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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헌법소원으로 세상의 소금이 된 이석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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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호] 승인 2012.05.10  10: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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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적 이념과 가치 실현되는 사회를 꿈꾸다

이석연 변호사의 인생행로는 특이하다. 그는 법제처 사무관으로 있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법제처는 그 시절 인기 없는 부서였다. 대부분이 어떻게 하면 다른 부처로 자리를 옮길까 하는 곳이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그는 법제처의 사무관 자리로 원대복귀했다. 성적이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신분을 세탁해서 판사가 됐어야 맞다. 아니라면 적어도 인기 정부부처의 서기관쯤 가야 맞다. 그게 당시 보통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런 욕구가 없었다면 그가 왜 사법시험에 합격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의 다음 행보 역시 보통사람의 궤도와 다르다. 그는 헌법연구관이 됐다. 그 자리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자리가 아니다. 변호사로서 돈 버는 데 도움이 될 직책도 아니다. 그의 행보는 변호사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시민운동을 하면서 재벌개혁, 소수자의 인권, 부패와 세금을 감시하는 역할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에게는 보통사람들에게 없는 지도자로서의 안목과 자질이 숨어있어 그때그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는 법제처장으로 정부에 들어가 일하게 됐다. 차관인 친구로부터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정권초기 차관들 임명장을 받을 때였다. 그는 부부동반으로 새벽에 청와대에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관료로서 종착역인 차관은 영광의 자리였고 청와대의 말은 지상명령이었다. 그런데 이석연 법제처장만 예외였다. 임명장 하나 받는데 왜 꼭두새벽부터 가야하느냐면서 비합리적인 것을 정확히 지적하더라는 것이다. 이따금 매스컴을 통해 이석연 법제처장의 쓴소리를 들었다. 그는 무조건 복종하면서 대통령의 눈치를 보는 각료가 아니었다. 그는 서울시장 선거 때 한나라당 후보로 떠오르기도 하고 국무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낮고 험한 좁은 길을 선택한 그는 어느 순간 좋은 지도자감으로 세상에 비쳐지고 있었다. 2012년 3월 8일 오전 나는 변호사명부를 뒤지다 이석연 변호사의 갸름한 얼굴을 보았다. 교대역 앞의 빌딩 간판에 그의 이름이 걸려있던 걸 며칠 전에 본터라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물었다.
“점심 같이 할래요?”
예의에 벗어난 질문이었다. 그러나 담백하게 대하고 싶었다.
“사무실 직원들하고 먹기로 했는데… 오후 다섯시쯤 오시죠. 얘기하고 근처 식당에서 같이 저녁 먹읍시다.”
그의 소박한 대답이었다. 해가 설핏할 무렵 걸어서 5분 거리인 그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작은 로펌의 구석방에 그가 있었다. 흰 와이셔츠에 안경을 쓰고 단정하게 앉아있는 그의 모습에서 조선의 전형적인 선비를 느꼈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군대문제가 화제로 떠올랐다. 내가 철책선이 있는 전방부대에서 고생할 때 그 역시 인근부대의 정훈장교였다. 정훈장교 시절 그는 전두환 정권의 헌법 중 대통령 간선제를 얘기했다가 요주의 인물이 되어 보안부대에 혼이 나기도 했다. 그의 행동은 당시도 특이했다. 별판을 단 장군지프차에 경례를 하지 않았다가 영창에 갈 뻔했다.
“국무회의에 참석해 보니까 어땠어요?”
이명박 정부의 내부사정에 호기심이 일었다.
“대단할 것 같지만 의외로 허술한 면도 있어요. 몇 사람이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그게 집행되고 그래요. 연평도 포격사건 때나 김정일이 죽었을 때 말이죠. 대통령이 바로 국민 앞에 나와 당당하게 말해 주기를 원했어요. 그런데 옆에서 모셔보니까 실제로는 연약한 점도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쉽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 벼슬을 주면 감지덕지 하고 평생 모시는 게 관료들의 충성이었다. 그가 계속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잘못 기소한 게 세 개 있어요. 미네르바하고 KBS의 정연주 사장 그리고 전 국무총리 한명숙이죠. 모두 무죄가 나왔잖아요? 잘못한 거죠.”
그가 법무장관이었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건데 하는 강한 의지가 얼굴에 비쳤다. 그가 계속했다.
“정부에서는 친서민 중도실용정책을 편다고 하는데 서민정책을 책임지는 장관들이 가진 분들이더라고요. 그분들이 과연 서민과 공감될지 의문이었어요.”
그에게서 꼬장꼬장한 조선의 유림이 느껴졌다. 악의적으로 누구를 미워서 하는 소리가 아닌 게 틀림없었다. 변호사인 그의 개인얘기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아 물어보았다.
