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우리말 번역서가 있어도 가능한 원서를 본다. 일본이나 영어권에서 나온 책은 그 나라 원서로 보고, 다른 언어권의 책은 영역된 책을 먼저 찾는다. 내가 외국어를 잘해서가 아니다. 처음에는 책도 읽고 외국어 공부도 해보자는 심산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서 발행된 책이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왜? 한국 책이 좋았기 때문이다. 좋아도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발행된 책은 좋다. 표지는 웬만하면 하드커버다. 종이도 하얗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그 표면도 맨질맨질 보드랍다. 종종 책장에 손을 베이기도 한다. 제본은 어찌나 튼튼한지 몇백년 뒤에 문화재로 쓸 수도 있을 정도다. 글씨도 큼직큼직하고, 여백도 많다. 그래서 한권짜리 원서가 한국에서는 2~3권으로 나뉘기도 한다. 심지어는 원래 한권이었던 책도 판을 새롭게 하면서 2~3권으로 쪼개서 나온다. 신간은 대부분 띠지에 둘러싸여 있고, 디자인도 책 한권에 머물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너무 예쁘다.
그래서 한국 책은 사는 순간부터 마음이 뿌듯하다. 이렇게 예쁘고, 좋은 책을 갖고 다니면 그 아름다움이 모두 내게도 묻어날 것만 같다. 하지만 무겁다. 들고 다니기 불편하다. 책이 좋은만큼 가격도 높다. 책이 너무 좋아서 버리는 것이 왠지 죄짓는 느낌이다. 이사할 때마다 책은 가장 큰 짐이다. 2~3년만 지나도 이미 옛날 책이 되어서 누구를 주기도 마땅치 않다.
대신 외국에서 발행된 책은 대부분 페이퍼백이고, 가끔 소장가들을 위해서 하드커버도 나온다. 종이도 1990년대 초반에나 쓰던 갱지 수준이다. 베스트셀러일수록 매스마켓 페이퍼백(mass market paper-back), 즉 보급을 위해서 갱지에 제본도 엉성하게 엮은 책도 많다. 전자책도 많다. 같은 책이지만 독자의 성향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책이 있는 것이다. 상황과 책의 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고를 수 있다.
제러미 리프킨은 이미 10여년 전에 그의 저서 ‘소유의 종말’에서 21세기는 접속의 시대라고 했다. 더는 시장에서 재산을 거래하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통해서 접속하고 일정 기간 사용권을 얻는 시대라는 것이다.
지식 정보의 유통도 빨라지고 많아진만큼 우리 책도 좀 가벼워지고,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같은 책이라도 다양한 형태로 나왔으면 좋겠다. 웬만한 고전이 아니고서는 2~3년만 지나도 시의성이 떨어진다. 그 사이 새로운 것이 많이 나온다. 굳이 모든 책을 백년 이상을 버틸 정도로 두꺼운 표지와 좋은 제본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전문서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 해가 지나기 바쁘게 새 판을 찍어내는데, 매번 두꺼운 하드커버 책으로 할 필요가 없다. 추록이 그만큼 충실하게 나오지도 않는다. 전자책도 한국에서는 별로 없다. 일부 베스트셀러를 제외하고는 깊이 있는 책, 전문서적 그리고 고전류의 책은 전자책이 전무하다. 전문서적일수록 검색기능을 활용할 수 있어 전자책이 더 유용한 면도 있다.
정부는 도서정찰제를 강화할 예정이라고 한다. 온라인 서점의 할인 폭을 줄이고, 마일리지 사용도 제한한다고 한다. 새 정부도 출판계를 위한 많은 지원을 계획하고 있는 듯하다.
출판은 한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그에 상응한 대우와 지원은 당연하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하는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시대가 달라졌으면, 책도 달라져야 한다. 새로운 모습의 책, 다양한 형태의 책, 급변하는 시대에 맞춰서 적절하게 유통될 수 있는 책, 그런 책의 시대를 기대한다. 이제는 우리 책이 좀 그만 좋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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