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사는 동안 영혼은 언제나 가난한 법(대산세계문학총서 중 플라토노프 작 ‘예피판의 갑문’에서).
“요즘은 무얼 들으세요”라고 물으면 선배 한 분은 으레 “현(악) 4중주만 듣지. 오디오도 음반도 스트링 콰르텟만 듣게 싹 정리했지”라고 하면서 “모노시대의 누구의 판이 역시 최고지”라는 추천까지 합니다. 이런 분들의 경지까지 이르지 못했더라도 관현악, 협주곡, 독주곡, 성악곡, 바로크 음악을 거쳐 오페라까지 오고나면 이제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면서 음악을 들어야겠다는 자기 주관이 서게 될 때 찾는 곡이 바로 실내악입니다.
실내악은 연주자나 감상자가 소수이고 이름 그대로 실내에서 듣는 음악이므로 공연성이 약합니다. 공연성이 약하다는 의미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기능이 극도로 축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음악은 연주를 통하여 드러나므로 공연이 될 수밖에 없고 요즘 말로 엔터테인먼트의 하나입니다. 엔터테인먼트성이 적은 실내악은 혼자서 아니면 소수가 조용히 즐기는 지극히 이기적인 장르입니다. 실내악을 들어야 하는 구실을 찾다가 서두의 이 문구를 보고 바로 이거다 생각했습니다. 세상사에 지친 영혼을 스스로 위안하기 위해서도 음악애호가는 실내악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실내악의 대표격인 현 4중주는 대부분의 작곡가가 만년이 되어 자기 음악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손을 대므로 대부분의 곡이 하르트만이 말한 바와 같이 작품의 구조를 존중하고 속으로 파고 들어가 복잡한 전체를 관찰한 뒤에 감상에 몰두하게 만드므로 관조와 침잠이 동반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이 실내악의 본령이고 속성입니다. KBS1 FM이 한밤중인 새벽 1시에 실내악만 방송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작곡가도 실내악을 통하여 인생관이랄까 주관을 구현하려고 하기 때문에 명곡이 많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는 경박하게 그려져서 그의 음악도 가볍게 들리고 또는 치료용으로 사용되는 정도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대표적인 3대 교향곡 및 단조의 25번과 35번, 혼 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 미사곡들은 음영이 깊게 드리워져 묘하게 슬프면서도 애상에 빠지지 않게 하는 명곡입니다만 특히 실내악에서의 고뇌와 우수는 적당한 깊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바이올린 소나타와 피아노 중주, 현 중주도 모두 훌륭하지만 널리 알려지지 아니한 곡으로서 케겔슈타트 트리오로 불리는 피아노 3중주, 클라리넷 협주곡에 가려진 클라리넷 5중주와 디베르티멘토 K563을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드보르자크에 이어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음악사상에 오르는 대가는 실내악의 대표격인 현 4중주에서 독자의 어법을 드러냅니다. 하이든은 밝고 경쾌하고, 베토벤은 웅장·격렬하며, 슈베르트는 단순하되 가볍지 않으며, 브람스는 떫으면서 고독하고, 드보르자크는 토속성을 풍기며, 쇼스타코비치는 희유적입니다. 그때 그때의 정황에 따라 곡을 고를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절대적인 기준은 결코 아닙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은 그의 특징과는 달리 이름 그대로 밝게 시작하지만 2악장에 들어가면 왠지 눈물이 나온다면서 베토벤이 이래서 악성임을 실감한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소나타, 피아노 3중주와 18곡에 이르는 현 4중주는 베토벤이 교향곡보다 또는 그만큼 실내악에도 집중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실내악은 역시 브람스의 본령이라고 합니다. 혼 3중주, 클라리넷 3중주와 클라리넷 5중주는 혼과 클라리넷이 실내악 전용이 아닌가할 정도로 감탄하게 만듭니다. 브람스의 속성과 달리 밝고 간결한 실내악이 있는데 현 6중주 1번입니다. 바이올린, 비올라와 첼로를 각 2개씩 사용한 독특한 구성인데 2악장이 심금을 울립니다. 브람스가 아가테와 약혼하였으나 결혼에 자신이 없어 파혼을 알린 후의 심경을 그린 현 6중주 2번과 대조됩니다. 브람스가 가장 뛰어나리라고 생각되는 현 4중주 세곡이 베토벤의 그것에 버금가지 못한 게 유감이고 의문입니다.
가을은 자신을 추스르는 계절로서 실내악을 듣기에 제격입니다.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이지만 욕심을 내지 말고 모차르트, 베토벤과 브람스 이 세 사람의 실내악만 가지고도 올 가을을 나기에 충분합니다. 실내악의 음반이 쉽게 구할 수 없고 인터넷 음원은 거의 반세기 전의 것이라는 점에서 불만이 있을 수 있으나 SP시대의 연주에 명연이 많고(명연이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볼 것임) 녹음도 전문가가 아닌 이상 감상에 문제가 없습니다. 조금 돈을 들이면 메이저 음반사 사이트를 이용하면 됩니다.
 

/ 하죽봉 변호사 jbha777@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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