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았던 사건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기가 싫어서, 차를 몰아 예술의 전당으로 갔다. 미술관 앞 광장에 서니, 날씨는 춥고 기분은 울적했다. 바람까지 매서웠다. 바티칸전이 열리는 한가람미술관을 등 뒤로 하고, 반 고흐 in 파리전이 열리는 디자인미술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고등학생 때부터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했다. 그의 광기에 찬 그림들이 좋았고, 돈 매클린의 고흐 추모 노래인 ‘빈센트’도 좋았다. 음악다방에 가면 반드시 DJ에게 빈센트를 틀어달라고 주문했고, ‘Starry starry night’으로 시작하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청춘기를 보냈다. 그 당시에는 젊음이 찬란하지 않았다. 치기 어리고 위악적인 행동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때였다. 그림이 고흐에게 구원이었듯이, 고통 어린 고흐의 삶이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고흐는 스물일곱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서른일곱살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고갱과의 불화로 자신의 귀를 자른 서른네살의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시절 별들이 가득 찬 밤하늘을 보면서 그림 한점을 완성했다.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캔버스의 4분의 3이 밤하늘이다.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별들이 밤하늘 전부를 차지하고 있고, 오른쪽 귀퉁이에는 초승달이 황금빛을 물결 퍼지듯 발하고 있다. 캔버스 하단에 위치한 드문드문 불 켜진 창이 있는 마을은 잠들어 있고, 비정상적으로 크게 그려진 사이프러스나무는 하늘을 향해 이글이글 타오르면서 고요한 마을을 덮을 듯한 기세로 서있다. 마을 사람들은 집밖 밤하늘에서 펼쳐지는 달과 별들의 빛의 향연을 알지 못한다. “별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를 꿈꾸게 한다”고 했던 고흐. 빛을 향해 가고자 하나 결코 갈 수 없었던 고흐. 마을풍경은 흡사 고흐 그 자신의 모습과도 같다.
돈 매클린은 스물일곱살에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서 영감을 얻어 빈센트란 곡을 작곡해 불렀다. 10년 동안 800점 이상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데생을 그렸지만 생전에 팔린 작품은 단 하나에 불과했던 고흐의 고독했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곡이다. 그 노래 중 ‘Now I understand, What you tried to say to me, How you suffered for your sanity.’란 부분이 흘러나오면, 고등학생 시절이나 지금이나 울컥해지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sanity’ 부분에서 더욱 그러하다. 창녀들을 쉽게 사랑하고 광부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자 했던 고흐, 그 가난하고 순수한 영혼 때문에 괴로워했던 고흐, 그의 아픔이 내 가슴을 적셨다.
고흐는 서른세살 때 네덜란드를 떠나, 2년간 파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 in 파리전에는 그 시절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고흐의 그림은 이전의 어두운 분위기에서 많이 벗어나, 빛과 화려한 색으로 화폭을 메웠다. 인상파 화가들과의 교류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고흐답지 않게 공원을 산책하는 연인들의 모습도 그렸고, 원색의 꽃들도 정물화로 그렸다. 개발되기 전의 몽마르트르 언덕과 센강변의 아름다운 풍경도 그렸다. 이때 그린 자화상 속의 고흐는 힘있고 활력이 넘쳤고 눈빛이 형형했다. 그림이 팔릴 것이라는 화가로서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파리에서 고흐는 “나는 즐겁게 작업하고 있고, 언젠가는 그 속에 젊음과 활기가 들어있는 그림을 그릴 것이라는 희미한 가능성을 그려본다”고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미술계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동생 테오조차 형의 그림에 회의적이었다. 그의 희망은 무참하게 묵살당했다. 고흐는 도망치듯 파리를 떠나 아를르로 갔고, 그때부터 정신병과 싸우면서 팔릴 그림이 아닌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끝이 나는 격정의 시기에 그의 최고의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품에 대한 미술계의 관심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흐는 자신의 작품이 미치광이의 그림으로 낙인찍힐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고흐 스스로 이 시기의 그림들은 “거의 고통으로 울부짖는 것”이라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작품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지만,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고흐로서는 더 이상 삶에 집착할 수 없었다. 그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들판에서 자기 가슴에 총을 쏘아 서른일곱의 생을 마쳤다. 영원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도 6개월 후 마비성치매로 사망했다. 둘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마을 공동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미술관을 나서니, 어느덧 어둠이 깔려 있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는 별 하나 볼 수 없었다. 여전히 춥고 바람은 매서웠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언젠가 고흐의 공동묘지 가는 길 밀밭에서 보았던 새빨간 양귀비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불꽃같은 양귀비꽃들이 희망처럼 피어났다. ‘How you tried to set them free, They would not listen they’re not listening still, Perhaps they never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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