면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나 아닌 타자가 말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이 정확히 인식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신문, 잡지, 책들, 인터넷, 트위터, 인스타그램, 정당의 정강정책, 정치적 구호, 광장, 이상한 선전물, 각종 광고, 대자보, 사적 대화에서 넘치고 넘쳐흐른다. 단어와 문장의 과잉. 말은 한 사람의 입으로부터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귓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무수히 많은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이 글의 대부분을 인용했다. 아니면 훔쳐서 사용했다.
도처에 말이 차고 넘치니까 말이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라고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쨌거나 순전히 인용 또는 표절에 의해서 (엉성하긴 하지만) 한 편의 글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마크슨의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this is not a novel’를 흉내 낸 것은 아니다. 그 책은 거의 전적으로 다른 작가들의 문장으로만 구성되었는데, 출처를 밝힌 문장이 조금 있고, 대부분은 밝히지 않았으며, 짜깁기한 문장도 많다고 한다. 그런데 난 그 책에 관해 이 에세이를 다 쓴 무렵에야 알았고 물론 아직 구경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모방과 표절, 인용의 경계선은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인용에는 몇 가지 금지사항이 있다. 인용된 문장을 변경시키지 말 것, 그리고 인용문은 단순히 보조적 지위에 있다는 위계질서를 위반하지 말 것. 또한 원전을 제대로 밝히고 인용부호 안에 넣었다는 구실로 너무 긴 문장들을 그대로 넣어서 독자가 원전을 읽을 필요가 전혀 없다면 그것은 이미 표절이란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주제를 붙잡으라, 그러면 언어가 뒤따라온다’고 말했다. 이때 누구의 언어가 뒤따라오는 걸까? 이 경우 물론 작가의 언어를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전적으로 타자의 언어를 가지고 주제를 살리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치고 넘치는 그 많은 것들 중에서 남의 글 또는 남의 말을 제대로 선별해서 이해하고 제대로 인용한 것일까? 혹은 베낀 것일까? 짜깁기한 것일까? (나는 이 에세이를 쓰기 위해서 근 2년 동안 준비했으니 내가 훔친 토막글을 정확히 어디에서 봤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취지를 잘못 이해해서 오용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의미로 슬갑도적 膝甲盜賊 이라는 말이 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 芝峰類說 에서 타인의 문자를 도둑질해서 잘못 쓰는 자를 가리켜 슬갑도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수광은 고사 故事 를 지나치게 많이 인용하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시 한편 가운데 고사 인용한 것이 반을 넘으면 옛사람의 글귀나 말을 표절한 것과 거리가 거의 멀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에세이야 말로 주제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다른 사람의 좋은 글을 (표절이란 개념은 법률적, 윤리적, 양심적 의미까지 포괄한다면 종잡을 수 없이 확장되지만) 표절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순수한 창작물이 어디에 있을까? 신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글을 도둑맞은 필자에게 내가 이해를 구할 일은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남의 글을 어떤 형태이든 표절할 수밖에 없고 실제 표절하니까 말이다. 예외가 있을 수 없다. 글에 쓰인 모든 단어와 문장은 필자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도둑맞은 글이 이 글 내용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주제를 살리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면 그 도둑맞은 글은 그로써 부가가치를 창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된 것이 아닌가.
작성일:2017-01-17 15:56:08 121.138.19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