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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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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악마의 손길 (中)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11-11 13:23:12
조회수
50
성문용은 프로야구 데뷔 후 3년 차부터, 그러니까 처음 팀에서 별 볼일 없는 중간 계투 선수로 몇 년을 보낸 후 트레이드가 된 다음 해부터 투수로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그때부터 전성기가 시작되었으니 팀의 주전 투수가 되었고 덩달아 몸값도 뛰고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어느새 공이 조금씩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고 방어율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따라서 이기는 경기보다 패전하는 경기가 더 많아졌다. 이제는 2군으로 내려가야 할 정도였다.
갑작스럽게 공이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밋밋한 공은 어김없이 얻어맞았다. 그래서 그 즈음엔 내 실력이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게 되었다.
야구에서 슬럼프의 기준은 딱히 없지만, 그래도 타자의 경우 지난 시즌 대비 타율이 현저히 떨어졌거나 투수의 경우 평균 방어율이 현저히 상승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스타급 최고 선수라 해서 슬럼프를 겪지 않거나 또는 덜 겪거나 무명 선수라고 해서 슬럼프를 더 자주 겪는 것도 아니다. 성적이 뛰어난 선수가 슬럼프를 안 겪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다. 어느 스포츠이건 선수는 오랜 선수 생활 중에 크고 작은 슬럼프를 경험한다. 슬럼프는 신체적 이상과 함께 오기도 한다. 오히려 가장 흔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력이 입증된 유명한 선수가 까닭 모르게 슬럼프를 겪을 때 느끼는 스트레스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프로 선수에게 슬럼프는 부상과 수술, 재활 훈련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복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봄 동안 허리 통증을 겪었고 계속 좋지 않았는데 그 해는 고약한 슬럼프로 선수 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 프로 선수 생활 중 두 번째인가 세 번째 겪는 극심한 정신적 슬럼프였다. 계속 양방과 한방 치료를 받았지만 5.16까지 치솟은 방어율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리 통증이 가셨는데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한번 무너진 투구 폼이 도대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금지 약물을 복용했다. 그건 악마의 유혹이었다. 도저히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다. 약은 언제든지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자신과의 기나긴 일생일대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그런데 슬럼프를 피하려고 하는 것보다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선수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바닥을 찍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을 때 그때부터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선수들은 자신이 슬럼프에 빠져서 바닥으로 떨어진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데?) 그러면 슬럼프는 헤어날 길 없이 길어진다.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은 코치를 따로 찾아가 조언을 받고 투구법을 교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걸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새 스스로 스타 선수라고 뻐기는 그릇된 자부심이 그를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슬럼프는 인생의 동반자인 고독과 불안처럼 늘 함께한다. 중요한 건 슬럼프에 안 빠지는 게 아니라 가끔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인 그 슬럼프에서 가능한 한 빨리 탈출하는 것이다.
그는 그냥 자신의 자리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해마다 시즌을 시작하면서 그가 그리는 목표 안에 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그만큼 안 되면 남몰래 씩씩거리며 혼자서 연습하기로 작정하였다. 야구는 선수의 성적 관련 통계가 너무나 철저하다.
어떻게 하여 그 통계 숫자를 속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투수로서의 성적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밑에서 위로 올라갔다가, 위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기복이 심했던 것이다. 그는 성적이 위에서 떨어지는 게 너무 싫었다. 한 해는 잘했다가 다음 해는 떨어졌다가 다시 한 해는 잘했다. 그렇게 되는 게 싫었다. 그 자신이 마음속에 목표로 정한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지표인) 방어율이 일정한 기준에 도달하면 그때부터는 기복 없이 쭉 가고 싶었다.
이제부터 부상을 당하거나 아프지 않으려고 철저히 준비를 잘하자.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하고 투구폼을 흐트러지지 않게 유지하자. 더 아프기 전에 빨리 알아서 치료하자. 또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자. 회식을 할 때도 끝까지 갈 분위기만 풍기고 그러나 끝까지 가지는 않아야 한다. (아니 그렇게 몇 번이고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심은 너무 쉽게 무너졌고 자주 반복적으로 크고 작은 슬럼프를 겪었고, 그래서 악마의 손길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를 잃어 버렸다. 딱히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오고 온갖 걱정에 휩싸였다. 몸이 떨리거나 후들거렸고 숨이 가쁘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질식할 것 같은 느낌. 어지럽거나 불안정하거나 멍한 느낌이 들고 쓰러질 것 같았다. 실수하면 어쩌지? 만약 이렇게 되면? 저렇게 되면? 어느 순간 갑자기 공을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던지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두려움이 더 큰 두려움을 낳고 있었다. 고통이 점점 커져서 나를 삼켜버리고 있는 거야. 도무지 버텨낼 수가 없어. 이제 그만. 야구는 그만이야. 야구는 그만이라고. 나이 탓인가? 체력이 고갈된 것인가? 벌써? 회복은 불가능할 것인가? 이러다가 2군으로 내려갈 것인가? 방출될 것인가? 병원에? 술을 마실까? 약을? 약효가 강한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주절거리는 게 제일 좋은 거야. 다시 말하면 수다를 떨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늘어놓는 거야. 그런데 누구에게? 무언가 바늘 같은 것이 내장 안을 찌르는 것 같다. 그는 배가 아팠고 머리가 어지러웠으며 팔다리의 통증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자주 오줌을 누고 싶고 구토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구토가 나올 것 같았지만 요란한 헛구역질만 나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는 수많은 관중들의 시선이 집중된 운동장에 가서 마운드에 오를 수 없을 거야? 그러나 내 상처를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어디에서 도움을 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도와달라고 말하기가 부끄럽지 않을까? 안 된다. 비밀로 꽁꽁 감추어야 한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지.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면 절대로 안 돼. 초조해서도 안 되지. 함정에 빠져서도 안 돼. 후배들 앞에서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팀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자존심이라고 자존심, 자존심 문제란 말이지. 나는 스타야, 스타라고. 경기를 하려면, 승리를 거머쥐려면 기가 살아야 한다.
