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는지요? 적도 근처에 위치한 선진 도시국가, 깨끗하고 부정부패 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 중국 인도 유럽계 인종이 더불어 살고 있는 다민족국가.

그 중에서도 법조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국제중재와 싱가포르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싱가포르 국제중재원(Singapore International Arbit ration Centre, ‘SIAC’)이 그 중심 역할을 하고 있지요. 저는 앞으로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면서 겪고 있는 다양한 경험들을 지면을 통해 나누어 볼까 합니다. 독자분들도 근무하시다가 쉬는 중에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없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싱가포르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홍콩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중국에 반환된 이후로 홍콩은 중국의 일부라는 인식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홍콩보다는 중립성과 투명성을 갖춘 싱가포르가 그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월드뱅크의 보고서에 따르면 비지니스하기 가장 좋은 곳이자 지리적 이점과 높은 교육 수준 등 잘 갖추어진 인프라 덕분에 설립된 다국적 회사만 7000여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 곳에서 근무하면서 체감한 바로는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 같습니다. 유럽 경기가 좋지 않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활동에 무게가 더 실리면서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하여 기회를 찾고자 하는 많은 기업들, 다양한 국적의 변호사들이 싱가포르에 들어오려 하고 있습니다.

해외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 기업의 약 90%가 계약서에 분쟁 발생시 중재로 해결한다는 조항을 넣고 있다고 합니다. 어차피 어느 한쪽 나라의 관할법원에 가서 분쟁 해결을 하는 것이 꺼림칙한 양 당사자에게는 중립성을 기대할 수 있는 제3국에서 중재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지요. 싱가포르 정부는 약18년 전부터 이런 흐름을 읽고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 싱가포르를 국제 중재 허브로 키우기 위한 정책적 투자를 많이 해 왔습니다. 2010년 초 세계적 수준의 시설을 갖춘 맥스웰 체임버스를 설립하고 세계적인 국제중재기관들을 유치하면서 싱가포르를 중재지로 하는 사건이 더욱 큰 폭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필연적으로 SIAC가 진행하는 사건 수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현재 SIAC가 진행하고 있는 사건 중 85% 이상이 국내중재가 아닌 국제중재사건입니다. 그 중 50% 이상은 싱가포르와 아무 상관이 없는 국적의 회사들 간 분쟁입니다. 준거법도 싱가포르법, 영국법, 인도네시아법, 독일법 등 계약서와 당사자들의 합의에 따라 다양하게 정해집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SIAC에서 근무하는 변호사들의 국적도 모두 다릅니다. 10명 정도의 상근 변호사들의 국적을 보면 캐나다, 인도, 중국, 호주, 한국, 벨기에, 말레이지아, 영국, 싱가포르 등 다양한 국가의 변호사 자격을 가진 이들로 구성되어 있지요. 이러한 역동적인 분위기가 SIAC를 빠르게 세계적 수준의 국제중재 기관으로 성장시킨 밑받침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Counsel로서 100건이 넘는 국제중재 사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한국, 일본 데스크의 Head로서 국제중재 홍보 및 SIAC 비지니스 업무도 맡고 있어서 출장도 자주 다니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중에 어떻게 SIAC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평범한 한국 사법시험 출신 변호사이고 송무업무가 재미있어 국제중재에까지 눈을 돌리게 된 토종 한국인입니다. 어릴 때 외국생활을 해 본 것도 아니고, 그 흔한 미국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닙니다. 2년 전 기회가 닿아 SIAC와 싱가포르 로펌에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당시 저를 지켜본 SIAC의 전 사무총장이 작년에 한국에 와서 SIAC에서 정식으로 근무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고, 그런 계기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공부 깨나 한다고 해서 사법시험 준비하고 고생 끝에 합격하여 힘들게 연수원까지 마친 이 엄청나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있는 곳이 한국 법조계입니다. 이 분들이 한 곳에 모여 대다수가 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우리나라 기업들은 (대기업, 중소기업 불문하고) 좁은 한국 시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모두들 해외에 진출하여 세계 곳곳에서 온갖 크고 작은 비지니스를 벌리고 있지요. 대부분의 외국 로펌에서 이러한 한국 클라이언트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외국 변호사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 법조계에서 ‘법률시장 개방’과 ‘청년변호사의 해외진출’이 화두가 되고 있지요. 이미 10여년 전부터 법률시장 개방 여부는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국 법률시장 개방에 대처하는 방안으로서 한국 변호사도 해외로 진출하여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변호사가 한국 클라이언트를 대리하고, 독일 변호사가 일본 로펌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국적과 변호사자격의 경계선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현 시대의 국제무대에서는 누구에게나 다 동등하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보다 우리가 잃고 있던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하는게 한국 변호사들에게 더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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