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판의 위험은 법관의 숙명이다

한해 한해 법조인으로서의 경력이 더해 가면서, 특히 변호사로서 재판을 받는 세월이 길어져 가면서 새롭게 느끼게 되는 몇 가지 현상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 법률가들이 오랫동안 의심 없이 받아들여 온 민사·형사 재판의 기본원칙들, 즉 수학으로 비유해 말하자면 공리나 정리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개념에 대하여 의문을 품어보게 되는 것이다.
대학에서 법률을 배우게 되면서부터 민사재판의 기본원칙은 당사자주의이고 변론주의이며, 사실관계가 불분명할 경우 판사는 입증책임분배의 원칙에 따라 재판하면 된다고 알아왔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자신의 일에 대하여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고, 또한 자기 일은 자기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이 가장 능률적·효과적이라는 생각에 기초하는 것이다. 즉 공산주의적 사고보다는 자본주의적 사고의 우월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특히 민사소송을 수행하는 당사자들을 보면 비논리적·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또한 누구나 자기 일을 합리적이고 최선의 방법으로(변호사의 도움을 받은 경우를 포함하여) 처리하지 못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따라서 법관이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합리성 기준만을 내세워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자칫 진상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 당사자가 비이성적인 행동과 말을 하였을지라도 그것이 진실인 경우가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변론주의와 입증책임분배법칙 등 민사재판의 기본원칙은 진실발견을 위한 ‘차선책’이지 ‘최선책’은 아니고, 진실발견을 최고목적으로 한 원칙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오판의 위험성을 당사자 본인의 잘못으로 귀착’시키고 ‘법관에게는 면책의 길을 열어주는’ 면이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각도를 바꾸어 형사재판의 경우를 보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의심스러우면 무죄, 위법수집증거의 배제, 자백의 증거능력제한, 전문증거배제 등 어찌 보면 형사재판에서는 진실발견 자체는 어느 정도 포기하고, 인권보호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는 헌법적 결단이고 역사적 선택인 만큼, (어쩌면 죄를 지었을지도 모를) 피고인이 부당한 이득을 보아도, 또한 (피의자의 숨소리에서 유죄를 확신한) 검사가 아무리 억울하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역시 판사의 오판에 의한 유죄판결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이처럼 법관은 그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그 판결이 진실에서 멀어질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이 그의 숙명이라면, 법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과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진다.
먼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첫째, 법정에 나타난 모든 자료들이 전부 진실을 대변한다고 쉽게 속단해 버려서는 안 된다. 앞서 본 형사재판의 기본원칙 때문에, 혹은 민사재판 당사자의 한쪽의 능력이 모자라거나 또는 출중하기 때문에 진실에서 어긋난 자료들이 제출될 수 있다. 나아가 당사자들의 말이나 주장이 비록 ‘비논리적이기는 하지만 진실에 부합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따라서 재판에 나타난 자료를 철저히 논리적·합리적 기준으로 판단하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판사로서 존경받을 태도이기는 하나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다.
둘째는 입증책임분배의 법칙이라는 것이 진실발견을 위한 ‘차선책’이기 때문에 ‘너무 일찍 이 원칙으로 도피’해 버려서는 안 된다. 즉 진실발견을 위해 여러 가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셋째는 하급심 법관으로서 내가 내린 판결이 상급심에서 깨지지 않았다고 해서 사실인정이 잘된 것으로 자만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상급심으로 갈수록, 사실인정에 관한 한 진실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법관이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을 수밖에 없다.
첫째, 법관은 진실발견을 위한 최대의 수단인 ‘자유심증주의’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논리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무언가 핵심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 신이 준 재능을 잘 이용할 필요가 있다.
둘째, 사실인정에 관한 한 법정에서건 판결문에서건 말을 아끼고, 꼭 필요한 말만 할 필요가 있다. 말이 많아지면,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당사자에게 책을 잡힐 위험이 높다.
결론적으로 법관이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참을성 있게 당사자의 말을 들어 주는 것, 둘째는 사실판단이 아닌 법률판단·가치판단에 주력하는 것이다. 최고법원에 헌법판단·법률판단만을 하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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