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제주 올레길을 걷다 살해당한 피해여성의 남동생이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 그는 “만약 범인이 (사형이 아닌-필자 주) 무기징역 판결을 받는다면 담당판사는 법원 앞에서 훨훨 불타고 있는 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인터넷 세계일보, 2012년 10월 20일)이라고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토막살해범 오원춘이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것에 대한 분노와 우려의 표현이었다.
그 전달인 9월, 세간의 여론과 관련해 외교부 당국자는 “사형제 문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면서 “(사형을 다시 집행할 경우) 명분 측면뿐만 아니라 국익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외교부는 사형 집행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고 있다”(인터넷 경향신문, 2012년 9월 7일)고 밝힌 바 있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이후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다.
다시 몇 해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2010년 7월, 대구지법의 한 부장판사가 우울증에 시달리다 투신자살을 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 게시판에 “기본적으로, 판사는 생산적인 직업이 아닙니다. 막말로 이야기 하면,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인터넷 동아일보, 2010년 8월 3일)라는 자탄의 글을 올렸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법조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물건들’을 앞에 놓고 어쩔 수 없이 기소하고, 변호하고, 판결한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며 살아가는 ‘직업병’을 앓는다. 남들은 외면하면 그뿐일 잔혹한 사건 기록과 진술도 한 자,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꼼꼼히 살펴야 한다. 그들이 머무는 법정은 어떤 곳일까? 이성적인 법규범이 지배하는 천국일까 아니면 끔찍하게 파괴된 이성의 잔해를 수습하는 지옥일까?
아예 법정 바깥의 근원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법은 하염없이 많아지고,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교회는 밤낮 없이 느는데, 우리를 경악하게 만드는 엽기적인 사건들은 왜 줄어들 줄을 모를까?

살아야 될 이유를 묻는 살인마
영화 ‘추격자’는 이 음울한 질문에 대한 절망적 묵시록이다. 따지고 보면 끔찍한 장면만으로 도배한 것도 아닌데 컬트 스릴러적인 오싹한 분위기가 관객을 압도한다. 흉악한 범죄기록을 앞에 둔 법조인처럼 나도 이 음울한 영화를 꼼꼼히 읽어야 한다는 게 좀 괴롭다. 그래도 줄거리는 설명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주인공 엄중호는 보도방을 운영하는 전직 형사다. 그런데 그가 데리고 있던 여자들이 잇달아 사라진다. 엄중호는 방금 한 손님에게 김미진을 보냈는데, 그 손님의 전화번호와 사라진 여자들이 마지막으로 통화한 전화번호가 일치하는 걸 알아챈다. 급히 김미진에게 주소를 문자 메시지로 보내라 하고 뒤쫓는다. 하지만 김미진은 이미 연쇄살인범 지영민이 쳐놓은 덫에 걸려든 뒤였다. 휴대폰은 불통이고, 김미진은 도살장 같은 화장실에서 손발이 묶인 채 죽음의 문턱에 선다. 살인마 지영민이 마치 철학가처럼 희생자 김미진에게 묻는다.
지영민: “왜 니가 살아야 되냐구, 말해봐! 없어?”
김미진: “(울며) 딸이 있어요.”
지영민: “(잠시 고민한 뒤) 사람들은 니가 없어도 모를 거야. 찾는 사람도 없을 거구.”
이 세상에 사라져도 사라진 것을 모르고, 찾는 사람도 없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법과 공권력은 정말 모든 사람을 똑같이 지켜주는 것일까? 종이 위 잉크로 적혀 있는 법은 우리에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이코패스 살인마도 결코 김미진 대신 검찰총장이나 재벌총수의 딸을 살인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그런 사태야말로 너무 쉽게 간파당한 현실의 법이다.

