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연 변호사

가끔씩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그녀의 얼굴은 내 안 저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가 아주 잠깐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곤 한다. 때로는 그 얼굴이 나타났다는 사실조차 인식하기 어려울 만큼 찰나의 순간이다. 마치 머릿속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한 번 터지는 것처럼 그녀의 이미지가 내 의식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다.
몇 년 전, 친구와 체코 프라하 여행을 했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프라하 중심가를 거닐다가 지친 다리도 쉴 겸 길 모퉁이 작은 카페에 들어섰다. 그때 그녀를 발견했다. 백발과 금발이 섞인 장신의 남성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동양계로 보이는 그녀는 까만 숏커트 머리에, 동그랗고 짙은 색의 알 귀걸이를 하고, 청바지에 헐렁한 흰 셔츠를 맵시있게 받쳐 입은 모습이었다. 엷은 화장 사이로 드러난 눈가의 주름으로 보아 한 40대 후반의 나이라 짐작되었다. 그녀는 주로 듣는 쪽이었고, 내게 등을 지고 앉은 남자의 말에 이따금 맞장구를 쳐주었다. 미인형은 아니지만 따뜻한 눈매가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였을까?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울컥했다. 동시에 뭐라 말할 수 없이 편안하고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한마디로 그녀의 존재는 감동적이었다.
그때 내가 왜 그런 강렬한 감정을 느꼈을까 지금도 간혹 궁금하다. 감성이 한창 열려있는 여행지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노란 머리 푸른 눈의 유럽인들 사이에서 도드라진 동양인의 신비로움이 그런 느낌을 자아냈을 수도 있다. 혹은 전생에 그녀와 내가 어떤 인연을 맺었는데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잠깐 스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아무것도 모르는 낯선 이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데미안의 어머니를 첫 대면한 주인공 싱클레어가 느낀 감정이 그런 것이었을까.
사실 사람에 대한 느낌은 말보다, 이성보다 훨씬 빠르다. 두 사람의 기가 만나 공명하면서 순식간에 서로의 모든 정보가 공유된다. 다만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프라하에서 마주친 그녀와의 짧은 몇 초의 순간에도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내게 전해져 왔던 것 같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전 생애를 다하여 나에게 왔다. 눈빛 하나에도 주름 하나에도 그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어떤 이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슬픔이 느껴졌다면 그 생의 어느 날이 슬펐던 것이고, 평온한 표정 가운데 아픔이 보였다면 그가 겪은 이별 한 자락이 아직 드리워져 있는 까닭이다. 때로 어떤 이의 얼굴만으로도 감동을 받았다면 그가 이겨낸 고통과 아픔의 무게가 컸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들은 한 장의 생생한 이미지로 내 안에 기억되는 것 같다. 오래 알고 지냈든 혹은 잠시 잠깐 스친 인연이었든, 결국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생각과 감각들이 영화의 스틸컷처럼 응축되어 남겨지게 된다. 그 이미지는 잊혀진 것 같다가도 불현듯 의식 위로 떠올라 그를 다시 내게 불러들이곤 한다.
요즘도 나는 카페에 들어서면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여행을 떠날 때면 마주치는 사람들을 눈여겨 살펴본다. 각자의 세계에서 대화를 나누고, 책을 읽고, 생각을 하는 그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또 다른 얼굴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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