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제가 전화한 이유는 책꽂이 때문이에요.”
“책꽂이? 무슨 책꽂이?”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예전에 신림동에서 시험공부 할 때 누나가 3단짜리 책꽂이를 준 게 있는데, 너무 낡아서 이제 버리려니까 누나 생각이 나잖아요.”
김형국 변호사는 지금 서부에서 국선 전담으로 있다. 우리는 둘 다 45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신림동에서 시험공부 하면서 알게 되었다.
형국이는 눈썹이 진하고, 뽀얀 우윳빛 피부를 가진 체격 좋고 너무도 순박한 친구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아직도 총각이다. 빨리 장가를 보내야 될텐데.
한참 변협 협회장 선거로 정신없던 때, 형국이에게 전화를 했었다. “형국아, 이번에 내가 밀어드리고 싶은 후보님이 계신데, 혹시 너는 마음속으로 지지하는 분이 있니?” 나는 형국에게 거의 2년마다 한번씩 전화하는 것 같다. 선거철 즈음해서.
“아니요, 누나가 찍으라는 분 찍을게요.”
“아, 내가 찍으라는 사람을 무턱대고 찍을 필요는 없고.”
속으로는 기쁘면서도 열심히 홍보를 했다.
“예, 누나, 걱정 마세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다 말할게요.”
언제 어떤 식으로 어떤 부탁을 해도 형국이는 무조건 오케이다. 내가 아니라 다른 누가 부탁해도 그랬을 테지만, 어쨌든 스스로는 형국이가 절대적인 내 지지자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2주쯤 지났을까 형국이가 전화를 했다. 변협 협회장 결선투표가 얼마 안남은 터라, 다시 한번 열심히 운동하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13년 전에 내가 주었던 3단 책꽂이를 버리려다가 내 생각이 났다고 말한다. 내가 무슨 이유로 책꽂이를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새 것을 사서 준 것 같지는 않고, 한참 쓰다가 바꿀 때가 된 걸 주었을 것이다. 13년도 훨씬 더 된 낡은 책꽂이를 안 버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고 그걸 누가 줬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신기했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고마움이 뜨겁게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형국이는 국선전담을 8년째 하면서 정말 미친 듯이 일만 했다. 국선전담 제도가 처음 생겼을 때는 한달에 40건 변호가 기본이었고 사무실 임차료나 여직원 비용은 전부 개인 부담이었다. 그럴 때 형국이는 한달에 60건 이상씩을 변호한 것으로 안다. 딸린 식구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작은 오피스텔을 얻어서 웬만한 잔일은 스스로 다 처리했다. 공판이 없는 날은 매일 구치소에 가서 살았다. 자기한테 주어진 것 이상의 일을 군소리 없이 척척 해치웠다. 애인도 없고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그렇다고 변명하였지만, 그 속에 숨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살갑거나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좀 무뚝뚝해 보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누구보다 예의가 바르다.
형국이를 생각하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국선전담 변호사들이 줄줄이 생각났다. 울산에 있는 윤경석 변호사, 서울 중앙에 있는 김정윤·한연규·정충기 변호사, 의정부에서 국선전담으로 있다가 부산으로 경력법관으로 임용되어 있는 신윤주 판사, 국선전담은 아니지만 그 누구보다 가난하고 어려운 의뢰인을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는 대전의 성정모 변호사, 그리고 얼마 전까지 국선전담을 하다가 그만둔 정읍의 박정교 변호사.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열정이 충만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돈에 구애받지 않고 진정으로 사법정의를 펼치기 위해 투쟁한다는 것이다.
일반 변호사 입장에서는 국선전담 변호사님들이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니 형사 사건 자체가 점점 궁해져서 싫기도 하다. 국선 변호에 만족한 의뢰인들이 사선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고 사선을 찾는 의뢰인들은 높으신 전관변호사님들을 선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같은 변호사들 입장에서 그와 같은 시스템의 부작용(?)에 불만을 가지는 것과는 별도로, 어쨌든 그들이 아름답고 멋져 보인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진정성인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면 나중에는 다 알게 된다. 잠시 잠깐 구체적인 저간의 사정을 몰라 오해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생겼던 사람도, 그때 가서는 미안하다고 자신의 식견이 짧았다고 사과하기 마련이다. 주변 상황이나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상해도 즉시 반응하며 화내지 말고 선해하며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는 게 중요하다. 자신을 추스를 것, 사람들을 욕하지 말고 일이 잘 안 풀린다고 탓하지 말 것, 사람을 믿을 것, 내가 먼저 사랑할 것, 그들도 이미 나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것. 이것이 김형국의 전화를 받고 행복했던 그날의 내 생각이다.


/노영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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