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개정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성폭력 피해아동·청소년 등에 대한 변호인선임의 특례 규정을 신설하였다. 이 규정은 아동·청소년대상 성범죄의 피해자 및 그 법정대리인은 형사절차상 입을 수 있는 피해를 방어하고 법률적 조력을 보장하기 위하여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피해아동이나 청소년에게 변호인이 없는 경우에는 검사가 국선변호인을 지정하여 형사절차에서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국선변호인을 ‘법률조력인’이라고 한다.
필자는 법률조력인 제도가 시행된 이후 현재까지 7명의 성폭력 피해아동의 법률조력인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 중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예뻤던 은영이(가명)에 대한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은영이는 만7세. 가출한 부모님 대신 할아버지가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일터에 나가 있는 동안 혼자서 놀이터에서 놀다가 일을 당했다. 아이의 보호자인 할아버지와 처음 통화를 하면서 법률조력인 제도에 대해 설명을 하고 “앞으로 제가 은영이와 할아버지를 법률적으로 도와드릴 겁니다”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너무 막막했는데 은영이에게 변호사가 생기다니…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울먹이셨다.
다른 의뢰인들의 방문이 뜸한 오후 늦은 시간을 골라 상담 약속을 정했고, 약속한 시간에 할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오셨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오밀 조밀 예쁘게 생긴 아이였다. 아이는 처음에는 쑥스러운지 몸을 배배꼬면서 할아버지 뒤로 자꾸 숨어서 아이와 인사를 하기도 어려웠다. 할아버지로부터 아이의 생활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이를 내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은영아, 그 아저씨가 은영이를 놀이터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갔을 때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볼까?”라고 하자 아이는 창피했는지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나는 아이와 눈을 맞추며 “언니도 여잔데 뭐 어때, 여자끼리니까 우리 비밀 이야기 한번 해보자. 언니가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을게”하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도 찍고 손가락으로 사인도 했다. 그제야 아이는 조금씩 질문에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아이를 달래서 같이 이야기를 하고 나니 아이와 많이 친해졌고, 대략적인 사건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의 경우 아이가 원스톱 센터에서 진술녹화를 마친 후 법률조력인 지정이 되었기 때문에 사건 발생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상태에서 피해 아동 면담이 이루어졌다. 사건 발생 초기에 법률조력인이 지정되어 진술녹화에 동석하였다면 사건을 더욱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법률조력인 지정이 너무 늦게 된 것은 무척 아쉬운 부분이었다.
면담을 끝마치고 아이가 내 방을 나가면서 갑자기 나를 향해 뒤돌아서서 두 팔을 벌리며 안아달라는 행동을 했다. 나는 팔을 벌려서 아이를 내 품에 꼭 안고 “은영아, 오늘 정말 잘했어. 오늘 은영이가 언니한테 이야기한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게. 그리고 놀이터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은 은영이 잘못이 아니야. 그 아저씨가 나쁜 사람이야. 언니가 그 아저씨 꼭 벌 받도록 해줄게”라고 귓속말을 해 주었다.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돌아간 뒤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렇게 예쁜 아이에게…, 이렇게 작은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에 너무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이를 그 일이 있기 전으로 되돌려주고 싶지만, 내가 이 작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그 사람이 법이 정한 최대한의 처벌을 받도록 도와주는 것, 아이와 할아버지가 법률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되어 주는 것, 그리고 그 작은 아이를 내 품에 가득 안고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며 엉덩이를 토닥거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가해자에 대한 첫 번째 공판기일이 열렸다. 가해자는 법정에서 모든 공소사실을 시인하고 자백을 하였다. 선고기일에 가해자가 중형을 선고받는 모습을 보고 사무실에 찾아오신 아이의 할아버지가 “변호사님, 고맙습니다. 우리 은영이가 매일 변호사님 보러 가자고 해요”라고 말씀하시며 수줍게 장미꽃다발을 건네고 가셨다. 아무런 장식도 없고 가지정리도 되지 않아 가시가 그대로 드러난 투박한 꽃다발이었지만, 아이와 아이 할아버지의 진심이 가득 담긴 장미향기가 내 방을 그득 채워 어지럽기까지 했다. 내가 의뢰인으로부터 받아 본 선물 중 최고의 선물이었다.
아이와 할아버지가 법률적으로 외롭다고 느끼지 않게 되어 정말 다행이고, 그 예쁜 아이를 도와 줄 수 있어서 변호사로서, 법률조력인으로서 무척 보람을 느꼈다. 다시는 아이에게 그와 같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아이가 그 날의 기억을 잊고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정별님 변호사·강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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