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변호사회에서 행사기념품으로 연갈색 서류가방을 나눠준 적이 있다. 품질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만 쉽게 들고 다니기 편해서인지 요즘 그 가방을 들고 법정에 드나드는 변호사들이 종종 눈에 띈다. ‘변호사 책가방’으로 불리는 그 가방을 들고 가면 법원 직원들도 출입 통제를 하지 않아 사실 편하다. 헌데, 그 가방을 선물로 받고 되레 기분 나빠한 변호사들도 꽤 있었단다. 한 젊은 새내기 변호사가 가방을 받아들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변호사가 무슨 레자야?”
많은 변호사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앓고 넘어가는 병이 있다. 일명 ‘변호사증후군’으로 불리는 이 병은 다양한 증상을 동반하나, 핵심은 “나는 변호사니까”로 요약된다.
일단 변호사증후군을 앓게 되면 마이너스 카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법시험 합격 기념으로 은행권에서 한도 넉넉하게 발급해준 마이너스 카드는 연수원 시절을 윤택하게 만들어준 일등공신이요, 마이너스로 왔다가 마이너스로 가는 변호사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인 까닭이다. 마이너스 대출로 주식 투자도 하고, 전세금도 내고, 유학도 다녀온다.
변호사증후군의 또 다른 증상은 삶의 ‘질’에 대한 까다로운 취향이다. 신림동 시절엔 2500원짜리 뷔페 음식도 없어서 못 먹었건만, 이젠 ‘호텔 스테이크는 물린다’는 말이 자연스레 나온다. 1년에 한 번 이상 해외여행은 꼭 나가줘야 하고, 품위 유지 차원에서 옷이나 가방은 좀 블링블링해야 한다. 인적 네트워크를 위해 골프도 가끔 쳐줘야 하고, 배우자도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 최소한 전문직 이상은 돼야 한다.
변호사증후군 증상의 결정판은 변호사에겐 한방이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다. 이 모든 마이너스 대출과 카드 대금이 큰 사건 하나를 수임함과 동시에 한방에 해결될 것이라는, 과거 변호사 황금기 세대의 수많은 사례에 기초한 자기최면에 가까운 바람이다.
변호사개업 이후, 경증의 변호사증후군을 앓던 친구 한명은 어느 날 퍼뜩 깨달았다고 한다. 분명 매월 수백만원의 월급을 받고 회의료 명목으로 들어오는 여윳돈도 적지 않으니 시간이 지나면 돈이 쌓이는 게 정상인데, 어찌 된 일인지 통장엔 마이너스 대출만이 늘더란다. 힘들게 일하고도 모이는 게 없으니 일하기도 싫고 스트레스만 커져가던 친구는 고민 끝에 원인을 알아냈다. 변호사증후군을 가볍게 생각한 자신이 바로 주범이었다는 것이다.
변호사가 궁상맞게 원룸에 살 수 없으니 마이너스 대출을 끌어다가 오피스텔 전세금을 냈고, 변호사가 사교에 무관심할 수 없으니 골프도 배웠고, 변호사가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으니 골프채도 최고급으로 샀단다. 최고급 골프채를 격 떨어지게 경차에 실을 수 없으니 괜찮은 자동차도 무리해서 할부로 구입했고, 돈 잘 버는 변호사를 키워낸 부모님과 친척들의 기대를 생각해서 가족 대소사마다 상당액을 쾌척했다고. 이로써 매월 들어오는 월급의 상당 부분은 은행 이자로 뭉텅 잘려나가고, 마이너스 통장은 가족의 공유물처럼 되었으며, 돈에 대한 감각이 점점 무뎌졌다고 한다.
현실 타개책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친구가 선택한 방법은 금전출납부를 쓰는 것이었다. 일단 매달 버는 돈이 어디로 새나가는지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에 수첩에 좍좍 줄을 긋고 입출금 목록을 적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두달 돈의 흐름을 추적해보니 역시 ‘마이너스 대출’과 ‘카드 할부’가 문제였다. 대출과 할부의 치명적인 유혹으로 변호사증후군이 심해지기 시작했고, 사치품 구입이 급격히 늘어났던 것이다. 절약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깨달은 친구는 결국 집세가 싼 곳으로 이사를 했고, 대출금을 갚을 때까지 품위유지비는 없다는 굳은 결심으로 허리띠를 졸라맸다. 월급에서 최소 생활비를 제외하고 남는 돈의 대부분은 대출금 상환에 썼지만, 동시에 적금도 몇 개 들었다. 돈 벌어서 빚만 갚다 보면 오늘도, 내일도 마이너스라 쉽게 포기할 수 있기에 조금씩 불어나는 적금액을 보며 마음을 달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금전출납부 예찬론자가 된 친구의 권유로 나도 금전출납부를 쓴다. 습관이 들기까지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지만 한달만 써보아도 확실히 얻는 게 있다. 우선 그동안 나도 모르게 그 많은 돈이 빠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람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으로 이어진다. “레자가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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