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 사건만을 따로 진행하는 조정실에서의 재판과 달리, 법정재판은 여러 사건 당사자를 한꺼번에 같은 법정에 모아서 진행하게 된다. 이럴 경우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건의 많은 당사자들을 위해서라도 법정 안의 재판이 효율적으로 진행돼야 하는데, 현재의 재판 진행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문제다.

어떤 경우에는 심하게 말해서 ‘시장판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법정에는 여러 명의 법원 인력이 있는데, 항상 재판장 혼자만 바쁘고, 나머지 직원들은 너무 여유가 있다. 결국 자질구레한 절차까지도 재판을 시작하고 나서 재판장 혼자 처리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진행에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신뢰받는 재판이 되기 위해서는 당사자에게 사건 핵심에 대해서만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적절한 시간을 주는 등 법원의 적절한 응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법정 인력과의 역할 분담이 전혀 없이 재판장 혼자서 원맨쇼를 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재판진행시스템에서는 질 높은 재판이 애당초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보자.
“전번에 갑5호증까지 제출했으니 이번에는 갑6호증부터 번호를 매겨 증거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번에도 갑1호증부터 제출했으니 법원에서 증거번호를 다시 정리하겠다.”

절차에 익숙지 않은 당사자 본인의 증거정리 미숙을 재판장이 지적하는 말이다. 거의 모든 재판마다 빠지지 않고 재판장이 말하게 되는 대표적인 상투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건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바쁜 법정에서 왜 이런 하찮은 문제로 재판장이 시간을 낭비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것들은 재판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만큼 재판 전에 미리 담당 직원이나 주심판사 등을 통해 정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으로는 안내문이나 대법원 홈페이지를 통해 이와 관련한 증거정리 요령 동영상, 가상의 소송기록책 게시 등을 통해 절차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기록이 하나뿐이었던 과거의 종이소송시스템과는 달리, 열람 권한이 있는 여러 사람들의 동시적인 기록 접근이 가능한 현재의 전자소송 시스템 아래서는 현재의 법정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개선 노력 없이 ‘오랜 관행’에 따라 재판장의 법정 안내가 수십 년째 반복되고 있는 데다, 최근 들어서는 법정 언행과 친절을 강조하는 사회분위기에 편승해서 재판장이 이런 소소한 절차에 대한 친절한 설명에 더 신경을 쓰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런 과잉 친절은 ‘사법 서비스의 품질’ 면에서는 오히려 퇴보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역할 분담이라는 측면에서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다.

최근 의정부지방법원에 갔을 때 법정경위로부터 ‘어떤 사건에서, 어느 쪽에, 어떤 자격으로 참석한 것인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여타 법원과는 달랐던 법정경위의 그런 질문에 처음에는 의아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가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법정경위는 개별사건의 출석자들을 파악해서 진행 중인 사건이 마무리되면 쌍방 출석한 사건 중에서 선착순으로 진행할 다음 사건을 재판장에게 미리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재판장은 재판 진행순서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을 수 있어 다른 법원과 달리 재판순서를 정하는 것과 관련된 시간낭비를 완전히 줄일 수 있었다. 비록 조그만 역할 분담이었지만 매우 인상적이었다.

재판진행과 관련된 이런 종류의 개선작업은 재판장의 사건 당사자 호명 등 재판장이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되는 절차 전반에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필요하다면 소송법에 대한 개정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법원도 ‘오래된 관행’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서 재판도 국민에 대한 서비스라는 시각으로 소송절차 전반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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