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인간세’ 편에는 공자와 그 관련된 인물들의 우화를 통하여 유가(儒家)에 대한 나름 세련된 공격이 있다. 그중 안합과 거백옥의 이야기에 주목해보자. 춘추시대 말경, 노나라의 명사 안합은 위나라로 여행을 했다. 위나라 군주 영공은 안합을 극진히 대접하고 아들의 스승으로 삼으려고 했다.

안합은 영공의 아들이 난폭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여서 백성들이 무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장이 곤란하여 위나라의 대부인 ‘거백옥’에게 의논하러 간다. 이에 거백옥은 명심해야 할 일을 사마귀, 호랑이, 말에 비유해 알려준다.

여기에서는 사마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대는 사마귀에 대하여 모르오? 사마귀란 놈은 화가 나면 가냘픈 앞다리를 벌려 수레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다오. 그놈은 그걸 막을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모르면서 제 능력이 뛰어나서 수레를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건 자기 힘을 너무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라오. 그러니 경계하고 조심하시오. 그대의 재주를 내세워 천성적으로 덕이 부족한 왕자의 심기를 자꾸 거스른다면 그대도 수레를 막는 사마귀처럼 위태로워질 것이오!”
사마귀가 수레를 막는다는 뜻의 당비당차, 당랑거철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 이야기도 널리 전해지면서 뜻이 와전되어 지금은 남을 조롱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사자성어에는 민중의 공감대와 문화적 전통이 반영되어 있으며, 오랜 경험을 통해 씻기고 제련된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런데 사자성어들끼리도 서로 의미가 모순되는 일도 흔하다. 우공이산(우공이 산을 옮기다), 수적석천(물방울이 떨어져 구멍을 뚫는다), 철저마침(쇠공이를 갈아서 바늘을 만들다) 등 작고 약한 것으로도 크고 강한 것에 대항할 수 있다는 뜻의 긍정의미도 있는가 하면, 당비당차, 이란격석(계란으로 바위를 치다), 비부감수(개미가 나무를 흔들려고 하다)처럼 제 능력도 모르고 함부로 큰일에 덤벼드는 것을 조롱하는 뜻의 부정적인 사자성어도 있다.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의 사자성어는 가소로운 이들을 조롱하기도 하지만 한편 냉정한 사고와 냉철한 이성을 깨우쳐주기도 한다.

그래서 장자의 이 글을 잘 보면 사마귀가 오로지 우스꽝스럽고 미련한 역할을 부여받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자기 몸을 희생해 강자에 저항하는 약자의 기개와 결연함이 느껴진다. 비록 장자도 수레를 막는 사마귀처럼 되지 말라고 충고하기는 했지만, 세상이나 상대에 맞설 때의 이야기이다. 다음으로는 상대를 길들이는 호랑이의 이야기인 양호자와 상대를 사랑할 때의 언사인 애마자의 비유가 등장한다.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지면관계상 줄일 수밖에 없어서 무척 아쉽다.

수레를 막는 사마귀가 자기 능력을 과신하여 마구 덤벼드는 형국으로 볼 수도 있지만, 득실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로지 옳고 그름만을 기준으로 판단하였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사마귀는 수레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은지, 수레가 사마귀 나라의 영토를 침범하는 것인지 여부만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사마귀의 힘으로 수레를 막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막는 게 옳은지만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자기 집과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집채만한 탱크가 조국의 영토를 무참히 짓밟는 걸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비분강개와 대의를 위한 용기에 비장함이 더해지면 이야기는 아름다운 미담으로 변한다. 이 세상 모든 사마귀가 다 몰려와 수레 앞에서 저항한다면 어쩌면 수레바퀴의 전진을 막고 사마귀 나라의 영토를 수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자는 사마귀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 사람들, 특히 공경사대부의 엘리트들에게 자기 능력을 과대평가해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 같다. 실력은 보잘것 없으면서 수레를 막으려는 사마귀처럼 힘든 일에 무턱대고 달려들다가는 수레바퀴 아래 사마귀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충언이었다. 백면서생의 위치에 놓였던 이들의 팔이 탱크나 수레는 고사하고 강아지나 토끼, 쥐조차도 막을 수 없을 만큼 무력하다는 사실이 슬프기 그지없다. 자신의 팔이 그저 사마귀 앞다리라는 걸 똑똑히 아는 사람들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작고 약한 선량함이 강대한 흉악함을 만나면 정의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이 억눌리고 사악함이 온 세상을 휩쓸게 된다. 이런 ‘인간세’를 만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력으로는 권력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인을 이루고 의를 좇으며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용감하게 저항해야 할까, 아니면 순순히 따르고 온순하게 대하면서도 위태로움을 안고 살아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허물없는 경지에 다다라야 할까? 인간사 대부분은 인간 사이의 일이요, 관계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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