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에세이> 단상들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6-03 13:50:54
조회수
339
단상들


요즘 세상은 변했다. 여성들의 권리의식이 투철해지면서 가부장제의 유물에 대해 간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류분 소송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단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보면 유류분 소송의 본질적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딸들이여! 자기 권리를 지키세요!

우리는, 우리가 언제 죽을지 전혀 모른다. 내가 죽으리라는 사실, 혼자 죽으리라는 사실을 잊은 채 그날 그날 살아간다. 세상은 나 없이도 잘만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삶과 죽음. 그러한 진실을 밝히는게 작가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제프 다이어는 그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모르지만 조나 (Zona)를 발표했었다. 조나에서는 분량이 본문에 맞먹는 방대한 각주가 달려있다. 각주는 여담이다. 우리는 왜 본문보다 여담에 신경을 써야 하는가?

소설은 ‘보여주기’와 ‘말하기’와 ‘생략’의 혼합이다. 일부 유명한 작가 또는 비평가들은 소설의 미학적 관점에서 보여주기를 강조하지만, 실제 보여주기만 해서는 그 소설은 한없이 지지부진 해질 수 밖에 없다. 말하기와 생략은 필수적이다. 이것들이 빠진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설을 쓸 때에는 묘사와 서술을 섞어 활용하면서 에세이, 신문기사, 가전제품 사용설명서, 일기, 드라마, 주석 (commentaire), 독백, 담화 등등 온갖 종류의 산문을 이용한다.
인물이나 주제의 선택, 시간과 장소, 배경의 선택에 있어서 어떤 것도 소설을 제한할 수 없다. 소설은 잡설이다. 그러므로 소설이 절대적으로 지켜야할 신성불가침의 규칙, 관습, 구속물은 없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어떤 경우에도 한계는 없다. 그래서 현실 세계를 충실하게 묘사할 수도 있고 변형시킬 수도 있고 현실의 크기와 색깔을 왜곡하거나 그대로 보존할 수도 있고 그것을 비판할 수도 있다. 모든 게 소설의 자유이다.

소설은 반드시 허구여야만 할까. 허구와 사실 사이 구별은 아주 애매하니까. 잘 모르겠다. 진짜와 가짜를 섞으면 가짜보다 더한 가짜가 된다고 하니까. 만약 소설이 필연적으로 꾸며낸 허구 (feint)라고 제멋대로 단정 짓는다면 역사적 사건이나 에피소드, 신문의 사회면 기사를 소재로 한 수많은 논픽션 소설들은 소설적인 장르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모든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현실에서는 표면적인 것과 숨겨진 의미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지친 마음이여, 삶이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삶은 죽음으로부터 태어난다. 보리가 싹을 틔우기 위해서 씨앗이 죽어야 하듯이……

사랑은 상실이고 단념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주었을 때 더욱 풍부해진다.

사랑은 악마이고 불꽃이며 천국이고 지옥이다. 거기에는 쾌락과 고통, 슬픔과 후회가 살고 있다.

역사는 사실로 존재했던 소설이며, 소설은 존재할 수 있었던 역사다. (E.L.A. 콩쿠르)

회상은 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를 좋아한다. 회상은 살금살금 기어간다. 회상은 알랑거리는 경향이 있고, 종종 별다른 까닭도 없이 자신을 꾸민다. 회상은, 현학적으로 뽐내고 말다툼하며 자신을 내세우는 기억을 반박한다. (귄터 그라스)

대학 동료들 중 몇은 내 단편소설을 이해했고, 일부는 덜 이해했고, 일부는 이런저런 이유로 첫 네 줄도 채 넘기지 못했으나, 문학적 판단이 정확하다는 점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던 곤살로 마야리노는 무조건 인정해 주었다.
나는, 내 단편소설에 관해 내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 스토리 자체에 많은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은 아마 읽지도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이해하지 못했음에 틀림없다) 아주 중요한 어느 지면에 특별한 형식으로 실렸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시라는 것이 내 피를 역동적으로 흐르게 만들고, 내 앞에서 갑자기 신비로 향하는 창문이 열리도록 하고, 내가 세상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이 황량한 가슴이 고독과 사랑, 환희와 증오를 체감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내가 튀어나오는 말을 부분적으로 억누르는 위선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아내가 알아차리게 되는 날이 올까 봐 두려웠다. 10년 동안 나는 격한 말을 억제하는 데 엄청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내 노력이 거의 성공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순진무결하다 가정할 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마크 트웨인)