그는 그때 너무 혼란스러웠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갈피를 못 잡았다. 그는 예리한 칼로 몸을 찔러서 긋기 시작했다. 고통이란게 어떤 것인지 느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흐르는 검붉은 피를 보며 흥분 또는 공포를 느끼기 위해서였다.

* * *

유명현 변호사가 말했다.
“프로에서 처음 데뷔했던 시합이 기억나나?”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이었는데요. 그렇게 정확히 기억나는 경기는 또 없겠지요. 감독님이 전날 중간 계투로 나갈 거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너무 흥분하고 긴장해서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첫 경기의 성적은?”
“정작 경기에 들어가니까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 이닝에서 시작하자마자 스트레이트 볼넷을 연속으로 내줬죠. 포수 미트가 아예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2이닝 동안 포볼 2개 3안타 2실점하고 내려왔습니다.”
“땀깨나 흘렸겠구먼……”
“처음부터 끝까지 등에서 줄줄 흐르는 게 느껴졌습니다.”
“지금부터는 야구단 단장인지…… 사장인지…… 그리고 막강하다는 프런트에 관해 이야기해보게.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지? 일요일 판 신문에서 그에 관해서 특집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거든.
어떤 단장이 말했었지. ‘성향이라던가 성격이 다른 70~80명 이상의 선수와 스태프를 한마음으로 모으는 건 무척 어렵습니다. 제가 선수 때는 내 것만 잘하면 됐는데 단장이 되니까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야구가 참 잘 보였는데 안에 들어와 보니까 이런저런 돌발 상황이 일어나서 뜻대로 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점이 힘들어요.’”
“단장의 역할은 감독의 역할과도 겹칠 수가 있는데요…… 서로 역할 분담을 해서 호흡이 잘 맞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팀이 망가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야구팀도 엄연히 조직이거든요. 단장이건 감독이건 조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단장은 버려진 선수를 찾아내서 키우고 성과를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값비싼 선수를 데려와서 한다면 누가 못하겠어요?
선수를 고를 때 야구에 대한 기본 실력은 물론이고, 야구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를 중시해야 합니다. 어떤 선수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동료 선수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태도를 살펴보고, 평소에 어떻게 생활하는지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선수가 아닌 인간을 스카우트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그 수많은 선수들 중에는 본받을 만한 훌륭한 선수가 있었을 것 아닌가?”
“저는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최고의 타자도 타율이 3할 대를 넘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열에 일곱은 실패한다는 말이지요. 야구는 실패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지요.”
“선수 중에는 거만한 선수가…… 그러니까 저만 잘난 척 하는 선수도 없지 않을 텐데?”
“저는 잘난 척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믿어주세요. 팀의 균형을 깨는 선수는 스타 플레이어라도 언제든지 내보내야 합니다.
몇몇 스타에 의지해서 팀을 운영할 것이 아니라 팀이 이길 수 있도록 팀 전체를 단합시키는 것이 중요하지요.
우리 감독님은 많은 문제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철저했습니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입니다. 통계적으로, 수학적으로 분석해 선수의 재능을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축적된 자료를 가지고 선수의 기량을 끌어올리거나 부상을 방지하는데 활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말입니다…… 선수의 성적이 극도로 부진할 경우와 가장 좋았던 경우를 엄밀하게 비교해서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모든 스포츠는 멘탈 게임이 아닌가? 인간은 정신인지 심리인지 그게 문제라니까. 특히 어느 종목보다도 야구가 심하지. 그래서 야구에는 징크스도 많던데?”
“정말 그렇습니다. 야구는 인간이 하는 멘탈 게임이기 때문에 징크스나 저주가 많은 것이겠지요. 그걸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깨지지 않는 징크스는 없겠지요.”
“술을 좋아하나? 가끔 언짢은 기분을 풀려면 그게 최고일 텐데. 나는 젊은 시절부터 너무 많이 마셨다네. 그 힘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살고 있지……”
“변호사님이…… 그건 알코올 중독이거나 알코올 의존증 아닌가요? 선수들도 가끔 모여서 술을 마시긴 해요. 하지만 전 술이 몸을 망친다고 생각해서 많이 마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구만…… 언젠가 감독을 해보시지. 잘할 것 같은데……”
“야구 감독 한 번 하는 게 일생일대의 꿈이었지요. 저만의 야구를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제게는 야구 철학이 있거든요.
감독이 아무리 파리 목숨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지요.
끝났다니까요. 끝났…… 영구 제명이 된 거라고요.”
“내가 눈치 없이 말을 잘못 꺼냈구만.”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네요.”
“인간이 꾸는 꿈은 모두 개꿈이라네.”
“글쎄 말입니다.”
“다시 묻고 싶은데…… 궁금하니까…… 감독이 왜 파리 목숨이 되어야만 하지?”
“세이버 메트릭스라고 하던데요. 그게 야구 통계학인데요…… 야구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숫자로 바꾸는 세상이 됐습니다.
컴퓨터 때문이죠. 그래도 말입니다…… 감독이 팀 성적에 얼마나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도 아직 정확하게 수치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야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거의 모든 감독이 자기 능력 또는 무능을 드러내기 전에 경질되기 때문에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도 말이지…… 그 사정을 알고 싶었다네. 어떤 감독과는 불화설이 있었다는데…… 오래된 일이니까 내가 오해했을 수도 있고 잘못 들었을 지도 모르지? 그 감독은 그 후 성적 부진으로 쫓겨났지만…… 헛소문이었던가, 아니면 실제 그랬었던가?”