“1994년 처음 시작할 때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었어요?”
“동아일보에 개업광고를 냈는데 앞으로 소비자, 노약자, 환경소송을 하겠으니 오라고 했죠. 그랬더니 돈 안 되는 소송을 광고하냐고 하더라고요.”
“그 다음 어떤 일을 했죠?”
“제가 헌법박사고 헌법연구관으로 있었잖아요? 헌법재판을 활성화하면 사회전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걸 알고 있었죠. 그래서 불공정이 발견될 때마다 헌법소원을 시도 했어요.”
“어떤 헌법소원을 했죠?”
“제가 살고 있는 국회의원 지역구인 강남을의 인구가 28만 명이었는데 국회의원 한명을 뽑았어요. 그런데 당시 장흥은 인구 4만 명에서 의원 한 명이 나오는 겁니다. 내 가치가 장흥사람의 7분의 1밖에 안 되는 거죠. 그래서 평등권 침해로 헌법소원을 했더니 위헌결정이 나오고 그 다음부터 전국의 국회의원 판도가 바뀌었죠.”
정치적 지각변동을 일으킨 당사자였다.
“또 다른 건 뭘 했죠?”
“제대군인들이 취직을 할 때 가산점을 주는 게 특혜 같더라고요. 장애인이나 여성은 군대 가고 싶어도 못가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래서 헌법소원을 제기해서 위헌결정을 받아내니까 제대군인에게 가산점을 주던 게 폐지됐죠. 내가 비용을 직접 대면서 한 기획소송인데 내가 군대를 갔다 왔기 망정이지 안 갔더라면 몰매 맞을 뻔했죠. 아들이 군대 갔다 와서 기자가 됐는데 혜택을 못 받았죠. 또 다른 헌법소원은 택시기사가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와 하는 하소연을 듣고 한 거죠. 아버지가 빚보증을 가득 해놓고 돌아가셨는데 그걸 몰라 빚만 잔뜩 물려받게 된 겁니다. 한정상속 신고를 3개월 내에 해야 하는데 그걸 모르는 바람에 단순상속이 된 거죠. 그래서 헌법소원을 내서 상속법 규정에 대한 위헌결정을 받아냈었죠. 그 다음부터 국민이 그런 피해를 받은 경우가 없습니다. 또 경제위기 와중에도 국회의원들이 세비를 인상하고 보좌관을 늘리는 법령을 만들었더라고요. 그래서 헌법소원으로 제지했죠.”
그 외에도 그가 한 일이 수두룩했다. 결혼식장에서 축하객들에게 음식물을 접대하면 처벌하도록 되어 있던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도 효력을 정지시켰다. 검사의 부당한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을 가능하게 하고 형사처벌을 받은 전직대통령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던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그런데 그런 헌법소원으로 개인적인 어떤 이익을 봤다는 얘기는 없었다. 그가 덧붙였다.
“노무현 정권 때 수도를 이전하려고 신행정수도 이전 특별법을 만들었어요. 야당이던 한나라당도 찬성해 줬었죠. 저는 조선조 이래 서울이 대한민국의 수도라는 사실은 국가의 정체성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국민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야 하는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죠.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발끈하면서 저한테 강력 대처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죠. 내가 헌법소원을 제기한 게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무슨 강력대처냐고 저도 반발을 했었죠. 저는 수도를 이전하려면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결국 수도이전특별법이 위헌결정이 나서 옮기지 못하게 됐죠.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눈물겹도록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협박전화가 오기도 하고 그들의 오적(五賊)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나는 문득 그가 추구하는 게 뭘까 궁금했다. ‘민변’과 대치점에 있는 ‘시민과함께하는변호사들(시변)’을 조직하기도 했었다.
“이석연 변호사가 추구하는 이념이나 가치는 어떤 겁니까?”
“제가 추구하는 건 헌법적 이념과 가치입니다.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상당히 많은 진보적 개념을 도입하고 있죠. 얼마 전 대두된 무상급식문제도 그냥 포퓰리즘이 아니라 헌법적 근거가 있어요. 의무교육의 내용 중에 학비, 교재의 무상뿐 아니라 급식도 포함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헌법은 아이들 밥도 그냥 먹여야 한다는 거죠. 그 외에도 생존권적 기본권이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 등이 상당히 앞서 나간 개념입니다. 진보와 보수의 정책들을 모두 다 헌법 안에 아우를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즈음 대통령 후보들에게는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던데 어떻게 생각하죠?”
