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준호 변호사

당신과 함께한 세월은 행복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마지막 순간 바라보는 눈길에서.
그 먼 옛날 함께 달리던 가슴 벅찬 순간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벚꽃 흐드러진 봄날
가로수 밑을
밤새 끝도 없이 걸었을 때에도,
장마비 시원스레 지나간 후
콸콸 쏟아지는 계곡물을 따라 헤매일 때에도
언제나 당신과 함께했습니다.

어느 날 끔찍한 사고로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세상이 당신에게 등급을 매겨
유리벽에 가두었을 때에도
당신은 절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언제나처럼 머리맡에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지요.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사지를 움직이지 못해 품에 안을 수 없을 때
애정이 담뿍 담긴 당신의 눈길만으로도
한 없이 당신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순간들을,
그 거리의 불빛과 사람들,
계곡과 시냇물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국가가 당신에게 허용한
6시간의 도우미가 돌아간 후,
그 순간을 숨죽여 기다렸던
화마(火魔)가 스멀스멀 기어나와
홀로 남은 당신을 향해 다가오던 그 순간에도,
당신은 세상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버리지 않았지요.
커다란 주머니가 다 찬 다음에도
더 많이 가지려고 외면한 채 발버둥치는
병든 인간들을 바라보며
당신은 그들에게 등급을 매겨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탐욕과 질병을
자애로운 미소로 골고루 감싸주려고 했지요.

스틱을 입에 물고 간절히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그 시간의 무게에
당신의 가슴은 천길 낭떠러지로 향하고,
다섯 발자국을 넘지 못해
당신의 눈빛에서
점차 희망이 사라지고
대신 절망과 체념이 밀고 들어오던 그 마지막 순간에
당신은 머리맡에 있던 절 바라봐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똑같이
손을 맞잡고 힘차게 들판을 달리던
그 가슴 벅찬 시절을 회상하였지요.

하늘은 어둡고 칼바람은 매서운데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더 나은 세상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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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 장애가 있었지만 정신만은 한없이 맑았던 사람.
대한민국으로부터 1급장애인으로 등급 매겨졌지만 6시간의 간병인만 허용받고 나머지 시간은 홀로 방치되어 다섯 발자국을 넘지 못해 지난달 26일 화마(火魔)에 스러져간 33살의 아름다운 여인.
김주영씨의 명복을 빌며 고인의 영전에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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