“프로야구에서 처음 만났던 그 감독과는 애증의 관계였죠. 심정적으로는 서로 맞지 않았어요. 어쩐지…… 너무 심하게 엄격했어요. 그래서 저는 쓸데없이 반항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래도 한 팀에 있으면서 그러면 괴로운 일일 텐데……?”
“매우 엄격하게 통제했습니다.”
“대부분 감독이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분명히…… 그 감독은 유독 까탈스러웠지요.
너무 지독했어요.”
“뭐가 있었지?”
“제가 지금부터 그 감독을 고발해야 하겠군요. 진실을 말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죠.
그 감독은 규율을 무척 강조했습니다. 운동장 밖에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등 생활이 흐트러지면 운동장 안에서도 플레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격하게 통제한 것입니다.
그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을 혹사했습니다. 너무 심했지요. 그것도 팀 성적을 올려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랬단 말입니다.
감독은 선수 개개인에게 맞춰서 가르쳐줘야 하는데 너무나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고 자기 것만 가르치니까 오히려 선수에게는 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선수들이 아프다고 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어요. 꾀병으로 간주하고 더 다그쳤습니다.”
“그 감독은 유명했는데…… 밖에서 아는 것하고는 영 딴판이구먼.”
“그렇겠지요. 밖에서 그런 내막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자기가 유명한 투수 출신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자신이 제일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했지요. 한마디로 오만했던 것입니다.
그랬으니 구단 운영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고…… 프런트와는 끊임없이 충돌했지요.”
“세상 어디에나 자기중심적이고 과대망상적인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 훌륭한 선수가 훌륭한 감독이 되라는 법은 없는 걸세. 어떤 종목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자네는 어떤 스타일의 감독을 생각하고 있었나?”
“저는 야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출전 정지가 되니까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지요. 그래서 선수 생활이 끝나더라도 야구를 떠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단계적으로 계속 올라가서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제가 어리석어서 물거품이 되었습니다만 제 나름대로 감히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감독은 선수들을 공평하게 대하려고 해야지, 똑같이 대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면 모든 선수가 성격과 특성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지요. 좀 더 혹독하게 훈련을 시켜야 그제서야 움직이는 선수가 있고 칭찬을 하고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지도해야 통하는 스타일이 있지요. 선수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감독은 선수들과 정말 대화를 많이 나누어야 하지요. 그때는 친형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야구장에 나오는 게 즐거워야 하지 않겠어요? 연습하고 경기하는 게 가슴 설레이도록 기다려져야 합니다.
감독은 선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비록 지독하게 통제를 해도 말입니다. 선수들은 제각기 개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감독에게는 그런 탁월한 리더십이 필요하겠군.”
“감독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지요. 미국식 프런트가 등장하면서 실제 권한은 프런트가 쥐고 있어요. 그러니까 감독은 프런트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고있습니다. 팀 운영이나 선수 교체, 코칭 스태프의 구성에도 프런트가 일일이 간섭하는 거죠. 성적이 계속 떨어지면 즉시 교체될 수 있으므로 감독은 파리 목숨이지요.
요즘 너무나 야구 상식이 풍부한 열성 팬들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기도 합니다.
팀 성적이 나쁘면 괜스레 감독을 타깃으로 해서 분풀이를 하는 거죠. 팀이 연패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 감독은 온라인에서 거의 뭇매를 맞는 거지요. 이때 프런트의 책임은 쏙 빠져버리지요. 밖에서는 프런트와 감독 간 알력이나 대립은 알 턱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 감독 연봉의 절반은 욕먹는 값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뭐더라…… 그렇지 않은가…… 넥센이라고 있지? 그 팀 감독이…… 누구였는데?”
“염 감독님 말씀인가요?”
“그렇지. 이제 기억이 나는군.”
“훌륭한 감독님이죠. 맨날 꼴찌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지 않았습니까.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아버지가 훌륭한 변호사였거든. 훌륭한 아버지가 훌륭한 아들을 만드는 거지. 나는 그렇지 않네만……”
“왜 그 감독님을?”
“갑자기 생각이 났다네. 그 친구 선수시절은 별로였던 모양이야. 선수 생명이 짧았어. 그러고 나서 닥치는 대로 프로팀의 운영팀장도 하고 작전 코치와 주루 코치, 수비 코치도 했던 모양이야.
그러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생겼다는 거야. 그리고 야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지.”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내가 무슨 신문에 난 인터뷰 기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네.
하지만 결점이 하나 보이는 거야. 작전을 펼칠 때 보니까 무슨 망설임 때문인지 혹은 두려움 때문인지 너무 생각을 많이 하더라고.
이게 나만의 생각일까? 때로는 지극히 단순해야 하거든.”
“저에게도 진정한 꿈이 있었지요. 버려진 이름 없는 선수들을 데려다가 훌륭하게 키워내는 것이죠. 그들의 꿈을 이루게 해주고 싶었지요. 모두 함께 노력해서 꿈을 이룬단 말입니다.”
변호사가 멍한 눈으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날따라 작은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어 보였다. 하늘은 금세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회색 구름으로 덮여있다. 손목시계를 본다. 그리고 낡은 접이식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난 야구 이야기가 재미있으니까 자주 올 수 있다네. 택시가 올 시간이지. 자네한테는 미안하지만…… 오늘 밤에는 이놈의 날씨 때문에 술에 취하고 싶지.
자네 말대로…… 알코올 의존증일 거야. 아직 중독까지는 안 갔을 걸. 내 좁은 사무실에는 값싼 양주병이 여러 개 있지. 독한 술이 좋은 거야. 이유 없이 홀짝 거린다네.
그러니까 울적한 기분이 들면…… 술잔을 들고 길게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는 거지. 그러면 머리끝까지 곤두서는 싸늘한 기분이 온몸을 감싼다네. 지금 당장은 밖에 나가서 담배를 빨고 싶지.”