나는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아이가 없다는 것,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는 것, 글을 잘 쓸 수 없다는 것, 먹는 데 돈을 너무 많이 쓴다는 것, 늙어 간다는 것 등이다. 나는 ‘왜’나, ‘무엇 때문에’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한다.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한다. 하는 일 없이 시간이 내 주위를 펄럭거리고 지나가는 것이 싫다.
내가 작가로서는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유행에 뒤처졌고, 나이도 먹었고, 더 이상 뭘 잘할 수도 없으며, 머리가 나쁘다. 봄은 도처에 와 있는데, 내 책은 (때 이르게) 세상에 나와 그만 순이 잘려 버렸다. 젖은 화약과 같다. (버지니아 울프)

J.D. 샐린저 씨가 쓴 「바나나피시」의 일부는 대단히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눈에 띌 만한 이야기의 힘이나 핵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샐린저 씨가 뉴욕 근처에 있다면, 직접 한 번 제게 오셔서 《뉴요커》에 실리는 작품들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저는 페미니즘 지도자들이 남녀 성행위의 본질을 정치적인 것이라고 믿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모든 사회행동, 모든 인간행위는 정치에 물들게 되어 있고 모든 것은 역사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행위는 아닙니다. 그것은 지배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관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역사가 아니라 자연입니다. 그것은 몸입니다.
자연스러움이란 대화를 통해 생겨납니다. 타자가 없다면 자연스러움도 없죠. 그래서 독백은 자연스러움의 적입니다.
타자기는 손 글씨보다 훨씬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지요. 예를 들어, 커밍스는 시를 직접 타자기로 칩니다. 손으로 쓰면 글이 너무 주관적이 되고, 너무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들에 전염되기 쉬워요. (옥타비오 파스)

내 소설들은 하나의 골목, 하나의 마을을 무대로 펼쳐진다. 공간이 작으면 작을수록 인간의 내면과 감정에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을 탐구하는 것만이 내가 작가가 된 이유이다. (프레드릭 배크만)

내 교향곡은 대부분이 묘비명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친척들조차 알지 못한다. 내 친구도 여러 명 그런 일을 당했다. 친구들의 묘비를 어디에 세우겠는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음악밖에 없었다.
내 인생은 지루한 회색의 나날이었고 그 생각을 하면 슬퍼진다. 그걸 인정하는 건 슬픈 일이지만 불행하게도 사실이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앙드레 말로의 평전을 쓴 장 라쿠튀르 (Jean Lacouture)는 말했다.
(당신이 쓴 말로 전기의 제2부, 즉 1947년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간에 걸친 대목에서 당신은 그를 상당히 가혹하게 비판한 것 같은데……)
당신이 그렇게 읽었다니 과연 가혹한 비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 책이 비판받아야 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그 책에 쓰인 부분보다는 쓰이지 않은 부분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내 책에 빠진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말로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영향이다.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 좀 더 깊이 추적하여 해석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점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몹시 싫어했다. 싫어한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부터 의미심장한 것이다. 나는 정신분석학적인 개념이나 기술을 잘 운용할 줄 모르지만 다음에 고쳐 쓸 때는 그 점을 다루고 싶다. 나는 좀 더 자세한 자료들을 얻었고 이 책이 나온 이후 내가 만난 사람들은 좀 더 쉽게 대답해주었다.
다른 한편, 아주 흥미 있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 나는 아주 조금밖에 다루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말로의 침묵이라는 문제다. 그것은 라신이나 랭보의 침묵과 비견할 만한 것이다. 말로는 작가로서는 원숙기에 접어든 50대가 되면서 상상력이 고갈되어버렸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두려움, 그녀의 이유 없는 변덕, 그녀의 본능적인 불안, 그녀의 까닭 모를 대담함, 그녀의 허세, 그녀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감수성, 그것은 분명 여자였다. (발자크의 중편소설 「사라진느」에서)

일반적인 문화 안에서 발견되는 문학의 이미지는 가차 없이 저자, 그 인간, 생애, 취향, 정념에 집중되어 있다. 비평 또한 대부분의 경우, 보들레르의 작품은 인간 보들레르의 실패이며, 고흐의 작품은 곧 그의 광기이며,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은 그의 악덕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작품의 설명은 언제나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 쪽에서 모색되어 왔다.
우리가 저자의 존재를 믿는 한 저자는 항상 그의 책이 과거로 간주되어 왔다. 책과 저자는 ‘전’과 ‘후’로 배열된 채 동일선상에 위치한다. 저자는 책을 부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책 이전에 존재하고, 책을 위해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그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서처럼 자신의 작품과 선행적인 관계를 가진다.
작가는 결코 근원적인 몸짓이 아닌 다만 이전의 몸짓을 모방할 뿐이다. 그의 유일한 권한은 글쓰기를 뒤섞거나 대립하게 하여, 그 중 어느 하나에도 의존하지 않게 하는 데에 있다.
문학에 있어 모방이나 표절의 문제는 어쩌면 문학 언어의 특성이기도 하다. (롤랑 바르트)

