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0월 1일 개원 당시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동 57번지의 독립 청사에 있던 서울가정법원은 1971년 9월 1일 서소문동 37, 38번지 서울법원청사 제2신관으로 이전하여 1989년까지 그곳에서 서울고등법원과 같은 건물을 사용하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지게 된다는 얘기가 이 서소문 가정법원 시대에 생겨났다고 합니다. 가정법원에서 이혼을 하고 나오면서 헤어지는 부부가 마지막으로 함께 걷는 길이 덕수궁 돌담길이다 보니 사랑을 키워가는 연인들에게는 금기의 장소로 치부되었다는 것입니다. 서소문 가정법원 시대가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물러난 지금은 덕수궁 돌담길도 연인들이 데이트하기 좋은 명소로 새로이 자리매김하게 된 것 같습니다.

서울가정법원은 1989년 9월 1일 서울 서초구(당시는 ‘강남구’였습니다) 서초동 1701-1번지에 건립된 서울법원종합청사로 이전하여 ‘서초동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가사사건은 약간의 변동은 있었으나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특히 재판상 이혼 사건은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가정법원에 접수되는 가사사건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가족관계 및 가사재판을 규율할 민주적이고 양성평등적인 법제도가 등장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 가사사건에 관한 중요한 법제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1990년 1월 13일에 있은 민법 개정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날 있은 가사소송법의 개정이었습니다.

1990년 민법 개정은 개인의 존엄과 남녀평등의 원칙에 입각하여 호주·친족·혼인·친권·상속제도 등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친족관계를 부계와 모계 모두 동일하게 8촌 이내로 정하였고, 호주제도를 그대로 존치하되 호주의 권리의무를 대부분 삭제하였으며, 이혼시 배우자에 대한 재산분할청구권 및 자녀에 대한 면접교섭권을 도입하였고, 직계비속 중 남자와 여자의 상속분에 관한 차등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법 개정에 발맞추어 가사소송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가사소송법은 가사소송사건 및 가사비송사건의 재판 및 조정에 적용되는 기본법으로서, 이 법에서는 민법에서 새로 도입된 제도에 따른 재판절차를 정하고 기존의 가사심판법과 민사소송법에서 모순·저촉되던 규정을 정리하였습니다.

이처럼 가사사건에 관한 중대한 법률의 변동이 발생함에 따라 그 법률 적용의 역할을 담당하는 가정법원에서는 실무례를 축적함으로써 전문법원으로서의 소임을 수행하였습니다. 예컨대, 이혼에 따른 재산분할제도가 도입된 후 서울가정법원에서는 1991년 5월 16일 당사자의 재산분할청구를 받아들이는 최초의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 그 사안의 당사자는 혼인 후 불과 1년 만에 이혼하였는데, 담당 재판부(재판장 황우여 판사)는 재산형성에 대한 아내의 기여도를 50%로 인정하여 남편으로 하여금 혼인 후 형성한 재산의 절반을 아내에게 지급하여야 한다고 정하였습니다. 이러한 판결례들의 축적은 새로운 제도가 우리 사회에 정착되고 더욱 발전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2001년에는 서울가정법원 외에도 대구지방법원·부산지방법원·광주지방법원에도 가정지원이 신설되는 등 가정법원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가 더욱 커졌습니다.

그러나 가정법원이 당초 설립 당시에 주창된 바와 같이 가정의 분쟁사건을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합리적으로 해결해 주고 사법적 기능 외에도 후견·복지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차원에서의 전문성을 갖추는 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에 관한 열망만이 사회 저변 및 사법부 내부에서 잠재되어 있다가 2000년대에 들어 분출되며 가정법원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내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가정법원의 발전에 관해서는 다음 편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이 글의 주요한 내용은 서울가정법원이 2013년 출판한 <가정법원 50년사 : 50th Anniversary 1963~2013>을 참조하였습니다. 필자도 집필진 및 편집위원으로 위 책의 출판에 참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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