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판사가 층간소음 문제로 지나친 짓거리를 한 일을 두고 신문 지상이 시끄러웠다. 어느 신문은 특집기사까지 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널리즘은 그렇다 치자. 그러나 법조사회마저 고소하다는 표정을 짓거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라도 생겼다는 듯이 입방아를 찧을 일은 아니지 않을까.

법관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비난은 법관의 판결에 대한 비난이나 비평과는 유를 달리하는 것이다. 전자의 비난, 특히 저널리즘의 비난은 건설적 비판을 넘어 자칫하면 법관의 부패나 비리에 대한 과장으로 국민에게 냉소주의를 심어 줄 우려가 있다. 법관윤리에 관한 미국의 문헌들은 대부분 “대다수 법관들은 그 염결도에서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사실에도 부합한다.

나는 법관의 비행이 보도되는 경우에 그것을 평하는 글을 쓰고 싶어도 애써 참은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언론에서 한 차례 떠들면 그만일 일을 두고서 법조 내부에서 전문가연하며 비분강개조로 입을 열면, 마치 법관들이 하나같이 비윤리적이라거나 법조 전체에 구조적인 윤리문제가 있다는 인상을 줄까 싶어서였다.
법관윤리를 논하는 데 주의할 점은, 우선 법관의 윤리현실이 일반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자크의 말을 빌면, 사법에 대한 불신은 한 사회의 종언이 시작됨을 알리는 징표다. 그것은 입법부 구성원이나 행정부 공무원들에 대한 불신과는 또 다르게 인식된다. 일반적 문제에 관한 불신만 해도 말하기 조심스러운데, 윤리적 불신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단언하거니와, 법관들은 보편적으로 직무상 높은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고 대부분 윤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수군거림이 그치지 않는가? 법관을 비난하는 기초적인 전제에 법관에 대한 기대치가 높다는 사정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걸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일반인이라면 그저 보통으로 넘어갈 만한 일도 법관이 하면 그 주체가 법관이라는 이유로 큰 비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대치가 높다고 하여 필요 이상의 비난까지 가할 일은 아니다. 주의할 점은 법관에 대한 비난이 윤리문제의 외관을 띠고 나오기는 하나 그 속내가 법관의 사법철학에 대한 공격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때로 그 비난은 정치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듯이, 정치적 편향성을 지닌 견해는 법이나 법작용을 정당하게 평하는 일이 드물다. 내 맘에 안 드니 나쁜 법이요, 나한테 불리하니 나쁜 사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법권 독립에 대한 음성적 침해다.

판결에 대한 불만으로 판결을 내린 법관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표출하는 일은 저열한 짓이다. 그런 돌팔매질은 오늘날 법정에서 보이는 일부 당사자들의 고약한 행태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걸핏하면 내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 따위의 몰상식한 발언도 실상 삼십년 전 교도소 내에서 범법자들이 턱도 없는 불만을 품고 만들어낸 것이다. 죄 짓고 옥살이하는 자들이 탈옥하여 방송국 마이크에 대고 떠들 만한 말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걸 여의도에서 무슨 사자후라도 토하듯이 외치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다.

내가 삼십년 넘어 법조사회의 모습을 보아 오기로, 무전이든 유전이든 간에 유죄는 유죄고 무죄는 무죄였다. 사법적 판단에 잘못이 있을 수는 있어도, 흔히들 생각하듯 돈 있다고 해서 무죄판결을 받거나 형을 면하게 되고 돈 없다고 해서 유죄 판단을 받는 것이 우리 사회의 일반적 양태였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판결문을 제 손으로 써 본 사람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고 기왕의 법조인 양성과정이나 현재의 법제도와 법실무를 알 만큼 아는 이라면 그런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잘 알 것이다.

판결에 불만이 있으면 그 판결을 탓하면 그만일텐데, 판결을 내린 법관의 직무상 또는 사생활에서의 어떤 사정을 들어 비난하는 따위의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때는 해당 법관이 이혼한 경력이 있다거나 가난하게 자랐다거나 학생시절에 시위 참가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그것이 문제의 판결이 나온 배경이라는 식의 설명을 하는 것을 목도하기도 한다. 이건 말하는 이의 천박한 지성을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된다.

그건 그렇고, 참 딱하다. 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미국의 리프킨드 판사는 어느 법관윤리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웃의 눈에 띌 정도로 손님을 많이 치르는 법관이 있다면, 그는 법관으로서는 좀 떨어지는 축에 속한다. 폴로경기장에서 폴로를 지나치게 잘 치거나, 경마장의 매표구에서 50달러짜리 마권을 사는 모습이 너무 자주 비쳐도 마찬가지다. 과식하거나 과음하는 법관, 지나치게 유행을 쫓는 옷차림을 하는 법관을 사람들은 흰눈으로 볼 것이다 …토플리스 수영복을 맨 처음 입는 사람이 법관의 부인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발표를 들은 어느 판사가 토론시간에 이랬다고 한다. “내가 잘하는 경기가 폴로가 아니라 테니스라서 조금 안심입니다.”

법관이 이렇게 조심스러운 자리라는 걸 그는 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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