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는 인의예악(仁義禮樂)에 대하여는 거리를 두었다. 그 거리 유지의 요지는 한마디로 그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망치고 있는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인의예악을 잊어야 한다. 우리는 인의를 잊어야 한다. 나아가 예악을 잊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미흡하다. 더 잊어야 한다. 팔과 다리를 잊고 몸이라는 것도 잊어야 한다. 귀나 눈의 작용도 몰아내야 한다. 지식도 버려야 한다.

그래서 도(道)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좌망(坐忘)인데 ‘장자 대종사’ 편에 나온다. 그런데 이 좌망은 ‘장자 인간세’ 편의 ‘좌치(坐馳)’-무릇 마음이 쉬지 못하고 앉은 채로 내달리는 것-와는 대비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그 논의를 생략한다. 좌망의 망(忘)자를 가만 들여다보면 ‘없다는 亡과 마음 心의 결합’이다.

그리하여 도와 하나가 되면 어떻게 될까? 차별과 구분이 사라지고 그것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즉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보니 삶이든 죽음이든, 성공이든 실패든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다. 자연의 변화과정에 몸을 맡기니, 젊음이든 미모든, 재물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특별히 집착하는 것이 없다. 인간의 몸을 빌려 살아가는 동안 고민해야 하는 근거가 마음에서 사라졌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인의예지는 오히려 차별과 구분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과연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가? 이것이 가능하다면 심산유곡에 들어가서 도를 닦다 보면 이 세상에 통달할 수 있을게다. 모든 것을 다 잊는 태도는 가능하지도 않고 나아가 별로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차별과 분별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그것이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혹은 최우선적 원리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부정적, 소극적 충고를 장자가 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군더더기인 인의예악을 반대하는 경우에도 이 점은 마찬가지이다.

장자는 말한다. ‘가장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 성명지정(性命之情)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발가락이 붙어 있어도 네 발가락이라 생각하지 않고, 손가락이 더 있어도 육손이라 여기지 않는다’라고(‘장자 변무’ 참조)했다. 따라서 설혹 차별과 구분이 존재한다고 해도 거기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그것을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간주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소위 예악을 사회적 규범이나 규약이라고 하고, 인의를 개인적 규범, 즉 도덕이라고 한다면, 비록 예악이 우리를 불구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인의가 필요하지 않은가? 공자가 말했듯이 인간이 되지 않는다면, 예약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따라서 오히려 근본적인 면에서 따진다면 인간이 된다는 것, 즉 인의의 중요성이 부각되기도 한다. 장자도 인간이 되지 마라는 말은 하지 않을 터이니 결국 우리는 인간에 대한 근본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타인을 배려하고 염려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실행, 이것이 소용이 없다는 것인가?

장자는 그의 이상적 국가, 즉 건덕지국(建德之國)에서 다음처럼 묘사했다. ‘무엇이 의(義)에 들어맞는지 알지도 못했으며, 어떻게 예(禮)를 지키는지도 몰랐다. 멋대로 무심히 행동하면서도 위대한 자연의 도를 실천하고 있었다. 삶은 즐겁기만 하였고, 죽으면 편안히 묻혔다’라고(‘장자 산목’ 중에서). 비록 의나 예를 몰라도 여전히 삶은 즐겁다. 이 즐거운 삶에는 아마 이미 타인을 배려하고 염려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에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 장자의 과도한 우화적 언어기법을 고려한다면, 사실 장자가 인의 즉 개인적 규범인 도덕 그 자체를 부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우리의 자연적 본성에 거슬리는 도덕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타인을 배려하고 염려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자연적 본성인가? 단지 사회적 예법이나 형식적 규칙도 아니고 또 강제적인 타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도덕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의 일부분을 구성하는가에 대하여 또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아마 장자가 원하는 것은 이런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탐구가 아니었을 것이다. 타인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것이 자율적이라면, 즉 스스로 우러나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라면, 현재(장자의 전국시대 중기에도 마찬가지이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들의 상당수가 그런 자연스러움을 오히려 해치고 있다는 지적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두가 잊고, 도와 하나가 되어서 자유롭게 놀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냥 무심하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꾸짖고 전복해야 하는가? 분명히 잊어버려야 하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잊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다. 이런 이치는 자동차보다 걷는 것이 몸과 마음에 좋지만 우리는 이미 자동차에 얽매여 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미 자연과 본성으로부터 너무 멀리, 너무 빨리 달려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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