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법정드라마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 끝났다. 나는 운좋게 그 드라마의 법률자문을 맡았는데 작가님들과 이런 저런 조율을 하면서 법조현실이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등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내가 변호사가 된 후 형사사건을 주로 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가끔 이런 질문을 한다. 왜 나쁜 사람을 편들어요? 어떻게 성폭력범죄자나 살인자를 변호할 수 있어요? 나 역시 처음 형사사건을 다룰 때만 해도 무죄추정의 원칙은 머리에만 있을 뿐 그런 법원칙이 왜 생겼는지 심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가슴에는 유죄추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내 눈 앞에서 이뤄지지 않은 수사과정과 결론은 어떤 부실이나 실수도 없을 것처럼 온전히 신뢰하면서 내가 눈 앞에 보고 있는 피고인만 유독 의심하며 마치 피고인이 모든 사건과 증거를 조작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가 된 초기만 해도 수사기록만 대충 보고 “이 사건은 절대 무죄는 어렵다”고 가뿐히 단정지은 적도 있었다.

그런 나에게 변호사가, 법조인이 뭐 하는 사람인지 알려준 사람은 어떤 여성단체의 상담선생님이었다. 그분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도와주고 보호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성폭력 가해자 재범방지교육에 참여하고 있었다. 나는 그 교육에 강사로 참여했는데 가해자들 앞에 서기를 두려워하는 나에게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변호사님, 변호사는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들 얘기는 다 들어주는 사람들이잖아요.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도 다들 자기의 삶과 시선 안에서는 억울합니다. 그래서 자기들 얘기를 무시하면 더 억울해하고 막나갑니다. 하지만 변호사님 같은 사람이 진심으로 들어주면 조금씩 변해요. 변호사님, 판사님 말 한 마디가 진짜 그 사람들을 바꾼다니까요.”

그분의 말씀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떤 사건이든 그들을 무조건 의심하고 기록을 보면 그들의 말은 거짓말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기록을 다시 보면 그들의 주장에 부합하는 많은 사실관계가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 피해자건 피고인이건 그들의 목소리와 호소에 얼마나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느냐, 내가 직접 겪지 못한 그 상황을 얼마나 상상하고 고민하느냐, 그 여하에 따라 사람들은 치유되기도 하고, 삶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법정은 ‘진짜 목소리’를 듣고 소통하는데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양형을 들어 자백을 하라는 암시를 줌으로써 피고인으로 하여금 사실은 뭐가 잘못인지도 모른 채 반성만 가장하도록 하고 있지는 않나. 때로는 아동장애인인 피해자, 피고인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 채 고압적으로 증인신문을 행하여 오히려 진술을 어렵게 하지는 않았나. 당사자들은 채 읽어볼 수도 없고 제대로 이해하기도 힘든 두꺼운 기록으로 사실상 재판을 대체함으로써 납득할 수 없는 절차와 결론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1분만 더 들어주면 듣고 싶은 답이 나오는데 관련 없는 답변은 그만하라고 하며 같은 질문을 반복하느라 더 많은 시간과 감정을 소비하지는 않았나. 중립성의 요구를 불통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나. 어느 순간에도 틀리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소통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는가.
소송법 교과서에는 소송의 목적이 실체 진실 발견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판검사들이 하느님만이 아는 진실과 정답을 매번 맞추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현실적인 소송의 목적은 ‘실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각자가 호소하는 억울함에 관심을 기울이고 법의 관점을 설득하는 과정’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오해를 풀고 악의를 내려놓고 피해를 치유하고 자신을 되돌아본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나마 세상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일상으로 되돌아간다면 소송의 현실적인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법조인들이 각각의 역할을 통해 너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설득하고 소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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