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한국에서의 대학시절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던 영미법상의 용어 중 하나가 바로 소인(Cause of Action)제도였다.
한국 교과서를 읽어보면 영미법상의 소인이 우리의 청구원인에 해당하는 것이라고만 설명되어 있지 구체적 예를 들고 있지 않아, 도대체 소인제도가 한국의 청구원인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런 상태로 학과목 공부가 끝나 버렸다.
필자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은 미국 UCLA 로스쿨 시절 민소법 시간이었는데 그때까지 없던 새로운 소인이 인정되는 판례를 접하면서 “아~이것이었구나!”하고 무릎을 칠 수 있었다.
그 판례의 기초가 된 사실관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더운 여름 날 집 앞 큰 길가 나무 밑에 한 여인이 한가로이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는데, 마침 아이스크림 트럭이 음악을 크게 틀며 다가오자 길 건너편에서 친구들과 놀던 그 여인의 어린 딸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러 달려오다 그만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다른 차량에 부딪치는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경우, 그때까지의 영미법상으로도 부상을 당한 아이 자신에게는 가해 차량이나 아이스크림 트럭운전수의 주의 부족 과실을 근거로 소송을 제기할 권리, 즉 소인이 있음을 당연히 인정받았지만, 이 판례가 교과서에 실리게 된 이유는 피해 당사자인 아이뿐 아니라 피해자의 어머니가, 비록 제 삼자이지만 자기 딸의 교통사고 순간을 목격하고 야기된 충격에 따른 정신적 피해(Emotional Distress)를 소인으로 하여, 자기 스스로 원고가 되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한 역사상 첫 번째 사례였던 것이다.
환언하면 이 판례 전까지는, 오직 직접 피해 당사자만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소인을 가지고 있었고, 불가피하게 사고 현장에서 끔찍한 사고를 목격하고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된 제3자(일반인은 물론이고 피해자의 부모 등 아무리 가까운 인척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도)에게는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소인이 소송의 형식상 인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청구원인을 영미법상의 소인과 같이 유형화시키지 않고, 형식적 구속 없이 청구의 근거가 되는 사실관계만 기술하면 족한 우리 제도와는 큰 차이가 있다 하겠다.
소인의 형식적 요건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덧붙인다면, 미국에서의 소송 실무상 소인을 소장에 기술할 때 각 소인이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충족해야만 적법한 소인으로 인정받지, 필수 요소 중 하나라도 결여되면 소장의 형식적 부적격을 원인으로 하는 ‘소각하신청(Demurrer)’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 민사 소송에서 A라는 채권자가 B라는 채무자에게 돈을 꾸어 주었는데 B가 만기일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돈을 갚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청구원인으로 하여 소장을 제출했다면, 한국 법정에서는 적법한 청구원인 진술로 인정될지 모르겠지만 미국법상의 대차관계 계약 불이행 소인 기술에는 반드시 한 가지 더 추가할 것이 있으니 즉, ‘A가 언제 어떻게 B에 대해서 채무 이행을 독촉했다는 변제 통고요소’가 포함되어야만 적법한 소인 기술로 인정받고, 이 요소가 빠져있는 소장은 곧 바로 위에서 말한 소인 기술의 형식적 하자를 이유로 소각하신청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소각하신청과 비교되는 것으로는, 비록 소인의 형식적 요건을 충족했다 하더라도 이와는 다른 이유로 소송을 종결시켜 줄 것을 법원에 신청하는 소기각신청(Motion to dismiss) 제도가 있다. 예컨대 원고가 소장만 제출해 놓고 사실발견절차(discovery)에도 들어가지 않고 시간만 끌거나, 법원의 명령에 위반하는 행위를 하거나, 또는 소송절차법이나 규정을 위반하여 소송 진행상 실질적 하자가 발생한 경우에는, 소각하신청이 아니고 소기각신청을 법원에 제기하여 소송의 종결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원고 측 변호사가 소송을 제기하자마자 상대방 변호사가 소각하신청을 하여 소송이 각하된다면(물론 재정비하여 다시 소장을 제출하는 데는 문제 없지만) 처음부터 원고 변호사가 준비나 실력이 부족한 것으로 의뢰인이나 상대방에게 인식될 수 있기에 소인의 형식적 충족에 신경써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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