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싱가포르에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이 곳 사람들 주류가 생긴 것은 우리와 비슷한 중국계인데 영어로 -그것도 무척 빠른 속도로, 중국 말도 섞어가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제게는 참 생소하게 느껴졌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2개 국어 이상 하는 것이 기본이어서, 영어와 중국어가 대세인 요즘 시대에 싱가포리안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변호사들은 기본적으로 ‘말하고’ ‘글로 써서’ 밥을 먹고 사는 직업이니까요.

정말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싱가포르입니다. 저희 회사가 입주해 있는 맥스웰 체임버스(국제중재 심리실을 갖춘 건물인데 이 안에 UN 산하의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파리의 ICC, 미국의 ICDR, 싱가포르의 SIAC, 유럽에서 온 중재인 등 다양한 사무실이 입주해 있습니다)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가끔 모여서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데, 예컨대 10명이 가면 10명 다 국적이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한 주제에 대해서 10가지의 종류의 다른 버전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참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영국 식민지 하에서 100년 넘게 있었던 싱가포르는 동서양의 모든 문화가 혼합되어 어쩌면 고유의 정체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바로 그 점이 모든 것을 공존하게 만든 요인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싱가포르는 거기에 ‘인터내셔널’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모든 분야의 ‘허브’가 되고 (혹은 되려고 하고) 있지요. 싱가포르의 국제중재 및 금융, 오일 산업도 그 일환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싱가포르법은 영국법과 거의 유사하며 보통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전통적으로 국제거래에 있어서 영국법이 준거법으로 사용되어온 지라, 국제중재에 있어서 영국법이나 싱가포르법에 따라 분쟁을 해결한다는 계약서는 매우 흔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끔 미국이 국제중재가 매우 발달된 곳이 아니냐 하는 질문들이 있는데 사실 미국은 전반적으로 보면 소송을 더 많이 하지 국제중재가 그다지 발달된 곳은 아닙니다. 여하튼 싱가포르는 선진화된 법률체제와 국가별 사법 시스템 평가에서 최상위를 기록한 법원의 지원에 힘입어 국제중재지로서 몸값을 더욱 더 올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중재사건이 많이 다루어지다 보니, 외국에 있는 회사들이 분쟁이 생겼을때 싱가포르에 있는 로펌의 변호사들을 법률대리인으로 고용하는 건수가 많아지고, 싱가포르에 주거지를 두고 있는 중재인(싱가포리안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중재인들)이 더 자주 중재인으로 선임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런던에서 우아하게 계시던 QC(Queen’s Counsel)분들도 일감을 찾아 싱가포르로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작년 한해에 싱가포르가 국제중재로 벌어들인 수익은 1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싱가포르 법률 시장이 경제적으로 이윤을 내는 효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자국 변호사들에게 국제중재를 더 많이 경험하고 계속해서 커리어를 발전해 갈 수 있도록 트레이닝을 시키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싱가포르의 언어적 이점이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등 국제 시장에 어필하는 여러 요소들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그들에게 없고 우리에게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여러 좋은 조건들이 처음부터 주어지다 보니 일종의 헝그리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외국의 중재인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는데, 이들은 한국에 대해서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결국에는 이루어 지는 곳”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삼성의 스마트폰처럼 아무도 그 전에는 한국의 어떤 것이 전 세계를 휩쓸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그들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어느 순간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경험을 한 것이지요. 영어권 나라도 아니고, 법률체제도 다른데 한국의 로펌들이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성과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할 만 합니다.

한국도 최근 서울을 동북 아시아 국제중재의 허브로 키우고자 서울시, 법무부의 지원을 얻어 대한변호사협회와 협력하여 서울 국제중재센터를 오픈하였습니다. 한국 변호사들이 이미 중재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고,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인 해외 비지니스 등을 고려할 때 서울을 국제중재지로 부각시키기 위한 조건은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한국 기업이나 로펌들 스스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알아야 하고, 더불어 우리 사법부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해외 법조시장에 알리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현재 우리는 티핑 포인트나 임계질량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점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외국 변호사들에게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국 변호사들이 영어까지 잘 했으면 아마 우리가 전 세계의 법률시장을 지배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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