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밤도 한증막이었다. 여름휴가를 함께 다니는 건달들과 런던 시내 아파트를 빌려 함께 생활하였다. 밤마다 침대 시트가 뜨거워 눈을 붙이기가 고역이었다. 그래도 해만 뜨면 퀭한 눈으로 박물관을 돌며 꼴값을 떨었는데,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 파르테논 전시실의 대리석 조각(Elgin Marbles)도 빼놓지 않았다.
‘엘긴 대리석’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비롯한 석상이고, ‘엘긴’은 터키주재 영국 대사였던 인물이다. 당시 그리스를 지배하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아크로폴리스의 유적 정도에는 관심이 없었으니, 엘긴은 훼손된 대리석상을 영국에서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무더기로 반출하여 집 정원을 장식하였다. 1779년부터 27년간 33회나 선박을 동원하였다니 돈푼깨나 있는 영국 귀족이라 한들 거덜 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1816년 하원에서는 ‘엘긴 대리석’의 처리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고, 낭만 시인 바이런이 약탈품을 세금으로 구입한다고 삿대질 하는 가운데, 의회는 매수를 결의하였다.
1982년 영국박물관을 방문한 배우 출신 그리스 문화부장관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arcouri)가 조각상을 쓸어내리며,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영혼’이라고 눈물을 쏟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영국이나 프랑스 박물관은 약탈 문화재의 반환요구에 대하여 후진국의 문화재 보존 능력을 비난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약탈한 문화재는 인류공동의 유산이므로 보존 장소 정도는 문제가 안 된다고도 우긴다.
실상은 문화재 반환의 도미노 현상이 두려울 것이다. 자칫 루브르(Louvre)와 빅토리아 앨버트(Victoria & Albert)가 폐허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말씀이다. 영국박물관이 보존 능력을 시비하자, 그리스 정부는 파르테논 신전 아래에 첨단 박물관을 짓고 엘긴 대리석 전시 공간을 비워 놓고 있다. 신조어 ‘엘기니즘(Elginism)’은 ‘문화재 약탈’과 동의어가 된 지 오래이다.
영국박물관 한국실(Korea Foundation Gallery)에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출신으로 보이는 외규장각 의궤(儀軌) 한 권이 전시 중이다. 2011년 4월 경 프랑스에서 외규장각 의궤가 대거 반환될 무렵의 언론 반응이 생각났다. KBS 정규 뉴스는 프랑스 정부와 사이의 최종 문서에 의궤를 ‘반환’한다는 문구가 없다며 정부를 맹비난했다. 시청자위원회 회의에서 보도본부장을 나무랐다. 정부를 비판하려면 공무원 등줄기가 땀에 푹 젖도록 제대로 해야지 그렇게 소박한 소리를 하면 정부가 긴장하겠냐는 뜻이었다.
한편에서는 약탈 문화재 반환 원칙이 국제관습법이라 하지만, 오히려 약탈 유물의 반환 거절이 국제 기준이라는 편이 현실적이다.
문화재 보호와 관련된 1954년 헤이그협약, 1970년 유네스코 협약, 1995년 유니드로와 협약은 모두 비소급효를 규정하고 있으니 제국주의 시대의 약탈 문화재 반환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공재산의 반출을 금지하는 상대국의 국내법도 있을 테고, 상대국 박물관 학예사의 반발(혹은 헐리우드 액션)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최근에는 ‘약탈’과 ‘반환’이라는 감정적 용어대신 ‘분산 문화재의 재결합’이라는 중립적 표현으로 반환을 유도하고 있기도 하다.
외규장각 의궤는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던 박병선 박사에 의하여 존재가 알려졌다. 1991년 11월 우리 외무부가 프랑스 정부에게 반환을 요구하면서 논의의 물꼬를 텄고, TGV 고속철 협상과 맞물리며 협상이 전개된다. 도중에 문화연대는 프랑스에서 반환소송을 제기하였다가 패소하기도 하였다.
미테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이 합의하였다는 ‘교류 방식에 의한 영구대여’가 민간인 협상 대표단에 의해 ‘의궤와 동일 수준과 수량의 문화재의 교환’으로 바뀌었다가 호된 비판을 받고 정부 대표단으로 교체된 해프닝도 있었다.
오랜 진통 끝에 종국적으로 합의한 ‘5년 단위 갱신 가능 일괄 대여 방식’은 실제로 우리 정부가 선택 가능하였던 합리적 수단으로 보인다. 어쨌든 의궤를 우리 손으로 넘겨받았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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