* * *

테스토스테론은 남자를 남자답게 만드는 호르몬이다.
울퉁불퉁한 근육, 거뭇거뭇한 수염을 만든다. 1935년부터 테스토스테론 유사체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가 다량으로 만들어졌다. 혈압, 신장, 당뇨 치료제로 쓰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의료용이었지만 멀쩡한 사람이 이 주사를 맞으면 근육이 늘어나고 힘이 강해졌다. 그래서 스테로이드가 운동 선수들 사이에서 마법의 주사로 은밀하게 돌기 시작한 것이다.
몇 주간 스테로이드를 주사로 맞거나 약으로 먹으면 근육이 증가하고 힘이 늘어난다.
최근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도핑약은 두뇌 도핑에 사용되는 도파민과 노니페린으로 두뇌 호르몬이다. 이 주사 한 방이면 근육은 탄탄해지고 손발은 민첩해진다. 그리고 혈액 도핑은 근육에 산소를 더 공급하게 한다. 산소가 더 많아지면 더 빨리 더 강하게 움직일 수 있다. 수혈로 산소 운반 적혈구를 늘린다. 타인이나 자기 피를 몇 주 전에 뽑아 놨다가 시합 바로 전날 맞는다.
그러나 심근경색, 뇌졸중, 간종양, 무월경이라는 부작용이 있다. 애너볼릭 스테로이드는 근육을 빠르게 생성하고 골밀도를 늘리는 데 최적화된 약물이다. 자율신경계와 손 발 등을 비대화시키고 생식기를 이상하게 변하게 한다. 어깨와 등에 여드름 증세 탈모 고환이 축소되면서 정자수가 급격히 떨어지는 심각한 약물 후유증을 겪는다. 애너볼릭 스테로이드는 신체 모든 세포에 침투해 원래 체내에 유지되던 각종 호르몬과 세포 균형을 전부 깨기 때문에 중독이 되면 뇌뿐만 아니라 간 콩팥 전립샘 등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이 약물은 단백질 합성을 촉진해 근육을 빨리 만들어주기 때문에 효과가 탁월한 만큼 부작용의 범위가 큰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밝혀지지 않은 부작용도 많다.
도핑검사는 소변, 혈액 속의 흔적 물질을 찾는다.
방해 도핑은 도핑 약물이 검출되지 않도록 방해 물질을 주사하는 것이다. 교묘하게 도핑을 감추겠다는 것이다. 이뇨제로 소변량을 늘리고 수혈 보조제로 혈액 수분을 늘린다. 소변 혈액이 희석되면서 도핑 약물 검출이 어려워진다. 숨기려는 도핑과 찾으려는 반도핑이 숨 가쁘게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환각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데다가 중독성이 강한 그 약을 멀리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아침에 잠이 깨면 다시 약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단증세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는 50경기를 뛰지 못한다. 사실상 시즌 아웃이 되었다.
한국야구위원회 (KBO)는 구단에도 제재금 1억 원을 물렸다. 한국야구위원회가 주관했던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 약물에 양성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동화 작용이 있는 남성 호르몬 스테로이드 계열 약은 세계반도핑기구가 지정한 제1종 상시 금지 약물에 속한다.
한국야구위원회는 등록 선수 중 구단별로 5명씩 총 50명의 선수를 대상으로 표적 검사를 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도핑컨트롤센터의 분석 결과 그를 제외한 49명은 음성 판정을 받았다.

유명현 변호사가 말했다.
“지금은 사정이 이렇게 변했네만…… 운동장에서 수많은 관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포효하던 때가 엊그제 같을 텐데 정말 답답하지.
그런데 그때 왜 은퇴를 생각하지 않았나? 지나간 일이지만…… 그때 도저히 슬럼프를 벗어날 수 없었다면…… 팀 동료나 후배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차라리 잘 됐을 텐데.
너무 때늦은 후회가 되겠지?”
“그때는 아직 물러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창피하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말입니다. 지금 당장 유니폼을 벗기엔 너무 아쉬운 게 많았습니다. 언젠가 야구를 그만둘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슬럼프는 일시적인 거고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고…… 한창일 때 그 좋았던 공이 왜 안 나오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지요.
선수는 운동장에서 제일 행복한 거라고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일이 계속적으로 꼬이기 시작했었지 않습니까? 훈련을 정말 성실하게 했는데 직구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고 투구 폼도 알게 모르게 흐트러졌지요. 그러니까 약물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그렇게 된 것이지요.”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오랫동안 그렇게 야구를 했는데 말이지, 어떻게 폼이 흐트러진단 말인가? 그 폼은 일단 확립되면 빳빳하게 굳어 있을 거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슬럼프가 찾아오면 그렇게 된답니다. 인간의 동작은 기계가 아니거든요.
한 번 투구 폼이 망가지면 정말 말썽이지요. 그건 타자들도 마찬가지에요. 나쁜 폼을 가지고 하면 아무리 연습을 해도 더 나빠져요. 그런데 마음이 급하니까 이것저것 폼을 바꾸면 더 나빠져요.
자기한테 맞는 것으로 쭉 나가야만 하는데.”
“만약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고 하고…… 그러니까 나이가 들면 후배들의 눈초리가 따갑지 않을까? 거 왜 있지 않은가?
유명한 탤런트나 한창 잘 나가던 가수들도 때가 있는 법이고…… 언젠가는 한물가고 뒤로 밀리니까 말이야.”
“누구나 나이가 들어가면 경기력이 조금씩 쳐지니까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후배들이 불편하다고 해서 내가 나갈 입장은 아니지요. 후배들은 오직 실력으로 선배를 밀어내야만 하지요.
후배들은 이걸 알아야 해요. 선배들이 오래 있어줘야 자신들도 오래 있을 수 있는 거다. 선배가 그런 식으로 빨리 나가면 그 후배들도 언젠가 똑같이 밀려나가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선배들이 굳건히 버티는 것을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해요.”