지상의 볼거리와 경쟁하는 지하의 생존
김미진의 소재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엄중호뿐이다. 김미진이 사라지면 그녀에게 선불로 나간 돈도 사라진다. 그렇게 시작한 추격이지만 점점 김미진을 위한 인간적 마음이 자란다. 먹고 사는 것이 불법인지라 경찰에 합법적으로 수사를 요청할 수도 없다. 친하게 지내는 선배 이 형사에게 개인적으로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지금 서울시장 오물투척사건 때문에 바쁘다. 서울시장에게 오물을 투척한 장본인이 끌려가는 차 속에서 분통을 터트린다.
“왜 하수도 고쳐달랬는데 상수도를 뜯어, 사람 씻지도 못하게.”
하수도의 고장인지 상수도의 고장인지 별 관심조차 못 받는 밑바닥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시장에게 오물이라도 투척해야만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주목을 받는다. 밑바닥 세상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경찰에겐 오물투척사건의 책임을 덮기 위한 경쟁적 계기라도 있어야 비로소 중요해진다.
망원동이라는 정보밖에 없는 엄중호는 차를 탄 채 골목길에서 김미진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접촉사고가 났는데 그게 지영민이 모는 차였다. 엄중호는 피 묻은 옷을 입은 지영민이 범인임을 직감하고 추격 끝에 그를 붙잡는다. 기동수사대에 넘겨진 지영민은 실없는 농담하듯 범행을 털어놓는다. 엄중호는 지영민을 폭행해 사체유기장소를 알아내지만 그것도 거짓이다.
김미진은 겨우 살아있었다. 어떤 부부가 그 집을 찾아와 지영민을 방해한 덕분이었다. 불행히 그들은 목숨을 잃었다. 김미진이 깨어나 어렵사리 탈출에 성공할 즈음 지영민은 증거불충분으로 손쉽게 풀려난다. 김미진은 동네 입구 가게 안방에 피신해 경찰을 애타게 기다린다. 하지만 순찰차의 경찰은 낮잠중이다. 담배를 사러 그곳에 들른 지영민에게 가게 주인여자는 오히려 도움을 요청한다. 가게 주인여자와 함께, 김미진은 그곳에서 끝내 잔혹하게 살해된다.

지옥에서 바라보는 천국의 모습
엄중호는 온통 피 칠이 된 가게 방안에 홀로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언덕 높은 곳의 붉은 십자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지옥에서 바라보는 천국의 이미지다. 이 영화에는 밤의 도시에 붉은 십자가가 선명한 미장센이 몇 번 반복돼 나온다. 영화가 우리에게 묻는다. 도대체 이 잔혹한 세상 속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엄중호는 지영민이 잠시 머물렀던 방안 벽지 속 예수형상의 기괴한 그림과 실종된 부부 집의 교회달력에서 실마리를 얻어 망원교회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엄중호는 건설업을 하는 집사 박동원이 교회증축을 해줄 때 지영민을 데려왔다는 사실과 그곳 예수형상 십자가도 지영민이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엄중호는 박동원의 집을 찾는다.
집사 박동원의 집이 바로 지옥이었다. 지영민은 비를 맞으며 부부의 사체를 마당에 묻고 막 집을 나서려다 엄중호와 맞닥트린다. 격투가 벌어지고 엄중호가 가까스로 지영민을 제압한다. 그리고 망치로 내려치려는 순간 경찰이 들이닥친다. 이 형사가 타이르듯 말한다.
“엄중호, 그거 내려놔. 중호야, 그만해라. 응?”
엄중호는 분을 못 이겨 망치로 내려치려 하지만 제압된다. 국가는 사적 복수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는 극히 무능하지만 사적 복수를 금지하는 데는 아주 유능하다. 김미진의 딸 은지는 골목길에서 엄마를 찾는다고 뛰다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에 치어 입원했었다. 엄중호가 은지를 찾는다. 잠들어있는 은지의 조그만 손을 잡고 지친 몸을 벽에 기대며 창밖을 바라본다. 차갑게만 느껴지는 콘크리트 도시가 절망적이다.
끔찍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사형제 시행에 대한 여론이 비등하다. 나도 우리사회가 대책 없이 사형제를 완전 폐지할 만한 역량이 있는지 회의적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 의견과 무관하게, 만약 사형제를 완전 폐지한다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범죄의 결과보다는 원인 치유에 온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소한 공권력의 무능에 대한 치유만이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아져야 할 것이다. 천국을 그저 꿈만 꾸고 있는 지옥이 되지 않으려면.
 

/  김욱 서남대 교수영화 속의 법과 이데올로기’ 저자
  wkimline@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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