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들은 공소사실에서 기재된 내용이 조금이라도 사실과 차이가 있으면 우선 부인부터 하고 본다. 같이 가긴 했지만 공모를 한 적은 없다는 둥, 상피고인은 피해자를 폭행하긴 했지만 자신은 그 자리에서 구경만 했다는 둥, 두세대쯤 때리기는 했지만 열대까지 때리지는 않았다는 둥, 발로 차긴 했지만 손으로 뺨을 때린 적은 없다는 둥. 이 모든 부인들이 전혀 실익이 없다는 걸 그들은 알까.
최근 강도상해, 특수강도 등의 죄명으로 세 명의 피고인이 형사합의부에서 재판을 받는데 국선변호를 한 적이 있었다. 두명은 이미 특수절도로 교도소 수감 중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강도상해로 징역을 살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피고인이었다. 피고인들이 정신지체인 피해자를 4회에 걸쳐 때리고 푼돈을 빼앗은 사건으로 피해액이 크지 않지만 죄질이 좋지 않았다.
면담을 하면서 공소사실의 인정 여부를 묻자 첫 번째 피고인은 자신이 피해자의 지갑에서 돈을 꺼낸 게 아니고 피해자가 건네주어서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럼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준 것이냐고 묻자 그건 아니고 때려서 빼앗은 건 맞단다. 이런! 나머지는 인정. 두 번째 피고인은 상피고인과 함께 피해자를 찾아간 건 맞지만 본인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담뱃불이 없어서 잠시 들어갔다 나왔으며 피해자를 때린 사실은 없고 바닥에 흩어져 있던 돈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나왔단다. 상피고인은 수사기관에서 두 번째 피고인도 함께 폭행을 하였다고 진술한 내용에 배치되는 주장으로 그 외 별 다른 증거가 없는 상황이었다. 패스. 세 번째 피고인은 두 명의 상피고인과 함께 피해자를 찾아갔고 자신도 폭행을 하긴 했지만 자신은 금원 강취의 의사를 없었단다. 누가 보더라도 부인의 실익이 전혀 없다.
세 피고인 모두 공소사실을 인정하고 합의를 위해 노력하기로 하고 면담을 끝냈다.
드디어 공판기일. 세 피고인 모두 자백하는 내용의 변호인의견서가 기일 며칠 전에 제출되어 재판부에서도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느 때처럼 검사가 먼저 공소사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요약을 하지 않고 그대로 낭독을 하는 순간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재판장님이 피고인들에게 차례로 공소사실을 인정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첫 번째 피고인이 처음 나에게 했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망했다. 두 번째, 세 번째 피고인도 여지없이 나를 배신했다. 재판장님도 약간 당황하신 눈치셨는데 재판 경험이 많은 분답게 곧 피고인들의 부인 내용을 차근차근 물어보시면서 정리를 하셨다. 피고인들은 재판장님의 부드러운 태도에 힘을 얻어 처음 나를 만나 부인할 때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장시간의 진술 후 나는 서둘러 의견을 정리하고 그대로는 증거 인부를 할 수 없어 그 절차는 다음으로 미룬 채 재판을 끝냈다.
분노 폭발. 법정을 나와 불구속 상태인 세 번째 피고인을 향해 속사포 공격을 했다. 며칠 뒤 나머지 두 피고인으로부터 접견 요청이 왔다. 자신들이 잘못 했다는 사과의 메시지도 함께. 검사님이 공소사실을 읽어내려 가는데 자신들이 너무 나쁜 놈처럼 묘사되어 있어서 도저히 그냥 인정할 수가 없었단다. 이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지. 그들의 수사기록에는 범죄 사실이 더 많았다. 피해자가 정신지체이다 보니 진술이 일관되지 않은 부분도 있어 그나마 기소 내용은 기존의 고소 사실에서 상당히 축소되어 있었다. 공소사실을 부인하고 피해자를 부르고 판사님이 증거기록을 여러 차례 정독하는 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자백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국선변호라 귀찮아서 자백을 유도한 게 아니었다. 이제 와서 또 자백이라니. 모양은 이미 변호사의 강요에 의한 자백으로 굳어졌는데 또 다시 자백이라고.
두 번째 기일이었다. 세 피고인들이 모두 자백을 하겠다고 하니 재판장님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변호사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자신들의 의견을 밝히라고 다그치신다. 이런! 근데 세 피고인들의 답변 모양이 가관이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주눅 들린 표정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공소사실을 인정한단다. 누가 보면 뒷골목에서 변호사한테 엄청 쥐어터진 모양. 학교 일진에게 삥을 뜯기고 있는 왕따의 모습. 재판장님은 재차 삼차 물으셨다. 결국 자백으로 마무리되긴 했으나 정읍으로 와 새롭게 변호사 일을 시작하는 나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얼마 후 또 다른 국선 사건 재판이 있었다. 그 피고인도 수사기관에서부터 부인을 해오던 터. 피고인의 부인이 그다지 의미가 없었고 피고인도 이를 수긍하고 자백을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재판장님이 공소사실의 인부를 변호사인 나한테 묻지 않으시고 피고인에게 먼저 물으셨다. 아! 이건 또 뭐지. 지난 사건의 후유증임에 틀림없다. 가끔 피고인에게 공소사실의 인부를 먼저 묻는 판사님도 계시지만 이 재판장님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는데. 망했다. 이제 망가진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게다가 그분은 지역법관이신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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