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까지 밤에 실수하는 것은 분명히 고쳐야 할 병
배변훈련은 꼭 시켜야…아이가 견뎌내야 하는 과정


예전에 어머니가 나의 냉정함과 넉넉하지 못한 조급증을 꾸짖으며 하셨던 말 중에 하나가 “네가 자식을 낳아 길러봐야 아는데…” 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자식을 낳고서, 좀 더 정확히는 기르면서 참을성이라던가 인정이 많아지긴 했다.
심지어 아이를 막 낳고 나서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감정이 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좀 거창하게도 측은지심이 생겼다. 저들도 누군가가 배 아파 낳은 귀중한 생명인데 하는 경험에서 나온 동정심은 깊고도 진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진료실 안을 뛰어다니는 애들을 보면 혼을 내던가 엄포를 놓던가 해서 재빨리 단속을 했었는데 내 아이가 뛰어다닐 무렵에는 그 산만함이 견딜만해 진 때문인지 그렇게 심하게 제재를 하게 되진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또 다시 불편하게 느껴지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고단한 육아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났구나 하고 생각했다.
한의원에 찾아오는 어린아이들 중에 야뇨증 환자가 적지 않다. 선천적으로 괄약근의 조절이 약해서 오게 되는 야뇨증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실은 드물고 배뇨훈련이 잘못되어 오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나도 그랬지만 직장에 다니는 엄마들은 자녀들에게 충분히 시간을 같이 못 보내준다는 이유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일곱살이 넘어서 야뇨로 고생하는 아이들 중에서 밤에 기저귀를 입고 자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이가 실수를 하게 되면 뒤처리에 걸리는 시간과 노동이 엄청나서 그것을 방지하려고 입히기 시작하지만, 나중에 좋아지겠지 하는 엄마가 의도와는 다르게 아이들은 기저귀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비단 이불빨래의 버거움 때문만 그런 것은 아니다. 배뇨훈련을 하면서 밤에 아이가 소변을 보는 시간쯤에 한번 깨워서 일을 보게 한 다음 재워야 하는데 곤히 자는 애를 깨우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다는 것이 엄마의 설명이다. 혹은 지친 밤에 일어나서 도와주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밤에 깨워서 소변보게 하는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고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고 근거를 제시한다. 밤에 깨워 소변을 보게 하는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는 것은 아주어린, 세살 미만의 어린아이에 해당한다. 적어도 다섯살이 지나서 야뇨를 보이는 아이들은 그것이 창피한 일이라는 인식도 있고 스스로가 그만 실수하고 싶은 마음도 이미 가지고 있다. 오히려 엄마가 기저귀를 채움으로써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에 온 일곱살 아이에게 “일곱살에 밤에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은 고쳐야 되는 상황이므로 선생님이 도와주겠다”고 설명하고 몇 개의 규칙을 정해주고 신장과 방광기능을 보강하는 침을 놓았다. 규칙은 밤에 자기 전에 반드시 소변을 보고 물이나 우유는 수면 전에는 마시지 않는 등의 상식적인 것과 엄마에겐 밤중에 한번 깨워서 소변을 보게 하고 만약에 실수를 하게 되면 아이 스스로 정리하게 시킬 것을 당부했다.
이상하게도 침을 한번 맞고 나서는 실수를 안 하게 되었다고 신이 난 아이는 스스로 침을 더 맞겠다고 찾아왔다. 충분히 그 상황을 칭찬해주고 격려해준 다음 치료하고 다시 일주일 뒤에 보자고 약속하고 돌려보냈다. 나는 아이가 좋아진 이유가 침의 효과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아의 병을 살피다 보면 병이 아닌 경우인데 의학적인 도움으로 먼저 접근하는 아쉬운 경우가 많다. 10살이 넘는 아이의 양말을 아직도 신겨주고 아이가 물건을 망가뜨리거나 주위를 어지럽히거나 혹은 어른들에게 버릇없이 굴어도 귀엽다며 웃어넘기고 공공장소에서 질서를 어지럽혀도 규칙을 가르치지 않고서는 ‘우리 아이가 너무 산만하니 주의 집중력 장애가 아니냐’는 걱정을 먼저 하는 식이다. 이것은 분명히 아이를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적절한 때에 안 되는 것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수치심도 알게 되고 도덕과 절제를 배우게 된다. 아마도 배변훈련은 그런 것들을 배우는 맨 첫 단계에 있는 단춧구멍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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