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변호사 중재 실력과 함께 커왔을 뿐”

너무 성공한 것처럼, 이제 갓 쉰살인 변호사가 너무 다 이룬 것으로 보일 때 무엇을 물어봐야 할까? 오히려 그게 걱정이었다.
김갑유 변호사.
국제중재 부분에 있어 자타공인 국내 최고임을 넘어 미국중재협회(AAA)의 상임위원, 런던국제중재법원(LCIA),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 상임위원 등 세계 3대 국제중재기구 상임위원으로 모두 선임되는 세계 최초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청년변호사들이 가장 배우고 싶어 하는 롤모델, 김 변호사를 만나면 그의 성공 이유를 캐내야겠다고 다짐하며 법무법인 태평양의 접견실에서 만났다.
“대구 태생이시죠?”
“아, 네. 뭘 그런 걸. 고조 때부터 본적인 대구 종로 약령시 부근에서 살았습니다. 2남2녀의 막내로 사랑을 많이 받고 컸죠. 형님은 한의사를 하고 계신데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한의사를 하라고 많이 권유하셨어요. 그땐 한의사가 별로 인기도 없을 때인데도 말입니다. 제가 판사가 되기를 원하셨던 아버지가 갑자기 고1 때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꼭 판사가 돼야 한다 결심했었죠.”
그는 사법시험을 두 번 치렀다. 대학 3학년 때 처음 치른 1차 시험이 떨어져 4학년 때 1차를 준비할 때 2차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동차로 덜컥 합격해버렸다. 300명 중에 200등 정도라 판사임관이 어렵겠다고 생각해 다시 시험을 치렀다. 그가 첫 번째 합격으로 연수원에 들어갔더라면 판사가 됐고 국제중재 전문 변호사 김갑유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연수원 2년 차일 때 판사임관 기준이 바뀌었고 연수원 성적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됐으니까. 두 번째 시험으로 들어간 연수원에서 그는 수료 당시 임관순위가 2번째였다.
대학원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하게 된 아르바이트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지금은 광장이 된 한미합동에서 리서처로 일하다 ‘눈을 뜨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야말로 ‘이런 비즈니스가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시보를 하면서 판사, 검사 일을 겉핥기로나마 알고는 있었는데 당시로선 생소한 국제업무를 접하니까 ‘이게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구나’라는 걸 알겠더군요. 내성적이긴 한데 적극적이랄까,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이 컸거든요. 영어를 잘하는 것도,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닌 제가 왜 그랬는지…. 아들이 판사가 되기를 기대하신 홀어머니를 비롯해서 주변의 반대가 무척 심했어요. 다들 저를 걱정하셔서 그러신 것이었지만 참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서울대 법대 81학번이다. 맞다. 졸업정원제 1세대. 160명 정원이 300명으로 갑자기 늘어나고 정원미달사태가 났다. 340점 만점에 컷 라인이 186점. 80학번들이 후배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81학번. 그가 고3이던 여름, 전격적으로 대학입학 본고사가 폐지되고 졸업정원제가 도입됐다.
“이래저래 운이 좋으신 거 같아요.”
“네, 맞습니다. 법조인 전체가 운이 좋죠. 이 길을 가게 허락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운이 너무 좋은 겁니다. 국민에게 너무 많은 혜택을 받고 과도한 기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어떻게 돌려 드려야 하나’ 생각합니다. 국가경쟁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학창시절에 우수한 인재가 덜 갔던 분야, 스포츠·엔터테인먼트 분야가 가장 선두에 서 있는 반면 많은 혜택을 누리고 공부 잘한다고 추켜줬던 법조 분야 경쟁력이 취약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아이러니죠. 국내에서 가장 경쟁력 있다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우리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반성할 때가 있습니다. 미국, 영국 등 세계적 기업에는 자국 변호사의 도움이 배경으로 있습니다. 법률서비스의 지원, 특히 영국의 경우는 자국 변호사의 세밀한 도움이 없었다면 세계시장을 주도할 수 없었을 겁니다.”