현실의 모델에서 등장인물을 끌어낸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일 뿐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투르게네프가 말한 것과 같이 당신의 마음속에 확고한 인물을 가졌으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창조물에 활력과 특징을 부여해 줄 수 있다. 작가는 그의 모형을 그대로 복사하진 않는다. 그는 그들에게서 그가 원하는 것만을 취하며 그의 주의를 끄는 몇몇 특징과 그의 상상력을 점화시킨 성격을 취하여 거기에서 비로소 그의 인물을 구상하는 것이다. (W.S. 몸)

사르트르는 전지적 시점에 따른 ‘모든 작가들은 신과 가장 흡사해야 한다’는 명제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는 소설가는 신이 아니라고 하였다. 소설가는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소설적 자유의 개념을 부인하면서 작가가 작중 인물의 자유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소설은 다양한 관점들에 의해 이야기되는 사건의 연속체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전지적 권능을 일방적으로 휘두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소설은 하나의 거울이라고 흔히 말한다. 그러면 소설을 읽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은 거울 속에 뛰어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발 넘어서 우리들은 거울 저편에 가서 낯익은 얼굴을 한 사람이나 물건 사이에 포위된다. ‘소설은 거울이다’라고 말하는 스탕달의 주장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울에 잘 비쳐진 이미지를 보는 것이 아니고 거울 속에 뛰어들어가는 것이라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이 표현은 기발하지만 사실이다. ‘작품이 시원치 않으면 눈앞에 검은 활자가 떠오를 뿐이다.’라는 문장도 사르트르가 표현한 것이다. 이것도 그와 같은 이치일 것이다.
앙티로망은 소설적인 형식과 윤곽을 가진다. 그것은 가공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이야기를 말하게 하는 공상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도 우리들의 실망을 더 크게 하는 데 불과하다. 결국 소설 자체로서 소설에 반대하는 것이며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체하면서 실은 우리들의 눈앞에서 소설을 파괴하는 것이며 완성하지 않는, 또 완성할 수 없는 소설의 소설을 쓰는 것이며, 렘브란트나 루벤스의 그림에 대하여 회화의 살육이라는 제목의 미로의 화면이 완수한 역할을 도스토예프스키와 메레디스의 구성이 가지는 튼튼한 대작에 대하여 허구를 만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 늦게야 죽고, 더러는 너무 일찍 죽는다. ‘제때 죽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가르치노라.

미국 대법원 판사 포터 스튜어트는 음란물을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보면 알 수 있다 I know it when I see it’라고 말했다.

그림은 절대로 완성되지 않으며 어느 순간 그리기를 멈출 뿐이다. (자코메티 Albertto Giacometti)

프랑스 화가 피에르 보나르 (Pierre Bonard) 또는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 (그는 지독한 동성애자다. 어느 날 밤 화실에 강도가 침입했을 때 그를 유혹해서 동성애를 했으니까) 은, 그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붓을 들고 들어가 감시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몰래 자신의 작품을 다시 손보거나, 밤에 몰래 그림을 들고 나와 덧칠하거나 해서 그런 식으로 작품을 보다 완성된 단계로 끌어올렸다.

신의 창조는 여섯 번째 날에 완결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신이 세상의 창조를 단 한 순간이라도 멈춘다면 세상은 곧장 파괴되고 말 것이다.

시인은 언어에 독을 바르는 기술을 알고 있어서 마치 독화살처럼 언어로 적을 사살할 수 있다.
시인은 전능하다. 언어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병을 고칠 수도 있다. 시구로 기쁨을 더하고 슬픔을 깊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분노하여 복수와 전쟁을 일으키고, 때로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우정, 사랑, 평화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 시인은 열정을 불어넣기도 하고 낙담시키기도 한다.
시인은 원해서 되지 않는다. 시는 타고난 재능이자 저주이다.

네가 낳으려는 아이는 아랍 민족의 예언자이며 입법자이다. 사람들의 증오와 시기를 경계하라. 그중에서도 유대교도들에게는 특히 조심하라. 신에게 비호를 구하라.

