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에 밀려 하루를 열고 있다. 출근길, 지하철 8호선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지나야하는 길고 긴 지하통로. 모두들 각자의 밥벌이를 향해 분주히 나아가는 중이다.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지키느라 속이 불편한 아저씨도,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한 시간밖에 잠을 이루지 못한 취업준비생도, 밤새도록 결혼문제로 애인과 다투었던 예비 신부도 그 사람들 틈에 섞여 있을 것이다.
옆 사람의 가쁜 숨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땀 냄새를 맡으며, 어깨를 맞대고 정신없이 걸어가다 보면 뭔가 오묘한 느낌이 든다. 이름이 무엇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이들과 함께이지만, ‘여기, 오늘 이 순간에 내가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작은 감격이 인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가 있음에 감사할 때가 있다. 꼭 월드컵 경기를 함께 응원하거나 수재의연금 모금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지금 같이 호흡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 충분하다. 그저 비싼 물가에 같이 투덜거리고, 계절의 변화를 함께 경험하며, 한마음으로 먹거리를 걱정하는 이들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왠지 든든해진다. 더욱이 그 개개인이 얼마나 다양한 개성과 색깔을 가진 사람들인지 생각하면 삶의 매순간이 화려한 축제다.
색(color)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 색은 꿈이고 사랑이라 노래하는 그는, 다양한 색의 집합이 곧 우리네 인생이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 믿음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타오르는 빨강과 명멸하는 검정에서부터, 빛을 만난 주황과 그림자가 드리워진 보라, 출렁이는 파랑과 흩어지는 분홍, 피어오르는 노랑과 솟아오르는 초록에 이르기까지…. 색은 외부와 관계하며 그야말로 다이내믹한 색채의 향연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시간이 살아 숨 쉬고 역사가 피어난다.
개개인의 삶도 어떤 각도와 방식으로 시대와 마주하느냐에 따라 그 고유한 빛깔을 드러낸다. 또, 어떤 이와 조우하느냐에 따라 빛은 공명과 파열을 낳고 새로운 파장을 만들어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새로운 멜로디를 뽑아내고, 우주를 들여다보고, 과거를 여행하느라 분주하다. 어디선가는 고산 윤선도의 시조가 재해석되고, 니체의 사상이 뒤틀려지고, 마르티니크 화산 폭발이 소설화된다. 우주 밖에서 보면 우리는 다채로운 스테인드글라스를 수놓고 있는 아름다운 빛의 조각인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삶이란 마치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어 가는 것 같다. 혼자 퍼즐을 맞출 때는 쉽게 발견할 수 없던 조각들이 타인과 함께하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누군가를 통해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사유와 인식을 접할 때마다 찾고 싶었던 삶의 편린 하나를 얻는 것이다. 각자가 일궈온 생의 조각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성장한다. 그리고 그 조각모음의 스펙트럼이 넓어질수록 시대를, 우리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색을 사랑한 그 화가는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소중한 색이고 싶다고. 다른 색과 만나고, 다른 색과 어우러져 더 큰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라고.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나의 오늘을 풍요롭게 가꾸어주는 당신에게 감사하며, 우리들 모두 서로에게 진정 소중한 색(color)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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