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보이사 겸 신문편집인이 되어 신문을 만든지 3개월, 이제 신문에 틀이 잡혀서 장기적인 신문발전 계획이나 세워볼까 하던 중에 세상사가 다 그렇듯 큰일이 생겼다. 유일한 전문기자 출신 박신애 편집장이 6월 20일부로 그만두게 된 것이다. 더 좋은 직장 찾아서 가는 사람 기쁘게 환송해주는 것이 직속상관인 나의 유일한 일이면 좋겠지만 사표의 원인도 찾아야 하고, 미리 챙기지 못한 책임론도 등장하고, 편집장의 빈자리가 채워질 때까지 신문운영대책 수립 등 할 일도 많고, 말들도 많다. 그래봤자 이 모든 것을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만 갑작스런 큰 일로 머리가 아파지다 보니 이 대한변협신문의 기원과 역사가 궁금해졌다. 앞날이 걱정되면 역사를 돌아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인지상정인가 보다.
대한변협신문은 2000년 3월 27일 제40대 김창국 협회장이 취임한지 1년 후에 만들었다. 김창국 협회장은 서울회 회장이던 1994년 2월 서울회에서 월간으로 ‘시민과 변호사’도 창간했으니, 변호사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함을 간파하신 분이었다. 그때 공보이사 겸 편집인은 오욱환 전 서울회 회장이었다. 격주간 8면으로 발행되었다. 지금은 16면을 발행하고 있다. 협회장이 발행인이 되고, 공보이사가 편집인이 되는 체제는 그 후 정재헌 하창우 시대, 박재승 도두형 시대, 천기흥 하창우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보니 하창우 전 서울회 회장은 공보이사를 2회에 걸쳐서 했다. 그 당시는 대변인도 없던 시절이니 최적의 공보이사라 칭할 수 있겠다. 2007년 3월에 출범한 이진강 협회장 시대(편집인 윤상일)에 신문의 변화가 생겼다. 1년간은 평소처럼 8면 격주로 발행하다가 2008년 1월부터 8면 주간발행으로 바꾼 것이다. 이진강 협회장이 그 당시 세상을 향하여 할 말이 많으셨던가 보다. 지금이야 내가 편집인이 되기 전에 이미 매주 발행이니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격주로 발행되다가 갑자기 매주 발행하느라고 그 당시 편집인인 윤상일 변호사와 홍보과 직원들은 무척 고생했을 것이다. 그때라고 인력을 두배로 보충하여 줄 리가 만무할 것이니 말이다.
이 매주 발행은 2009년 3월 출범한 발행인 김평우, 편집인 홍승기 체제에 들어와 유지되다가 2009년 8월 31일부터 8면 격주 발행으로 변경되었다. 협회신문의 역사에 있어서 김평우 협회장 시절은 격변기다. 홍승기 공보이사 겸 편집인이 그만두는 사태가 발생하자 2009년 11월 9일부터 2011년 3월 21일까지 발행인과 편집인을 김평우 협회장이 겸하였다. 신문편집위원장을 새공보이사인 정태원 변호사가 아닌 임양운 부협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김평우 협회장은 신문에 관심이 많아 이름만 편집인인 것이 아니라 직접 신문기사와 칼럼, 사설까지 직접 관여하셨다. 신문의 지면도 변화를 주어 2009년 9월부터 12면 격주 발행, 2009년 12월 21일부터 16면 격주 발행, 2010년 5월 3일부터 12면 주간 발행으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 당시 이런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였던 것은 김평우 협회장이 신문발행과 편집에 전문가의 영입이 필요하다고 역설을 하여 법률신문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베테랑 기자출신인 박신애 편집장을 2010년 2월에 뽑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그때부터 신문이 많이 달라졌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전문가가 들어온 결과일 것이다.
2011년 2월 신영무 협회장 시대에 들어와 글발이 좋기로 소문난 엄상익 공보이사가 선임되어 편집권의 독립을 확보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신문을 만들었음에도 1년간 발행인 겸 편집인 신영무 체제가 유지되다가 2012년 1월부터 정상적으로 발행인 신영무, 편집인 엄상익 체제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신문 면수도 2012년 4월 2일부터 16면으로 변경되어 지금까지 16면, 매주 발행이 유지되고 있다. 엄상익 편집인은 협회 신문의 역사에 있어서는 기억할 만한 분이다. 우선 그가 만든 신문에 대하여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다. 그 자신이 마치 협회신문 만드는 것이 전업인 것처럼 열심히 만들었고, 직접 필자가 되어 다양한 인터뷰와 칼럼을 소화해 냈다. 그때 소설까지 신문에 등장했다. 그분에 대해서는 혼자 신문을 만드냐는 비난도 있었지만 그가 신문을 만들었던 때가 읽을거리가 다양해 협회신문의 가독성이 가장 높았던 시절임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그는 신문을 잘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법조인들이 문학과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것을 이용하여 협회 학술잡지 ‘인권과 정의’ 4개호를 줄이고 그 비용으로 The Way란 잡지를 계간지로 창간하였다. 그 편집도 협회 홍보과가 아닌 동아일보사에 맡겨서 잡지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여러 가지 문제로 4회 발행만에 중단되었지만 내가 공보이사가 된 이후 ‘더 웨이’의 중단에 대하여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지금은 올해 3월 출범한 발행인 위철환, 편집인 박형연 체제이다. 내 성격이 두루뭉술하여 무난하게 2년이 흘러갈 줄 알았더니 갑자기 박신애 편집장이 새직장을 찾아 떠나는 바람에 갑자기 첩첩산중에서 길을 잃은 심정이다. 그러다 보니 원래 신문의 역사 회고는 내가 편집인을 그만둘 때쯤에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역사를 더듬어 보게 되었다. 미리 걱정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위기는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내가 할 일이 더 있겠는가!

/박형연 공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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