국제업무를 하고 있는 변호사들을 만나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다. ‘한국변호사의 우수성’, 세계 어디를 내놓아도 일류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우수한 인재에다 지리적 이점, 한국기업이 세계로 뻗어 가고 한류문화가 전파되고 있어 아시아의 법률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아지고 있다. IBA(세계변호사협회) 아시아지역 사무소가 서울에 오게 된 것은 김갑유 변호사 등 국제업무를 활발히 하는 변호사들의 힘이 컸다.
“한국은 법원이 믿을 수 있고 인권상황도 좋은데다 국제화가 잘 되어 있어 경쟁력이 있습니다. 일본이 법률시장을 먼저 개방했다고는 해도 실질적 수준은 굉장히 떨어집니다. 우리는 대륙법계 국가인데도 미국법을 공부하고 미국변호사자격을 가진 ABA(미국변호사협회) 회원이 1000명이 넘습니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실현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스탠다드를 만들어 공급해야 합니다. 일본이 아시아 법률시장에 진출하려고 하면 침략국가였기 때문에 심리적 저항감이 엄청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한류에 대한 호감, 침략한 적이 없는 역사 등으로 굉장히 유리한 지점에서 진출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전 국민이 그 분야에 대해 걱정할 때 세계적인 수준이 된다고 생각해요. 스크린쿼터 축소로 한국영화가 고사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한국영화, 지금 세계적 수준이잖아요. 할리우드에 대적할 만한 영화산업국가로 성장했죠. 의료인구 과잉으로 걱정이 많았는데 지금 각국에서 수술받으려고 오는 의료강국이 됐죠. 이젠 법조를 걱정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의 달변은 한없이 이어져 하루 종일 인터뷰를 해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그의 경험과 지식은 나눌수록 커지는 것 같다. 실제로 그는 세계를 누비는 와중에도 지방 로스쿨 강연과 학회활동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성공한 전문 변호사라는 점이 아니라 나눌 줄 안다는 점이다. 판을 키워야 내 파이도 커진다는 걸 일찌감치 감지한 영리함, 그건 어디서 온 것일까?
김 변호사는 국제중재분야에서 활약하는 장승화 서울대 교수, 김기창 고려대 교수, 김&장의 윤병철, 세종의 김범수, 율촌의 이영석 변호사와 대학 혹은 연수원 동기다. 친구들을 매력적인 국제중재 분야로 끌어들였고 경험을 공유했다. 장승화 교수와 함께 ‘국제중재실무회’를 창설했다. 한해 두해 쌓이며 로펌 변호사, 교수들을 모아 같이 공부하고 공유해 성장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IMF 이후 M&A 열풍이 지나간 자리 쏟아지는 중재사건들이 그들의 실무경험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파워그룹이 형성된 것을 보고 일본과 유럽이 정말 부러워한다고.
“식당이 잘 되려면 외따로 혼자 해선 안 돼요. 먹자골목이 형성되고 소문이 날수록 잘 되는 거죠. 우리나라가 잘 돼야 제가 잘 되는 겁니다. 제가 처음 중재업무를 시작하던 10여년 전은 중국, 일본이 중재업무에서 막 자리를 잡아가려고 하던 시기였는데요, 그때 일하던 사람이 지금도 혼자 일하고 혼자 전문가입니다. 그 밑에 후계자가 아무도 없어요. 저는 이게 혼자 잘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10년 전에 우겨서 ‘국제중재팀’을 회사 안에 만들었어요.”
그게 2002년의 일이다. 오는 6월 15일 국내최초로 중재팀을 꾸렸던 법무법인 태평양의 중재팀 10주년을 기념해 ‘서울 Arbitration Lecture’를 개최한다. 공익법인을 만들어 소리 없이 사회환원사업을 해오는 태평양답게 로펌 명칭도 빼고 학술회의로 진행한다.