순교자들
두 누와스는 그들에게 유대교도가 되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모두 목숨을 바치더라도 죽을 때까지 그들의 신을 믿겠노라 대답했다.
네쥬란의 우두머리인 아레타는 가족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이 잘렸다. 그리고 다른 주민들이 산 채로 불태워지고 있던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의 아내 루마는 불길에 던져지기 전 더욱 가혹한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그녀가 숭배하는 신을 버리지 않으면 딸의 목을 자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사랑스런 두 딸이 있었다. 하지만 루마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눈앞에서 딸들의 목이 떨어졌다. 그리고 루마는 딸의 목에서 솟아오르는 피를 마시도록 강요당했다. 마침내 그녀의 목도 잘리고 붉은 연꽃 같은 불길을 내뿜는 구덩이 속에 던져졌다. 그녀는 시민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작가가 자신이 쓴 작품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가능하다면, 작품의 이전과 이후가 그리 쉽게 망각될 수 없는 것이라면……

열심히 일하셨나요? 더 가난해지셨습니다.

내 예전 얼굴을 되찾기 위해 수천 번의 성형 시술 주사를 맞았다. 이제 내 인생은 후회로 가득 차게 됐다.
성형 시술로 20년간 대가를 치렀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 절대, 절대로 얼굴에 손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성형 시술을 멈춘 지금은 기분이 좋다. (나이듦을) 불평하지 말고 인생이란 여행에서 자신을 돌아보라.

글을 쓴다는 것은 고행을 실천하는 행위의 일부다. 이 고행에서 작품의 창조는 글을 쓰는 주체의 변모에 비해 부차적인 차원으로 밀려난다. 프랑스 작가 르네 도말 (René Daumal)은, “이것이 작가로서의 제 작업을 훨씬 더 힘들게 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훨씬 더 흥미롭고 정신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어줄 겁니다. 그래서 제 일은 점점 ‘저를 위한’ 작업이라기보다는 ‘제 자신에 대한’ 작업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아주 극단적으로, 의식과 무의식, 삶과 죽음의 경계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정신을 잃을 때까지 사염화탄소 (Carbon tetrachloride) 가스를 들이마셨다. 그때 죽지는 않았다. 철이 들자 특히 마약에서 손을 뗐다.

시인이 되려는 자가 가장 먼저 연구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영혼을 찾아, 그것을 점검하고 실험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자마자 그것을 키워나갈 줄 알아야 한다.

신은 부당한 질문을 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려고 회초리를 만든다.

글을 쓸 때는 리듬을 타야 한다. 지금 좋은 리듬을 유지하고 있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리듬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리듬이란 문장의 리듬이 아니라 신체적인 리듬과 정신적인 리듬을 말한다. 만약 리듬이 깨지면 작가의 벽에 갇히게 된다. 그쯤되면 리듬을 찾는데 몇 날, 몇 달,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우주는 고독한 곳이다. 하지만 무릇 작가는 다루는 대상이 인간과 세상이기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고립되어 지내지는 못한다.

모든 작가는 결국 단 하나의 이야기만 갖고 있다. 그가 책을 아무리 많이 쓰더라도 하나의 본질적 이야기를 다채롭게 변조할 뿐이다. 나는 작가로서 그렇게 하고 있다.

반드시 읽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 1979년 10월 26일 그날 밤 궁정동 안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당시 여러분은 기껏해야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무슨 느낌이나 생각이 있었겠어요.
그날 밤의 비밀을 한 번 읽어 보세요.

소설이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지요. 대설도 아니고 중설도 아니고 그냥 소설이지요. 잡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껴안을 수 있으니 유연하긴 합니다. 스토리텔링은 뭐니뭐니 해도 소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소설은 영화, 연극, 음악, TV 드라마, 뮤지컬, 오페라, 게임, 춤 등 모든 형태의 예술을 품고 있으므로 모태 예술 (Mother Art)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작가로서 현명한 또는 진지한 독자가 필요하지요. 단 한 사람이라도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독자는, 첫째 가급적 종이로 출력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종이의 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둘째, 처음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필요한 경우 재독, 삼독, 사독, 오독까지 할 수 있는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문장을 읽으면서 문장의 아름다움을 음미해야 합니다. (내 문장 스타일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렇다고 물렁물렁하지도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들어있거든요.) 넷째, 작품 속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작가의 의도와 주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다섯째, 그리고 마침내 감동을 느껴야 합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요청을 하고 있군요.
여러분은 콧방귀도 안 뀔 텐데.
(내가 장담하건대 여러분은 마른 장작보다도 더 감정이 메말라 있으므로 감동을 느낄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러분은 사회적 지위, 위신, 위선, 자기 기만이라는 작은 상자 속에 꽉 갇혀있지요. 인생을 살 만큼 살았다면 지금쯤 그 상자를 깨부숴버려야 되지 않을까요.)

