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의 것이긴 하나 현실감이 적지 않게 담긴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법관이 재판을 진행하면서 원·피고 대리인 중 한쪽에 유난히 편파적으로 유리하게 해주었다. 증거의 채택에 있어서 한쪽의 신청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쪽은 신청취지를 잘 밝히지 않아도 그대로 채택하였다. 불리한 처지에 빠진 변호사는 화가 나기도 하려니와 뒤쪽 방청석에서 보고 있을 당사자를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참다못한 그는 드디어 법원행정처에 재판장이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에게 부당한 처우를 해줌으로써 공정한 재판진행을 하지 않았다고 진정을 하였다.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모르긴 해도 아마 법원행정처에서는 대충 이런 내용의 답변을 하지 않을까 싶다. “진정의 사안은 현재 재판진행 중의 것으로 간섭할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양지 바랍니다.” 그 대답은 결국 사법의 독립은 민주법치국가에서 지고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이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사법부 당국 그리고 법관 사회의 오래되고 충직한 신념의 토로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시민사회는 또 이런 전통적 관념의 표시에 대해 긍정적이고 너그러운 신호를 보내왔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에서는 사법의 독립에 배치되는 여하한 행동도 그 자체로서 위험하고 잘못된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사법의 독립을 단순히 간섭의 잠재적인 원천에서 절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부패행동에 대한 책임성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인식이 있다. 그 독립이 사법의 구성원들에게 잘못된 특혜를 주고, 광범한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사법의 공정한 작용을 차단시키며, 사법부를 사회적 수요에 반응하지 않는 딱딱하고 거친 성격을 띤 기관으로 변모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학자들의 이론인데, 우리는 여태 이러한 면에서의 고찰을 너무나 소홀히 해온 감이 없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사법의 독립은 그 자체로 고유한 헌법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독립적인 사법의 운용을 통해 공정한 재판제도를 확립함으로써, 국민의 인권보장을 기하려고 하는 데 그 존재의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 사법의 독립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사법과 재판의 신뢰성 확보를 위해 사법의 독립이 아주 중요하긴 하나, 재판을 불편부당하고 공정하게 해나가기 위해서는 다른 원리의 기둥을 하나 더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사법의 책임이다. 사법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위해 국민의 권익을 지키고 국민에게 억울한 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할 책무를 진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사법의 책임은 사법의 독립과 함께 사법과정의 전편에 철철 흘러야 한다. 우리는 법원과 검찰이 국민에 대한 책임성을 소홀히 하는 견고한 관료적 독재자(oligarchy)로 변하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점검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끊임없이 사법의 독립이 주창되어왔다. 이것이 온전한 형태로 이루어지기만 하면 부당한 정권의 간섭이 사라지고, 사법의 구성원들은 국민을 위해 최상의 아름다운 과실을 내어놓을 수 있다는 청사진이 제시되었다. 반면 사법의 책임이라는 개념은 어디에서건 찾아보기 힘들었다. 1971년 이후 현직 판사들에 의한 집단행동인 ‘사법파동’이 네 차례나 일어나고 김영삼 정권 이래 노무현 정권까지 15년간의 세월에 걸쳐 민주화의 핵심과제로 사법개혁작업이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법의 책임은 외진 귀퉁이에 숨어있었다.
처음의 예로 돌아가서 말을 이어보자. 사법의 독립은 사법의 책임이 운위되는 장에서는 일정 부분 축소되고, 이런 경우 사법의 책임이 보다 선명하게 부각되어야 한다. 법원행정처에서는 과감하게 사안의 실태를 조사하여, 과연 진정의 내용이 사실로 드러나면 그 법관에 대한 징계의 절차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말로만 ‘전관예우’를 없애겠다고 공언(公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해온 헛소리(空言)의 반복에 불과할지 모른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달라. 진정으로 전관예우를 없애 사법의 신뢰를 구축하겠다는 확실한 의지를 말이다.
/ 신평 경북대 교수 lawshin@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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