“야구선수 중에 친한 친구가 있는가? 또는 야구선수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친구는 중요하다네. 나이가 들수록 뼈저리게 느끼지.”
“우리는 고등학교시절 야구 때문에 행복했지요. 저에 대해 나쁜 소식이 돌면 그 친구가 바로 연락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저는 투수이고 그는 포수였거든요. 우리는 그때 맨날 붙어살면서 친형제보다 가깝게 지냈어요.
그 친구는 머리가 좋아서인지 학교 졸업하고 삼수를 해서 명문 대학으로 진학했어요. 나중에 은행원이 되었어요.
저는 바로 프로팀의 연습생으로 갔구요. 체육 특기생으로 오라는 대학은 몇 군데 있었습니다. 대학 가봤자 어차피 공부는 안 할 텐데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요? 요즘 대학에 안 갑니다. 프로팀에 들어가는 거죠. 바늘 구멍처럼 좁지만 말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할머니만 계시니까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무슨 나쁜 소식이 들리면 그게 사실이냐고 물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는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매스컴에서 내 이름이 등장하자마자 나를 찾아와서 위로인지 충고인지 늘어놓더군요. 하지만 저는 냉정하게 네가 뭘 안다고, 겨우 은행원이나 하는 주제에, 나는 스타 출신이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마구 쏘아 붙였습니다.
그와는 결국 인연이 완전히 끊어졌지요. 그의 마지막 잔소리가…… 잔소리가 아니라 훌륭한 충고였는데……”
“혹시 예수님을 믿으려고 교회에 다녔는가? 때로는 하나님에게 의지할 수 있으니까.”
“아닙니다. 할머니는 열심히 다녔습니다만 저는 고집을 피우고 안 따라갔습니다.”
“왜? 그랬나?”
“그냥 교회도 목사도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찰이나 검찰도 그걸 물어봤거든요. 그것도 그저 지나가는 말투로 형식적으로 그랬습니다.”
“나도 잘은 모르겠네만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하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인 거지. 교회에 다니니까 믿을 수 있다고?”
“어쨌거나 지금 새삼스럽게 믿을 생각은 없습니다.”
“‘야구는 핀치에 몰리면 대타나 구원이 있는데 인생엔 그런 게 없다.’고 하더군요.”
“인생에 대타나 구원이 없다는 말이지? 인생은 쓸데없이 길다네.”
“변호사님의 경우는 어떤가요?”
“난들 별 수 있나. 보다시피 내 나이가 꽤 되었지. 대머리에다 몇 가닥 남은 흰머리 보게.”
“저도 감방 안에서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어요. 옛날에 판검사 하면서 떵떵거렸을 거고 변호사해서 돈도 많이 벌었을 거 아녜요?”
“내가 떵떵거렸다고…… 겨우 말석으로 합격해서 시골에서 바로 개업을 했다네. 사실대로 말하면…… 젊었을 때니까 떵떵거리고 싶었겠지. 하지만 아버지가 6.25 전쟁 때 부역을 해서 연좌제에 결렸기 때문에 임관될 수 없었지.
그리고 장사가 잘 안되니까 여기저기 옮겨 다녔어. 오죽하면 이 나이에 국선을 하고 있겠나. 이게 내 밥줄이라네.”
“설마……”
“가끔 마음속으로 울고 싶어질 텐데. 안 그런가?”
“정말 많이 울고 싶었던 때가 있었긴 합니다. 출전 정지가 풀리면서 처음 나간 재기전을 잊을 수가 없지요. 데뷔 전이나 트레이드 되고 난 후 첫 출전 때보다 더 그랬어요. 엄청 긴장했거든요. 그래서 투구 내용이 안 좋았어요.”
“다시 생각해보면…… 그 도박 말일세…… 자네는 돈에 대한 욕심이나 무슨 비틀어진 속물근성 때문이 아니라…… 그때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으니까 손을 댔는데…… 그만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게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물은 약물이고. 도박만 안 했어도 제 운명은 달라졌겠지요.”
“너무 크게 질렀어. 그동안 연봉으로 모아둔 막대한 돈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도박 빚을 갚았지만 여전히 10억원이 넘는 빚이 남아있다는 거 아닌가?”
“그렇게 됐지요, 뭐.”
“그놈들은 꽤 잘 짜여진 관료주의적인 조직체였어.
그 브로커 역시 중간 두목급에 불과한 거야. 그들이 자네를 상대로 게임을 벌였단 말이지. 그 게임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었네. 결국 그 게임에서 졸 역할을 한 거야.”
“그 졸이라는 게 다름 아니라 미끼였단 말씀이군요. 어리석게도 미끼였다구요.”
“인간들이 기대하는 최선이란 게 바로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것인데 말이야. 하지만 희생자가 되고 말았네.”
“그만 하세요…… 그만 두라고요…… 제가 스스로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으니까요……”
“그럴 테지. 진정하시게.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네. 왜 없었겠는가. 자업자득이지. 내가 이 모양이니 친구들이 없다네. 늙게 되면 사람들과 어울리고 관계를 맺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지.
자신을 보호하고…… 그러니까 신경질적인 노인이 안 되려면 외부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아주 단순화시켜야만 하는 거라네.
요즈음 매일 혼자서 술 마시는 게 무척 고역이지만…… 그래도 술이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 * *


성문용은 마카오에서 수십억 원대의 원정도박을 벌인 혐의를 받고 있었다. 경찰은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그의 금융계좌를 추적하고 KBO 프로야구 경기 기록지와 휴대폰 통화와 문자 메시지 내역을 포렌식 조사했다.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지만) 그는 예전에도 가끔 프로야구 시즌이 끝나면 동계 훈련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몇몇 동료들과 함께 마카오로 가서 순전히 오락거리로 슬롯머신을 하거나 블랙잭을 했었다. 그때는 작은 돈으로 했고 돈을 잃기도 하고 약간 따기도 했다.