김갑유 변호사가 변호사를 한 지 25년, 중재업무를 한 지 15년. 상전벽해를 실감하고 있다. 처음 중재팀을 만들자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그런 건 한국로펌이 할 일이 아니야, 괜히 영미로펌 흉내나 내고 싶어 하는군’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국내로펌이 중재업무를 하고 중재팀을 앞다투어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 중재업무에 발을 들이게 됐나요?”
“첫 번째 중재사건이 떠오르네요. 진짜 하기 싫은데 끌려간 거예요. 가보니 상대방 변호사는 옥스퍼드 나온 영국변호사로 중재전문가인데 말을 어찌나 잘하는지 정말 저도 ‘아, 저 말이 맞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근데 정신을 퍼뜩 차리니 한국기업 사건에 한국 법을 적용하는 사건인데 한국변호사가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기업에 가장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한국변호사잖아요? 아무런 대책 없이 나섰지만 승소했죠. 몇 차례 승소를 거듭하다 보니 재미도 붙고 한국기업 성장에 꼭 필요한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가 쉽게 이야기하고 운 때문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불모지였던 한국 법률시장을 세계로 돌려세우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은 불문가지. 사실 중재업무를 할 수 있는 로펌은 미국, 영국, 스위스, 프랑스 정도다. 한국기업이 커지고 아시아 시장에서 한국로펌의 중재건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이제는 아시아의 굵직한 중재사건은 한국변호사들이 맡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다.
그렇게 한국 변호사의 중재실력을 인정받게 된 것과 궤를 같이해 김 변호사는 세계적 중재단체의 상임위원을 맡게 됐다.
“남들이 맡고 싶어 하는 자리는 거의 다 맡은 거 같네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하하. 그게 제가 잘나서가 아니고 한국이 그만큼 인정받게 됐다는 의미입니다. 순전히 한국의 위상 덕분입니다. 주요 중재기관, 협의체의 코트멤버(Court Member)라고 부르는, 실질적으로 조직운영을 결정하는 상임위원을 맡아왔어요. 제 임기가 만료되면 우리 변호사들로 채우도록 하고 있고요.”
국제중재의 중심이라고 할 영국의 런던국제중재재판소 상임위원은 5년 임기를 마치고 후임은 박은영 변호사(김&장)가 맡게 됐다. 60대가 대부분인 35명의 상임위원 중 김 변호사는 가장 어린 나이였다. 2008년에는 국제상업회의소 중재법원(ICC) 상임위원이 됐는데, 한국인 중재전문 변호사인 이재기 변호사(화우)가 이미 위원이었으나 김 변호사가 한국의 위상을 볼 때 상임위원이 한 명 더 있어야 한다고 ICC중재법원을 끈질기게 설득해서 스스로 자리를 만들어서 선임된 것이다. 미국중재인협회(AAA)에서는 한국인 최초 이사이다. 흔히 ‘세계상사중재위원회’로 번역되는 ICCA는 1960년에 UN이 만든 국제중재기구로, 세계중재인협회라고도 할 수 있다. 김 변호사는 2009년 우리나라 최초로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다음 해인 2010년 아시아인 최초로 ICCA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김 변호사의 성공은 개인의 영광이라기 보다는 한국 변호사의 실력을 인정받는 것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그에 필적할 동료, 후배들, 우리 변호사 사회는 그런 실력 있는 전문가를 다수 보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에게 멘토를 물어봤다.
“얀 폴슨 ICCA 회장님이요. 스웨덴 태생인데 어릴 때 아프리카에서 자랐고 미국서 교육을 받으셨어요. 미국변호사면서 프랑스에서 일하셨고요. 바레인 국적도 갖고 계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중재인이면서 유대인이 대다수인 중재분야에 비유대인으로서 성공하신 분입니다. 용기를 주시고 많이 도와주세요. 60대인데도 정말 열려있으세요. 제가 중재변호사들 모임에 가보면 어린 편이어서 여러 분들이 도와주시고 잘 봐주셨어요.”