“그것도 헌법 제119조에 있는 개념이죠. 다만 제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것은 경제민주화란 원칙규정이 아니라 예외규정입니다. 헌법 제119조 제1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죠. 그리고 제2항에서 예외적으로 경제민주화를 위해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외를 원칙으로 바꾸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죠.”
“박원순 변호사의 참여연대와 쌍벽을 이루면서 경실련 사무총장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차이점을 얘기해주시죠.”
“서울대 교정에서 박원순 변호사와 여러 논쟁을 벌였죠. 제 시각으로 박 변호사는 조금 과격해 보였습니다. 저는 모든 운동을 법의 테두리 내에서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그러나 박원순 변호사는 ‘악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생각인 것 같았죠. 국회의원 낙선운동만 해도 그렇습니다. 저는 그건 법이 금하고 있으니까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시민운동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해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고 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저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는 먼 길을 돌아와 다시 자연인인 변호사가 됐다.
“변호사의 제2막이 시작됐는데 이제 어떤 일을 할 겁니까?”
“이 사회에서 억울한 사람이 줄어드는 일을 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낸 세금이 제대로 쓰여지는지를 감시하는 일 두 가지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죠.”
“기자가 된 아들이 얼마 전 ‘부러진 화살’이란 영화를 보더니 그대로 믿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세상의 민심입니다. 영화 중에 나온 화살을 맞은 박 판사는 함께 헌법연구관을 한 동료이기도 하죠. 우리의 법제도를 보면 사람들이 한을 품게 만든 요소가 참 많아요. 국민 입장에서는 항소기간이나 다른 제소기간이 하루만 늦어도 각하 당하게 효력규정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정부나 사법부 측의 규정들을 보면 대개가 훈시규정인 겁니다. 180일 내에 처리하도록 되어 있지만 몇 년을 끌어도 상관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판결 선고기간 보세요. 규정이 있지만 마음대로 늘여도 됩니다. 이런 게 다 원성을 일으키는 요소가 되는 거죠. 법을 국민에게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법치주의도 쌍방통행이 되게 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다음은 세금입니다. 정부에서 일해 보니까 영수증 없이 사용하는 특수활동비가 1조4000억이 돼요. 무슨 꿍꿍이로 국민의 돈을 그렇게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지예산 없다고 떠들 필요 없어요. 새어나가는 세금만 잘 막으면 복지에 충분히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이런 종류의 사람으로 형성된 배경이 궁금해졌다.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오게 됐죠?”
“두 가지 계기가 있습니다. 사마천에게서 많은 매력을 느꼈습니다. 대학시절 고시공부에 매달리면서 사기의 집필과정을 밝힌 사마천의 글을 읽고 눈이 번쩍 뜨인 거죠.”
그의 서가에는 사마천의 사기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그가 책상 위에 있던 사마천의 이런 글을 내게 건네줬다.
‘이 치욕과 수모를 생각할 때마다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뒤틀리고 등골에 흐르는 땀이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살아남았던 것은 오직 하나, 하늘과 인간의 도리를 탐구하여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는 한편의 학술을 완성하겠다는 한줄기 집념 때문이었습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도 “온 생의 무게를 펜 하나에 지탱한 채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나를 변화시킨 또 다른 한분은 변정수 헌법재판관이었죠. 그분은 고등학교만 졸업한 수재죠. 그 분에게서 사건의 배후에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공권력의 남용에 맞선 투쟁정신을 배웠습니다.”
“이석연 변호사의 사무실을 찾아오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태도는 어떻게 합니까?”
사회에 독이 오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무실 문을 집요하게 두드릴 게 틀림없었다.
“한이 맺힌 분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법적인 대처방법이 없어도 그들의 말을 꾹 참고 들어주는 겁니다. 반드시 얘기를 들어줘야 할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나도 당한 사람이라고 동감해줘야 합니다. 기세 등등하던 사람들도 변호사가 열심히 들어주면 안정이 되고 납득이 되어 갑니다. 그런 게 우선 필요한 거죠. 여건이 되면 앞으로 저는 국민대표소송법을 만드는 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무책임하게 정책을 만들어놓고 가버리는 관료나 장관에게 배상을 청구하도록 하는 거죠. 그래야 책임 있게 행동합니다. 요즈음은 통신료가 너무 비싸다는 걸 알았어요. 가계부에서 몇 번째 항목으로 휴대전화 비용이 있더라고요. 그걸 내리는 운동을 전개하는데 대기업을 맡은 로펌이 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것들을 찾아서 해야죠.”
그의 눈에는 수많은 공익소송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느새 창으로 내다보이는 빌딩 위로 저녁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얘기를 더 하기 위해 근처의 밥집으로 향했다.
/ 엄상익 공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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