도박은 악의 근원이다. 그 손길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다. 돈을 잃으면 본전 생각 때문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돈을 따면 욕심이 나서 더 크게 지르게 된다.
인간은 도박을 하는 동물이라지만 그것은 탐욕의 자식이고 죄악의 형제이며 해독의 아버지이다 (G. 워싱턴).
그래서 종목을 불문하고 일부 프로 선수들은 전지훈련 중에는 물론이고 시즌 중에도 경기가 끝난 뒤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많게는 수천만 원씩 베팅을 해서 불법 도박을 해왔다. (이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는 그때 수사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마카오 현지 카지노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는 조직폭력배들에게 도박 자금을 빌린 뒤 한국에 들어와 돈을 갚는 방법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조폭들은 그가 믿을 수 있는 유명한 프로야구선수였기 때문에 그에게 도박 자금을 빌려주고 숙박, 항공, 차량, 환전 등 일체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리고 마카오 현지에서 도박 자금을 빌려줄 땐 나중에 발뺌하지 못하도록 계약서를 쓰고 동영상까지 찍었다.
그는 조폭들이 마카오 현지에서 운영하는 정킷방을 이용한 것이다. 정킷방은 VIP를 위한 일종의 도박방으로 규모에 따라 1년에 70억~150억 원의 보증금을 내면 카지노에서 임대받아 정킷방을 운영할 수 있다. 정킷방은 판돈의 일부를 정킷방 업주가 챙기는 ‘캐주얼 정킷’과 고객이 잃은 돈의 일정 부분을 카지노에서 받는 ‘셰어 정킷’으로 나뉜다. 카지노와 정킷방 업주는 고객이 게임에 참여해 이긴 금액은 반반씩 부담하고 잃은 금액은 일정한 비율로 나눠 갖는다. VIP룸에서는 90퍼센트 이상 바카라라는 카드게임을 한다. 바카라는 단숨에 승부가 나고 회전율이 빨라 딜러나 업주, 게임 참여자 모두 선호한다.
그가 묵었던 호텔은 세련된 반달형의 하얀 12층 건물이다.
그 호텔 어딘가에 특별한 VIP 고객들만 들어갈 수 있는 정킷방이 숨어 있었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마다 육중한 붉은색 벨벳 커튼이 연극 무대의 막처럼 드리워져 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박에 열중하기 위해서 시계가 보이지 않는 방.
어두운 욕망과 흥분과 열정과 소리 없는 탄식이 교차하는 방.
경찰은 최근 해외 원정도박 기업인과 도박을 알선한 조폭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성문용이 도박을 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 브로커는 마카오에서 귀국하면서 인천공항에서 꼼짝없이 체포됐다. 경찰은 그의 휴대전화에서 동영상과 문자메시지 등을 복원해서 수사 단서로 활용했다. 그는 중간 두목급으로 단순한 브로커가 아니었다.
그는 카지노의 에이전트였고 불법 스포츠 도박에도 관여한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리고 고액의 수수료를 받으며 불법 환전을 통해 국내 유력 인사들의 검은 돈을 세탁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한국에서 환전 브로커에게 현금을 건네면 해외 환전상이 현지에서 이를 달러 등으로 바꿔 되돌려주는 방식이다. 환치기로 만든 검은 돈을 카지노에 넣어 두면 이자는 없지만 거래 명세나 환전 사실 등이 적발될 위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예치자의 신분 또한 확실하게 비밀 보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마카오 도박장은 은행의 금고보다도 더 안전한 금고인 것이다.
그러나 상습 도박이건 불법 스포츠 도박이건 불법 환치기이건 현금화하는 단계에서 반드시 대포통장을 이용한 자금 세탁을 거쳐야 하니까 문어발식 조직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부 조직으로 현장에서 실제 일을 하는 조무래기 조직폭력배가 필수적이었다.
대포통장을 모으는 모집책과 은행에서 자금을 인출하는 인출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끔 지독한 협박과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도 그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필로폰이나 엑스터시를 공급해야 하는 경우에는 마약 조직이 있어야 하고, 요즈음 도박 사이트 별로 회원 유치 경쟁이 치열하다보니까 가끔 경쟁사 홈페이지에 과부하가 걸리게 해서 마비시켜야 하므로 이때는 디도스 공격을 담당하는 해커 조직도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세분화된 각 파트마다 자체 구성원과 책임자급 두목이 있었고 서로 완전히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전체 조직을 아우르고 지휘 총괄하는 회장님과 극소수의 측근들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여러 개의 가명을 썼고 수십 개의 대포폰을 이용했으며, 그나마 기록이 남는 전화 통화는 가끔 했을 뿐이고 주로 암호화된 문자를 모바일 메신저로 주고받았다.
그들은 정킷방이 있는 호텔 12층에 있는 최고급 스위트룸에 간이 사무실을 차리고 업무를 처리하였다.
그 브로커가 경찰에서 진술했다.
“저는 10년 넘게 마카오 카지노에서 에이전트로 일했습니다.
중견기업 대표, 유명 연예인, 스타급 프로선수 등 고객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장부를 직접 관리했지요.
특히 현지에서 도박 빚을 빌려줄 때는…… 그걸 일명 빽이라고 하는데요…… 꼼짝달싹 못하게 차용증에 지장을 찍게 하고 동영상까지 촬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객이 돈을 잃어야만 정킷방 운영자와 에이전트가 돈을 버는 것은 아닙니다. 고객이 돈을 따서 계속 칩을 교환해야 수수료를 따 먹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가 고객은 결국 다 잃게 됩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도박 자금을 탕진하고 현지에서 빽까지 쓰게 되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조폭의 빚 독촉과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 야구선수는 모아놓은 돈 다 털리고. 본전 생각 때문에 점점 크게 덤벼들었지요. 그랬으니 도박 빚이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불어났지요. 마침내 도박의 함정에 빠진 거예요. 누적 도박 빚이 10억인지 그 이상인지 될 거예요. 당장은 감당할 수 없는 돈이겠지요.
