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92학번이고, 2000년 42회 사법시험을 합격한 후 2003년 4월경에 공익법무관으로 발령을 받아 고향인 경남 창원으로 내려왔다. 그 이후 계속 이곳에 머물고 있으니, 서울에 산 기간은 만 11년쯤 된다.
나는 7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해서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 생활을 시작한 나이는 만 18살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기숙사 방에 떼어놓고, 고향으로 가시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머물던 기숙사 앞에 농구장이 있었는데, 농구장 앞에서 낙성대 전철역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가시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고, 얼마인지 가늠도 안 될 기간 동안 이별을 할지도 모르고, 혹시라도 이 길로 영영 부모님과 이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했었다.
대학교에 갓 입학한 프레시맨(fresh man)은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공강시간이야 동기생들과 이리저리 시간을 보내면 되었지만, 주말이 되면 딱히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기에 답답한 기숙사 방에서 외로움에 진저리쳤다. 지금 같으면 멋지게 옷을 차려입고, 서울 시내를 구경 다녔으리라.
하지만 전철을 타기도 겁나고, 지리도 몰랐으며, 인터넷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얻기도 어려웠으니(당시에는 386컴퓨터도 몹시 귀했다) 기숙사에 살던 촌놈들이 할 일이라곤, 50~80 당구실력을 가지고 어울려 당구치는 정도.
4월이 되니 벚꽃이 교정에 날렸다. 기숙사에서 경제학과로 내려가는 삼거리에 핀 벚꽃을 보며 노영심의 노래를 들었었는데,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감수성이 가장 예민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흩날리는 벚꽃 잎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인양 대학입시에 사춘기를 유예하였던 소년의 마음을 할퀴었다. 김광석이나 안치환의 노래를 듣고 울기도 했고 신경숙의 소설을 읽고 눈물을 짓기도 했다. 그때는 그렇게 쉽게 눈물이 났다.
공부만 한 것 같았던 동기들은 언제 배웠는지 기타도 잘치고, 노래도 잘 불렀으며, 예쁜 여자친구를 만나러 다니기도 했다. 당시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신감은 그 정반대의 열등감으로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친구들은 참 똑똑하고, 말을 잘했다. 그리고 다들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요새도 대학 신입생들에게 사발식을 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학 입학과 함께 제1회 개최되는 고등학교 동문회는 사발식을 통해 선배들이 군기를 잡는 시간이었다. 사발식의 취지는 “고등학교 때까지 가졌던 잡생각들을 사발 소주를 마시고 모조리 토해내고, 대학생으로 새출발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당시 동문회장이었던 선배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후배들은 매를 맞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자기 차례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 전 해에 입학하였지만, 뺀질거리면서 사발식을 피하였던 경제과 91학번 형이 먼저 짬뽕그릇에 소주 1병 반을 가득 부어 그 술을 남김없이 마시는 것을 시작으로 장엄한 사발식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없어진 녹두거리 중국집에서 대충 짬뽕 한 그릇을 두세명이 나누어 먹은 후 그 짬뽕 그릇을 이용하여 실시되는 사발식은 음주의 경험이 없는 후배들에게는 대단히 부담스러웠지만, 동문회에 참석한 이상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단히 위험한 짓이었지만, 그때에는 그렇게 무자비하게 술을 마셔도 큰 사고는 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딱히 친구들도 없는 촌놈들에게 동문회는 피할 수 없는 자리였고, 마주치는 선배들이 엄청나게 협박을 했기 때문에 무사히(?) 대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동문회에 불참할 수도 없었다. 내 앞 차례는 조선공학과에 입학한 동기 녀석이었는데, 이 자가 술을 마시고 불렀던 노래가 ‘토요일은 밤이 좋아’였지만, 노래를 부르는 동안 급속히 만취해버린 녀석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가 끝나지를 않고 돌림노래로 변해버렸다. 바들바들 떨면서 대기하던 나의 차례. 소주 1병 남짓이 든 짬뽕그릇을 양손으로 파지하고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소주에 비친 나의 모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태백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음주생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부모님과 헤어져서 혼자 살아야 하는 것은 두렵고 막연한 일이었으나, 서울 생활에 그렇게 적응해갔다. 자식은 키워봐야 소용없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는 부모님이 서울에 나를 보러 올라오시는 게 부담스러워졌으니까.
당시에 실체도 알 수 없고 해법도 알 수 없었던 많은 고민들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는 일은 그 자체로 빙긋이 웃음을 짓게 하는 것 같다. 대학 초년 시절의 기억은 해마다 봄이 오면 불현듯 되살아난다. 여러 선배 후배 변호사님들은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는지?

/김상군 변호사·경남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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