얀 폴슨 회장은 미국 하버드대와 예일대 로스쿨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현재 영국 로펌 프레시필즈 브룩하우스의 국제중재 파트장이며 2010년부터 ICCA 회장을 맡고 있는 국제중재 전문가다. 영국 런던정경대 교수,미국 마이애미대 법학교수, 유럽부흥개발은행(EBRD)과 세계은행 행정재판소장이기도 하다. 김 변호사의 가장 강점은 운이 좋다는 것인데 그 운의 8할은 인복이라 봐도 될 것 같다. 운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김 변호사와 이야기하며 느낀 점이었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도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나를 돕도록 만들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인맥이겠는가.
“저는 변호사를 점쟁이, 택시기사에 자주 비유해요. 점을 보러 가면 뭘 원할까요? 사실 사주팔자는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있어서 인터넷만 뒤져도 돼요. 어려움에 처해서 온 사람에게 갈 길을 이야기해주고 그에 대한 확신을 심어줘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의뢰인의 입장에서 상황과 원하는 바를 정확히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하는 변호사와 정말 닮았습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졌으면 한국법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은 기본입니다. 택시기사에게 운전 잘한다고 칭찬을 할까요? 운전 잘하는 건 기본입니다. 택시 안이 깨끗하고 친절하며 길이 막히면 왜 막히는지 쉽게 설명해야 칭찬받죠. 고객을 기분 좋게 모셔야 합니다. 법률시장 개방이 돼서 한국변호사의 능력을 의심받는다? 절대 아닙니다. 일의 질은 최상인데 마케팅 능력, 관리능력은 외국계 로펌을 배워야 합니다. 배울 것은 배우고 정신 차려 일하면 충분히 경쟁에서 살아남는 걸 넘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변호사란 점쟁이처럼 갈 길을 예언하되 확신을 심어주는 사람인가 보다. 이렇게 단호하게 변호사의 서비스정신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변호사 중에선 드물다. 그의 뒤를 따르고 싶어하는 로스쿨생이나 청년변호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후배들, 로스쿨생들에게 강의하면 가장 많이 묻는 말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하느냐’ ‘공부를 얼마나 잘해야 하느냐’를 물어요. 저는 학생이면 공부가 직업이니 열심히 공부하고 헌·민·형 열심히 공부하는 게 답이라고 해요. 영어, 저도 잘 못했어요. 중재현장에서 사용하는 영어는 학원가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영어 잘해서 승소하는 거 아니거든요. 영어 배우려면 돈을 받고 배우라고 이야기해요. 의뢰인에게 돈 받으면 절대 졸 수도 없는 현장에서 하루종일 영어를 하고 들으며 실력이 늘 수밖에 없어요. 보고 배우는 게 최고입니다. 막 변호사 시작한 후배들에겐 마케팅 능력과 프리젠테이션 능력 키우라고 말해줘요. 소송은 오페라나 마찬가지예요. 노래와 스토리는 바꿀 수 없는데 누굴 캐스팅하고 연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무지하게 재미없을 수도, 흥미진진할 수도 있거든요.”
인터넷을 뒤져보면 김 변호사의 강연에 감명받은 학생들의 후일담이 쏟아졌다. 정말 실제적인 장래계획에 도움이 되는 충고라는 평들이다. 허세 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이야기해주니 나오는 반응들이다.
“제가 사람을 뽑을 때는 체력과 매력을 가장 중시해요. 순간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힘은 체력에서 나오는 겁니다. 모든 일의 기본이기도 하고요. 매력은 뭐랄까, 설명하긴 어렵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애정이 드러나는 게 아닐까요.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구요. 실력은 빌릴 수 있지만 매력은 빌릴 수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성공비법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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