그러니까 남아 있는 돈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징계 기간이 끝나고 나서 재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판단했을 때 승부조작을 하라고 협박한 것이죠. 야구 경기는 조작이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죠. 그래서 베팅 금액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승부조작을 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불법 스포츠 도박에서는 이리저리 잘 엮어서 승부조작에 성공하면 처음에는 조그맣게 시작하지만 점점 커져서 누적이 되면 아주 쉽게 10억 이상도 벌 수 있거든요. 틀림없어요.
그 유명한 야구선수는 탐욕 때문에 그 유혹에 걸려든 겁니다.
그런데 몇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과정은 따지지 않고 오직 결과만 봅니다.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지요. 그랬으니 그쪽 조폭들이 아주 심하게 했을 것입니다.
물론 저하고는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전 에이전트에 불과하고 환치기 전문입니다. 자세한 것은 그쪽에 알아봐야 할 거예요.
다시 말씀 드리면 한국에서 오는 VIP들은 대부분 전문 모집인을 통해 옵니다. 전문 모집인들은 국내 카지노나 골프장, 강남의 최고급 유흥주점 등에서 대상을 물색하지요. 국내 도박 관련 커뮤니티 등에도 많은 홍보 글을 남깁니다.
그러니까 인터넷에 올라오는 해외 원정 후기의 10퍼센트 정도만 어쩌면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돈을 얼마 땄다는 글은 대부분 미끼용 홍보글입니다. 이렇게 모집한 고객이 게임에 참여할 때마다 쓰는 게임비의 통상 몇 퍼센트는 수수료로 정킷방에서 전문 모집인에게 지급합니다.
성문용은 출장 정지를 당하니까 오기가 생기면서 약간은 반항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겠지요. 인터넷을 보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입니다. 불과 몇 달 동안 도박에 빠져서 그렇게 된 거예요.”

* * *

유명현 변호사는 그날따라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있는 교도소 특유의 역겨운 냄새가 느껴졌다. 검정색과 흰색의 사각 리놀륨이 깔려 있는 접견실의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안경을 만지작거렸고 가끔 신경질적으로 벗었다가 다시 쓰곤 했다.
“도박은 악마야…… 그놈의 도박 빚 때문에? 돈에 몹시 쪼들리고 있었으니까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웠겠지.”
“재기하면 성공할 수 있었어요. 선발 출장도 보장되었구요. 그런데 연락이 온 거예요. 그걸 잘 처리해주면 빚을 깨끗이 없애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충분히 보상을 해준다고 했어요. 결코 섭섭하지 않게 말이지요.”
성문용은 그 유혹에 넘어갔다. 또다시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다. 그는 투수 마운드에 올라서면 그들이 경기장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머릿속에 혼란스러워지며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선발에서 제외되고 패전을 처리하는 중간 계투 투수로 강등되었다.
“수사 기록을 보니까…… 걔들한테 죽도록 얻어맞지는 않았나?
그게 점점 컨디션을 회복하면서 신문의 스포츠면에서 단신으로 재기에 성공했다고 한 여름 무렵부터 그 제안을 했고 하지만 승부조작에 실패하니까 그때부터 말이야…… 그것들은 남을 죽도록 때리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놈들이야.”
“솔직히 귀가 솔깃했지요. 빚도 없어지고 게다가 목돈도 쥘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저는 흔쾌히 응했어요. 그러니 절대로 때릴 이유가 없었지요. 조건이 좋았어요. 채무면제 합의서도 받았고…… 선금도 두둑이 받았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신사적으로 처리했습니다.”
“돈을 그렇게 많이 잃으면 멘붕이 되어서 정신적으로 공황이 올 텐데 그런 상황에서는 유혹을 이겨낼 수 없었겠지. 다시 말하면 인간의 본능은 일확천금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거야. 인간은 비논리적이고 오류 투성이의 존재이거든.”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투수나 타자를 포섭하라는 지시는 안 받았나? 야구 경기의 특성상 타자를 포섭하지 않으면 승부조작이 어렵겠더라고?”
“당연히 받았지요. 하지만 제가 먼저 시작하고 성공하면 그때부터 친한 동료들을 끌어들이려고 했어요. 몇몇하고는 이심전심으로 이미 이야기가 되었지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 유혹에 넘어갔고…… 나중에는 심한 협박을 받았고…… 후배를 끌어들이려고 시도했고…… 그걸 검찰에서 순순히 이미 진술했단 말이지?”
“그렇게 되었지요.”
“자유계약 선수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제가 투수 아닙니까. 투수는 타자와는 대우가 다르지요. 제가 재기에 성공했으면 4년에 20억, 30억이 가능했겠지요.”
“좌우지간 안 됐구먼.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으니……”
“…… 잘 모르겠습니다.”
“선수 생명이 끝나면서 괴로웠겠지…… 그렇지 않나? 술 꽤나 마셨겠군. 그럴 때는 알코올이 해결책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지요. 죽을 것처럼 마셨어요. 그런데 아무리 들이부어도 술이 취하지가 않는 거예요. 뻗어버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그러니까…… 그렇게 망가지게 되면…… 이왕지사 약에 손을 댔다면…… 마약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요즘은 좋은 게 많을 텐데…… 쉽게 구할 수도 있고……”
야구선수가 거북하고 언짢은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정신적으로 무너지니까 유혹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것만은 차마…… 차라리 죽는 게 낫지요.”
