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기억이 있다. 7년 전 형사합의부 부장판사를 할 때의 일이다. 자신의 20개월 된 딸을 폭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피고인에 대한 상해치사 사건을 다루었다.

피고인은 유부남과 동거하다가 딸을 출산하였으나, 평소 동거남과 시댁 측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해왔다. 사건 무렵, 동거남은 생활비도 주지 않은 채 가출하여 열흘이 넘도록 귀가하지 않은 상태였다. 피고인은 밤에 소주를 마시면서 신세를 비관하던 중, 딸이 잠에서 깨어 울자 충동적으로 딸의 머리를 방바닥에 수차례 내리찧어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합의과정에서 주심판사가 집행유예 의견을 냈다. 그래도 한 생명을 앗아간 범죄인데 집행유예라니, 실형이 마땅하지 않은가. 나는 주심판사에게 더 생각해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합의자리에 앉은 주심판사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설득해보라고 하였고, 주심판사의 차분한 말에 나는 설득되었다. 그 논거가 주심판사가 쓴 판결문에 나타나 있다. 다음과 같다.

“…피고인의 이 사건 범행은 자신의 딸의 죽음을 초래한 것으로 그 결과가 매우 무겁고, 그 범행 대상이 20개월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이라는 점에서 죄질이 결코 가볍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피고인이 이러한 범행에 이르게 된 동기나 과정을 살펴보면 범행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직 법률적인 이혼절차도 밟지 않은 동거남과 사실혼관계를 영위해 온 점, 동거남이 가정에 대한 확실한 책임의식을 갖지 않고 아내와 아이를 버려둔 점 등 불안정한 결혼 및 가정생활에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한 아이의 어머니인 피고인이 자신의 손으로 자식을 죽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 자신이 상당한 형벌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현재 피고인 자신도 회한과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피고인은 이 사건으로 구속될 당시 임산부의 몸이었고, 구속기간 중에 출산을 하여 이제는 또 다른 한 생명의 어머니가 되었다. 결국 위와 같이 피해자의 생명을 앗아간 중한 결과에 대하여는 범죄에 대한 정의의 실현 차원에서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나, 피해자의 아버지가 처벌을 원치 않고 있으며 피고인 및 새로 태어난 딸과 함께 새롭게 가정을 꾸려 책임지고 지키겠다는 의지도 보이고 있는 점, 새롭게 태어난 한 생명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두루 건강하게 커나가기 위하여는 어머니의 존재가 필요하고, 부모 모두가 함께하는 온전한 가정의 울타리에서 자라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 등과 위에서 살펴본 여러 정상을 참작하여 피고인에게 새로이 태어난 어린 딸을 잘 키우는 것으로 죽은 딸에 대한 그 책임과 속죄를 대신하도록 기회를 주어 새롭게 태어난 한 생명과 가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사회의 안정을 수호하려는 법의 정신과 목적에 맞는 것이라 할 것이다.”

옳은 결론이었다. 내심 감탄했다. 한 사람의 살아온 내력과 아픔을 아우르는 따스함, 그 주변인들과의 관계를 두루 고려하는 통찰력, 남은 사람과 새로 태어난 생명에 대한 다함없는 경외감, 그들의 앞날까지를 내다보는 혜안 등이 묻어나는 판결이었다. 나는 그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다. 타성에 젖어 기계적으로 판결해온 것이 아닌가 하며 스스로를 반성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때 일을 돌이켜보면, 한수 배웠다는 생각에 유쾌해진다.

최근 흉악범들에 대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하여야 하고 나아가 사형을 실제로 집행해야 한다는 국민여론이 높아졌다. 제주 올레길 살인사건의 피해자 유족은 살인범이 무기징역형에 그치면 법원 앞에서 분신자살하겠다는 경고성 글을 인터넷 블로그에 올렸다. 또한 수원 여성 살인사건의 오원춘에게 내려졌던 사형선고가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자 양형이유까지 거론하며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피해자 유족들의 상처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달리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범죄로부터 사회를 지키는 방법에는 사형제도 외에도 다양한 대안이 있고, 사형이라는 극형은 세계적 추세로 볼 때 폐지로 기울어진 지 오래다. 무엇보다 법관들은 한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릴 때 그야말로 온갖 양형인자들을 다 고려하여 고뇌에 찬 결론을 내릴 터인데, 이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가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 나는 앞서 언급한 유쾌한 기억을 쉽게 포기하기 싫다.

김소영 대법관은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양형기준 논란과 관련하여, “흉폭한 범죄자라고 해서 모두 사형을 시킨다는 것은 사형제가 갖는 생명권 박탈의 측면에서 신중히 봐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양형에 있어 장기자유형, 무기형, 사형 등의 경우 단순히 범죄 결과만 갖고 하는 게 아니라 피고인의 전 인생을 평가해 양형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너무 한 면만 보고 법관을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자제해 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참으로 시의적절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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