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그렇게 많은 나이라 할 수는 없지만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역시 인생이란 그리 간단치 않다는 자각이 가장 크게 다가오는 듯싶습니다.
또 삶이라는 것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주변에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생사를 보면서 살아 있음의 환희와 삶의 허무함을 같이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감정의 기저에는 삶에서 경험한 모순과 불가사의 그리고 자신의 의지가 운명이나 시대의 흐름 속에서 얼마나 무기력하고 작은 존재인가 하는 허무주의가 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기도 합니다. 더욱이 세속적인 일들에 매달려 정신없이 달려오다가 문득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 조금은 마음이 바빠지면서 구극의 구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종교적이 되는 것입니다.
한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오는 연말연시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각오와 계획을 세우고 무엇인가를 시도해 보는 것 같습니다. 내년이면 예순이 되는 나이가 된 나에게는 특별히 삶의 신비와 허무, 그리고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의문과 함께 자신을 정신적으로 해방시키고 깨달음을 체험해 보고 싶은 욕구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는 물론 위에서 본 삶에 관한 일정한 자각이 있어 내면에 내재되었던 욕구가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죄의식과 업보에 관한 두려움과 알 수 없음이 작용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지은 죄는 업보가 되어 우리의 삶을 일정부분 지배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 오솔길에서 만나는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과의 사이에 수많은 사랑과 자애와 욕망 그리고 죄를 짓는 업보를 등에 짊어지고 가는 여행이 인생이 아닌가 하는 자각 말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업보에서 벗어나고 그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고 느껴보고 싶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 마음은 지극히 순수한 상태에서 출발하였던 것이고 가능하다면 갈 때까지 가보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기도입니다. 기도란 초월적인 존재에의 귀의와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참회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도의 형태가 저에게 있어서는 불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나, 이는 취향과 인연에 따른 것일 뿐,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또는 다른 어떤 종교든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일 것입니다.
저같이 자의식이 강한 사람에게 종교적인 것과 관련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초월적인 존재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는 개인적으로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초월적인 존재에 머리를 숙이고 예를 올린다는 것은 분석이 아니라 심정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다가 일반적으로 기도의 형태는 무엇을 위한 것이라는 형태를 벗어나기 어렵고, 이 때문에 기도라는 행위에 신성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인간의 욕망과 업보가 있음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초월적인 존재에 머리 숙이고 자신을 던져 버리고 싶은 나이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고, 새해에 그와 같은 기도를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기도는 무엇에의 소원이 아니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이 순간 이 자리에 존재하는 자신을 돌아보고 초월적인 것에 무심히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이제까지의 일반적인 기도가 초월적인 존재를 주도한 것이었다면, 기도하는 ‘나’가 주인이 되는 형태라고도 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이 기도의 끝자락에서 삶이나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나만의 기도를 계속하여 보겠다는 것이 정초 저의 희망이자 각오입니다.

이태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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