“용케도 마약의 유혹을 이겨냈다는 말이지…… 그게 가능했을까? 나도 한때는 강한 유혹을 받았었지. 술집에서 단골로 만나는 여자가 있었거든. 그 여자도 나이가 드니까 별수 없이 은퇴했다네. 아주 오랜 옛날 일이구만.”
“약물의 유혹은 뿌리칠 수가…… 슬럼프라든가…… 스트레스라든가…… 그것도 미국 선수들이 먹었던 약효가 매우 강한 것으로 먹었지요. 빨리 효과를 보고 싶어서…… 과다 복용했어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변호사는 외면했고 누렇게 색이 바랜 천장을 쳐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변호사가 말했다. “그렇게 되었구만. 모든 약물은 어떤 면에서 독약이고 마약이라고 할 수 있다네. 반드시 부작용이 있거든. 그래서 약은 조심해야 한다네.”
“그 약도 부작용이 심했지요. 그리고 금단 증세도 있었어요. 복용을 중단하면 심리적으로 너무 위축되니까 극심한 신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을 겪게 되지요. 그래서 공황장애의 증상인 불안, 불면, 두통, 귀울림, 극도의 우울감이 발생하는 거예요. 아직 발작이나 경련, 환각, 망상까지는 가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때는 부작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이 몰입하게 되지요.”
그는 우울하고 창백한 얼굴이었고 목소리는 다소 쉬어 있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셔츠가 땀으로 축축했으니 가슴과 등쪽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우린 야구 이야기만 했네요. 재판은 어떻게 될까요?”
“야구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네. 궁금증이 많이 풀렸거든.”
“재판 말입니다? 재판 날짜가? 요즘은 밤마다 나쁜 꿈만 꾸니까 온종일 뒤숭숭해요.”
그때는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고 새벽이면 얕은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어김없이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인 악몽 같은 나쁜 꿈을 꿨다. 그날은 재판 날짜가 점점 다가오면서 초조해서인지 그런 꿈을 세 개인지 다섯 개인지 연속해서 꿨다.
그들이 검찰청 건물 정문의 포토라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기자들이 몰려든 것은 아니었다 몇몇 얼굴을 잘 아는 야구 전문 기자들이었다 사진기의 찰칵 소리가 반복해서 터진다 고개를 들라고 고개 좀 이쪽으로 이쪽이야 개미만한 수많은 이들이 스멀스멀 온몸을 기어 다니며 귓속으로 콧속으로 헤벌린 입속으로 기어들어갔고 흡혈귀처럼 피를 빨아 먹었다 그의 손을 떠난 공은 하늘로 높이 올라가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심판은 가차 없이 볼 판정을 내렸고 관중들은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야유를 보냈다 투수 코치가 올라왔다 그런데 코치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판사라고 했다 그는 마구 날뛰며 화를 냈고 심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차디찬 금속성 수갑이 손목을 죄어왔다 여자는 완전 나체였다 마른 상체에 봉긋한 가슴 흑갈색 유두 빈약해보이지만 의외로 풍만한 엉덩이 역 이등변 삼각형 형태 속의 무성한 거웃 살결이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잘 아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여자 검사였다 그러나 그를 향해 히스테릭하게 비웃었다 그래도 그는 여자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일어섰다 육체는 스스로 알아서 반응을 했던 것이다 그는 도무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발을 질질 끌면서 미로 같은 길을 맹목적으로 끝없이 걸었다 벗어나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온몸을 더듬어 보았다 온몸이 피투성이고 깨진 머리에서는 피까지 흘렀다 칼에 찔린 듯한 예리한 통증이 머리에서부터 발바닥까지 꿰뚫고 지나갔다 무더운 여름날 개처럼 숨을 헐떡였고 연거푸 신음을 내뱉었다 더 이상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그 악마들이 날 지켜보면서 끝까지 놓아주질 않을 거라고 누운 자세에서 침대 위 창문을 올려다보았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창문가로 올라갔다 그가 월셋방으로 얻은 임시 거처는 지하철 강남역 1번 출구 근처 20층 원룸의 5층이었다 그가 창문의 방충망을 위로 젖히고 뛰어내리면서 밖으로 뻥 뚫린 창틀을 붙잡고 위태롭게 매달렸고 병신 새끼! 뛰어내려봐! 손을 놓으라고! 남자들이 외쳤다.
꿈이 깨면서 겨우 잠든 새벽잠에서 깨어났다.
감방이다. 그 방은 4인실인데 지금은 8인의 미결수들이 수용되어 있다. 사기 전과 9범인 남자가 입에 담배를 물고 앉아있는 똥통으로부터 역겨운 똥 냄새와 희미한 정액 냄새와 소독약 냄새와 감방 냄새가 뒤섞여 확 풍겨왔다. 그 남자는 아는 게 너무 많았고 그에게 끊임없이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쏟아냈다.
그가 끊임없이 속삭였다. “네가 아무리 도박으로 큰돈을 다 날렸다고 해도 말이야? 그거 있잖아…… 떡고물 정도는 남아있지 않겠어? 그렇지, 그렇다니까. 국선은 말도 안 돼. 내가 소개해줄 테니까 전관예우를 듬뿍 받는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란 말이야. 그 양반 법원을 나온 지 6개월밖에 안 되었으니까 빵빵하지. 그냥 빼준다니까. 틀림없다니까 그러네. 그리고 말이야…… 남은 돈은 눈 딱 감고 나에게 투자하라고. 지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급등주에 투자하면 열 배는 금방이야. 최고의 주식 리딩방을 소개해줄게. 지금은 주식투자야. 부동산은 진즉 한물갔어.
소매치기 절도의 시대도 완전히 갔어. 사람들이 지갑에 현금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않으니까. 그래서 걔들도 모아놓은 돈 가지고 주식 투자 하는 거야. 절대적으로…… 이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걸. 기회는 항상 있는 게 아니니까.”
작성일:2023-11-11 13:23:12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