어떤 얼간이에 대해서 말할 게 있습니다. 그는 문단의 마당발로 자칭 문학평론가이고, 소설가입니다. 엄청나게 술을 잘 마시지요. 그리고 술만 마시면 엄청나게 헛소리를 많이 하지요. 그가 말했습니다. 천재적, 또는 천재 작가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문단 역사상 가장 깊이 있고 난해한 소설을 썼다는 거지요. 그가 술이 취해서 헛소리를 할 때 나는 그의 헤롱 헤롱한 눈빛에서 어떤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독재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부도덕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다시는 독재자가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나는 매우 자주 다시 읽습니다. 어떤 때는 스무 번 이상 읽기도 합니다. 그래야만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문체를 즐기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이테룸 쿠아에 디그나 레기 신트 (Iterum quae digna legi sint)

강한 인용문은 약한 본문을 깨트릴 수 있다.

물론 나는 표절을 한다. 표절은 심미안을 지닌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하지 말고 복잡한 설명보다는 간단한 설명을 택하라는 사고 절약의 원리를 말한다.

프로이트적 실언 ―아무리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도 사람들은 말을 하는 동안 어떤 종류의 실수, 종종 당혹스러운 실수를 하게 된다.(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없이 경험했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라는 황금률이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욕구 불만이 반드시 주위 환경 때문에 생긴 것만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내부에도 그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엇인지는 말할 수 없었지만 뭔가 한 가지 중요한 것이 그에게 부족했기 때문에 그의 기분이 그토록 좋지 않았던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또한 존재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벅차다(The world is too much with us)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불운을 겪어 봐야 한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내 마음을 치유할 수 없었다.
늘 향수에 시달리는 내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버려라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다면 인생은 정말 따분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시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엄청난 복잡성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마테복음 25장 29절)

인간이란 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경건함은 영원한 보상을 받을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의 삶은 그만큼 기품있고 이성적일 것이다. (파스칼)

손톱을 엄청나게 길게 기른 (적어도 15센티미터 이상) 여인은 아름답다.
(매니큐어 색깔은 별 의미가 없다. 손톱의 길이가 긴 것이 중요하다.)
비수처럼 긴 손톱은 예쁜 손톱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손톱’, ‘으스스한 공포감을 주는 손톱’이 된다.
나태하고 권태로운 손톱도 된다.
손톱이 아주 길면 손 놀리기가 불편해진다. 그래서
밥 먹을 때, 단추를 잠글 때, 글씨를 쓸 때, 화장을 할 때
그녀의 손동작은 지극히 우아해진다 귀족적으로 된다
긴 손톱의 여인이 15센티미터도 넘는 하이힐을 신고 걸어가는 모습은 너무나 고혹적이다
모든 것이 위태롭게 보이고, 불안해 보이고, 가냘퍼도 보인다
무시무시한 가냘픔, ‘일부러 불편하게 하기’의 상징인 손톱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복합이다
딱딱한, 그래서 감각도 생명도 없는 손톱이 마치 생명체처럼 자라난다는 것이 신기해서 나는 좋다
손톱을 길게 기른 여인은 대개 본능적이다 백치미와 관능미가 있다 오히려 착하다
그 여인의 긴 손톱에 긁히우고 싶다.

여자 테니스 세계적 스타 오사카 나오미 (24세. 세계 랭킹 2위. 그녀의 아버지는 아이티인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이다.)는 메이저 대회인 프랑스 오픈에서 1회전을 승리하고 나서 인터뷰 거부로 징계를 받자 기권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의도하거나 상상하지 못한 상황이 됐다. 다른 선수들이 테니스에 집중할 수 있도록 또한 내 정신 건강을 위해 기권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2018년 US 오픈 이후 우울증 증세로 힘들었다. 저를 아시는 분들은 제가 내성적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 오픈에 와서도 이런 느낌이 계속됐다. 모두가 대회에서 내가 헤드폰을 쓰고 있는 것을 봤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활동에 대한 불안함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기자회견에서 늘 긴장감을 느꼈고, 최선의 답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작성일:2021-06-03 13:50:54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